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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정 서재

시집, 시집을 간다. 그녀가. 얼굴도 모르는 남자에게.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뿐 결혼은 꿈에도 생각지 않은 일이었다. 그날 밤 그녀는 거울을 보고 앉아 소담스럽게 잡히는 자신의 머리를 손으로 움켜쥐고 잘 들지도 않는 녹슨 가위로 싹둑 잘라냈다.
"한문을 배워야 마음이 순해지고 세상의 이치를 알게 된다. 옥남이도 부지런히 글을 익혀서 신사임당처럼 훌륭한 여자가 되거라."
양남진은 훈장이 없을 때면 그녀를 불러 일본말을 가르쳐주었고, 어떻게 해서든 학교를 가야 한다고 그녀에게 꿈을 심어주었다. 양남진에게 일본말을 배우다 훈장에게 들키는 날이면 무릎을 꿇고 앉아 벌을 받아야 했다.
"옥남이는 조선말을 다 아느냐?"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 선생의 코피자국은 양남진의 사각모처럼 그녀를 흥분시켰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부서지고 밀려가는 바닷물처럼 양남진이나 김진환을 보고 있으면 멈춰 있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앞을 향해 돌진하는 신선한 힘이, 생명력이 그녀에게까지 옮겨오는 것 같았다.
신들린 사람처럼 졸라대는 어머니를 말리지 못하고 온 가족이 구례로 돌아온 것은 섣달 그믐날이었다. 이상하게 고향으로 가자고 조르던 어머니는 고향에서 봄을 채 보내기도 전에 아이를 낳다 세상을 뜨고 말았다.
거미줄에 걸린 나방은 최후의 힘까지 짜내 발버둥치다가 결국은 그물을 벗어나지 못하고 죽는다. 그녀는 마치 자신이 거미줄에 걸린 나방처럼 느껴졌다. 양남진의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하던 검정 교복이나 김진환의 강의록에 점점이 떨어져 있던 검붉은 코피의 흔적이 자꾸 그녀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살아가기 힘들 것이오. 바보같이 나 기다리지 말고, 몇 해 기다려서 오지 않거든 다른 사람 찾아가오. 내가 가고 나면 지금보다 훨씬 더 힘들어질 텐데……. 당장 당신 외가로 가 있으려오?"
"어머니, 우리 관산댁 잘해주씨요이. 관산댁 참 좋은 사람이요, 어머니."
그녀의 친정이 관산리이니 관산댁은 곧 그녀를 가리키는 택호였다. 내내 울먹거리는 시할머니와 시부모에게 활짝 밝은 웃음을 보이며 남편은 곧 그들 곁을 떠나갔다.
"출전용사 최규복 만세!"
"살아오라 김갑동!"
"무운장구!"
수많은 청년들이 전쟁터로 끌려갔지만 살아서 돌아오기는 남편이 처음이었다.
그 봄부터 남편은 군청에 다니기 시작했다. 자전거로 출퇴근을 했지만 읍내까지 다니기가 너무 멀어 두어 달 뒤 면으로 옮기더니 무슨 까닭인지 금세 직장을 그만뒀다. 그리고 남편은 조금씩 변해갔다. 남편의 귀가시간이 한 시간씩 두 시간씩 늦어져갔다. 드디어는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밤을 새웠는지 첫새벽에 충혈된 눈으로 들어온 남편은 아침도 거른 채 곯아떨어지기 일쑤였다.
"매국노 이승만은 미국으로 돌아가라!"
"타도하자 친일파 민족반역자!"
"정권은 인민에게로! 토지는 밭갈이하는 농민에게로!"
삐라에는 붉은 글씨로 그렇게 적혀 있었다. 남편도 그런 일을 하는 것일까?
"예, 좋은 세상 만들라고요."
"해방이 됐는디 또 먼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남편이 그토록 빠져 있는 좌익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지만 남편이야 무슨 일을 하든 그녀는 여전히 층층시하 대가족의 맏며느리일 뿐이었다.
47년 7월 그녀는 남조선 노동당에 입당했다. 그리고 광의면 여맹위원장이 되었다.
"우리 여자들도 남자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근데 우리가 언제 사람대접을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여자라고 공부도 못했고, 부뚜막에서 밥을 먹어야 했고, 딸자식은 딴 집 식구니 입이나 줄이자고 철도 안 든 나이에 시집을 가야 했습니다. 우리들은 친정에서나 시집에서나 태어나면서부터 종처럼 살아왔습니다. 여러분, 우리 여자들이 남자와 똑같은 사람으로 대접받으려면 봉건적 잔재와 계급을 타파해야 합니다. 평등한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르르 방으로 몰려들어온 경찰들이 곡괭이로 방구들을 내리쳤다. 백년 묵은 방구들이 곡괭이에 부딪쳐 불꽃을 튀기며 부서졌다. 그녀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이 개 같은 놈들. 짐승이라도 이러진 않겠다아 이놈들아!"
시어머니가 바락바락 악을 쓰며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단지 목숨만 붙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치욕스럽고 절망스러운 것인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기를 그렇게 만든 게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저 자기 삶이 아닌 것 같은 시집살이를 하면서 막막하고 답답하기만 했던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한겨울에 차가운 물 속에 들어앉아 있자니 춥기도 하려니와 장이 상했는지 점점 설사가 심해지더니 나중에는 피똥이 나왔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참고 견디는 것 외에 뾰족한 수가