교토에서 함께 활동했던 두 사람은 1943년 7월 ‘재교토 조선인 학생민족주의 그룹사건‘의 주요 인물로 검거되어 2년 형을 선고받고 이곳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된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윤동주 사후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사망 전보를 받고 와서 시신을 인도받아 화장했다. 그의유해는 1945년 3월 6일 길림성 명동촌 인근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송몽규 역시 다른 곳에 안장되었다가 윤동주의 곁에 모셔졌다.- P78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P79
"우범선이 곤녕전에 도착하니 명성황후는 이미 칼에 베여 마루에 쓰러진 채로 후후 숨을 쉬고 있었다. 장사들은 사진을 보며 왕비를 확인하려고 했으나 왕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조금있다가 절명했다. 우범선은 구연수와 하사관에게 명해 왕비의 사체를 이불 위에 얹고 그 위에 다시 이불을 덮어 새끼줄로 묶어 옆창고에 넣었다. 곧 사체를 동산 기슭으로 옮겨 석유를 끼얹어 태웠다. 타다 남은 뼈는 하사관이 못에 갖다 버렸다."- P83
우범선은 사카이 나카라는 일본 여자와 결혼도 하지만 1903년 11월 24일, 히로시마현구레시 와쇼정 2079번지(현재의 와쇼 17번지)로 알려진 집에서 살해된다. 그를 죽인 사람은 조선에서 온 고영근(高根, 1853~1923)이었다. 고영근은 범행 직후 와쇼 파출소에 가 자수한다. 그는 우범선을 살해한 이유로 "국모시해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P84
고종과 명성황후를 향한 고영근의 충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922년 12월 그는 닷새간 야밤에 인부들을 동원해 방치되어 있던 황제 능비에 ‘고종태황제‘, ‘태황후‘ 등 여덟 글자를 새겨 넣은 뒤 비각 안에 세웠다. 고종의 묘비에 ‘황제‘를 쓰지 못하게 하고 ‘대한‘ 앞에 ‘전자를 붙이라 했던 일제 때문에, 고종 사후 4년이 넘도록 묘비를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조선 땅에서 아무도 해내지 못한 일을 결국 해낸 것이다. 일제는 발칵 뒤집혔고, 고영근 역시 이 일로 인해 1923년 3월 파직되고 만다. 그는 자신의 일을 다 마쳤다는 듯 한 달 뒤 사망한다.- P84
2024년 초, 영화 <파묘>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영화에서 배우 유해진 씨가 연기한 인물의 이름이 고영근이었다. 우범선을 살해한 고영근에서 차용한 인물이다.- P85
이곳에 서볼 것을 추천하는 이유는, 1400여 년 전 백제인의 숨결이 여전히 이곳 미즈키 유적을 비롯해 열도 전역에 전해지기 때문이다. 만주 벌판에 서면 고구려와 발해의 기상이, 일본 열도에 서면 백제인의 선진 문명이 아로새겨진다.- P89
그러나 시간이 흘러 다자이후의 역할은 축소되었고, 이곳으로 부임되는 것을 ‘좌천‘으로 인식하는 경향 또한 늘었다. 나라 시대인 740년에 당대의 귀존인 후지와라노 히로츠구藤原広嗣가 다자이후로 좌천된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다자이후 정청 주춧돌과 터만 남아 있다.- P91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이토가 이홍장을 불러다 그 유명한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은 곳에 왔다. 재밌는 건 역사를 뒤흔든 그 장소가춘범루라는 음식점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성업 중인 고급 복어요릿집이다. 여담이지만 시모노세키 지역 특산물이 바로 복어다. 시모노세키곳곳에서 복어 요리를 아주 쉽게 접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 시간을 내서 복어탕과 복어지리를 먹어 볼 것을 추천한다. 다만 시모노세키에서는복어3 <, fugu를 일본식 발음인 ‘후구‘가 아니라 ‘후쿠‘로 발음한다. 복자와 음이 같기 때문이다. 복어를 먹으면 복이 들어온다는 이유라고 한다. 식당에 들어가 복을 부르는 ‘후쿠‘를 시켜 먹자.- P106
터널을 걷다 보면 불현듯 머리 위로 거대한 선박이 오간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인간의 기술이 경이롭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물론 그런 감상 때문에 이 터널에 가보기를 추천하는 것은 아니다. 이곳에서 일본의 역사가 펼쳐졌고, 이곳이 한반도와 조선의 관계에서 주요한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조선통신사의 왕래부터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의 비극까지, 이 좁은 해협을 오가며 교류도 충돌도 있었다. 이 터널은 마치 과거와 현재를 잇는 듯한 느낌을 준다.- P111
이와쿠라 사절단의 표면적인 목적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과 조약을맺은 서구 제국 수장들에게 일왕의 국서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진짜 목표는 최혜국 대우 등으로 점철된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는 것이었다.
반강제로 개항하면서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불평등 조항을 만국공법(국제법)‘의 취지에 맞게 바꾸는 게 진짜 목표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시구의 선진 문물을 습득하겠다는 것이 두 번째 목표였다.- P113
하지만 이곳 역시 다르지 않다. 자신들이 입은 상처만을 부각한다. 더나아가 오히려 자신들을 전쟁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로 만들려 한다. 오직미국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로 입은 자신들의 피해를 부각하는 주장만 있을 뿐, 목숨을 잃은 수많은 식민지 조선인들에 대한 가해 사실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살아남은 자가 함께 풀어내야 할 과업이다.- P129
천하영웅 윤봉길이
마지막 한 달을 보낸 곳 오사카성
오사카성 도요토미 히데요시 신사 뒤쪽에 비석이 하나있다. 일본 육군의 오사카 위수구금소가 있었던 자리임을 알려 주는 비석이다. 바로 이곳이 스물다섯 청년 윤봉길이 생의 마지막 한 달을 보낸 장소이다.- P136
윤봉길은 상하이 일본 헌병대 사령부 지하에 6개월 넘게 구금되어 있다가 1932년 11월 18일 일본으로 이송된다. 우편 수송선 타이요마루 편으로 고베항에 도착해 오사카성 내 육군 위수구금소에 수감되어 한 달 동안독방 생활을 한다. 사형 집행지가 일본 육군 제9사단의 주둔지인 가나자와로 결정되면서 12월 18일 오사카 헌병대에 의해 이송된다. 그는 가나자와 제9사단 위수구금소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인 12월 19일 오전 7시 27분에 미간에 총을 맞고 미쓰코지산 육군 작업장에서 순국한다. 이에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7부 <가나자와> 편에서 다뤘다.- P137
아이러니한 점은 일본 육군 제1사단이 전쟁을 벌이고 주둔했던 중국, 태국, 한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이 쇼핑몰의 주된 고객이라는 사실이다. 제4사단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참전했으며, 1937년경에는 관동군에 배속돼 중국과 전투했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방콕에 주둔했다. 구글 리뷰에도 ‘한국인이 이곳을 참 좋아하는 건 재밌는 일‘이라며 비꼬는 글이종종 올라온다. 오사카성 천수각과 미라이자가 그런 곳이었다는 것만 잊지 않으면 좋겠다.- P141
무엇보다 염상섭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덴노지 공원은 3·1운동 기념일을 비롯해 5월 노동절, 8월 국치일, 9월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일 등항일 집회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1927년 6월 1일 열린 조선총독 폭압정치 규탄대회에는 4000여 명이 참가했다. 이 대회는 1925년 11월 검거된 조선공산당원에 대한 가혹행위, 전남 완도군 소안도 소안학교 강제폐쇄 등 국내에서 벌어진 식민통치의 모순을 배경으로 일어났다. 이를 기점으로 같은 해 7월과 8월에도 연설회가 이어졌고, 이후 오사카 조선인노동조합이 반제반일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현재의 덴노지 공원 어디에서도 관련 흔적을 찾을 수 없다.- P144
조명하 의사는 1928년 5월 14일 오전 9시 55분, 대만 타이중 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도서관 앞에서 일왕 히로히토의 장인이자 일본 육군 대장이었던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邇宮邦彥王, 1873~1929)에게 독을 바른 단검을던졌다. 구니노미야는 8개월 뒤인 이듬해 초 세균 감염에 의한 복막염으로 사망한다.- P150
조 의사가 던진 단검에 묻은 독이 사망의 원인이 됐다. 하지만 현장에서 체포된 조명하 의사는 구니노미야의 죽음보다 앞서 타이베이 형무소에서 순국한다. 그의 나이 스물셋에 불과했다. 고향에는 부인과어린 아들만 남았다.- P151
당시 구니노미야는 여덟 대 차량 중 두 번째 무개차(지붕 없는 차)에탑승했다. 조명하 의사는 차량에 뛰어올라 칼을 던졌지만 실패했고, 재차칼을 던져 구니노미야의 목덜미와 어깨에 찰과상을 입혔다. 당시 현장에서조 의사는 군중들을 향해 "여러분들은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단지 조국 대한을 위해 복수를 한 것이다. 대한민국 만세"라고 외친 뒤 일본 군경에게 체포됐다. 당시 일제는 배후를 캐기 위해 갖은 수를 썼지만 조 의사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단독 의거임을 강조했다.- P153
조 의사는 1928년 10월 10일 타이베이 형무소에서 순국한다. 순국 직전형리가 마지막 할 말이 없는지 묻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삼한의 원수를갚았노라. 아무 할 말은 없다. 죽음의 이 순간을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다만 조국 광복을 못 본 채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저세상에 가서도 독립운동은 계속하리라."- P154
우리 역사는 조명하 의사를 온전히 기억하지 못했다. 그가 한인애국단이나 의열단 등 어떤 항일단체에도 속하지 않았고, 어떤 도움이나 지원도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단독으로 거사를 준비하고 실행했던 까닭이다.- P154
•국립서울현충원 조명하 의사 묘: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44번 묘 참배 후 고개를 들면 좌상단에 국가공인 친일파 신태영과 이응준의 묘가 보인다.
조명하 의사 의거 장소: 옛 타이중 도서관 앞 사거리. 2018년5월 14일 의거일에 맞춰 고시패가 세워졌다.
•조명하 의사 순국 장소: 옛 타이베이 형무소 자리. 형무소 옛벽이 온전히 남아 있지만, 조 의사 관련 흔적은 없다.- P155
대만 조명하 의사상: 타이베이 한국학교 교정, 한국인들의 자부심으로 기억하기 위해 2019년 5월 11일 세워졌다.
서울대공원 조명하 의사상: 1988년 5월 14일 조명하 의사 의거 60주년을 기념하여 건립됐다. 인근에 국가공인 친일파 김성수의 상도 함께 있다.- P156
한편 앞서 말한 대담에서 조 선생은 서울대공원에 조명하 의사상을 세우기까지 쉽지 않았다고 말한다. 조 선생에게 독립투사의 후손이라는 사실은 훈장이 아니라 멍에였다.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이 죄를 지은 게 분명히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 남은 가족이 겪는 고초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어요 (중략) 관청이든 누구든 간에 와서 ‘조명하 의사‘ 이렇게 말만 꺼내면아버님이 돈을 줘야 했고, 아버님은 항상 굽실거리며 살았어요. (중략) 이건 외롭지 않은 겁니다. ‘나라에 목숨을 바친 사람의 후손이 왜 이렇게 항상굽실거리 말해야 하지? 이건 나라가 해줘야 되는 일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절로 솟구쳤습니다. "후손이 아니라 국가가 해야 하는 일이 아닌가?
후손의 회한을 넘어 사회와 국가에 던지는 뼈아픈 질문이다.- P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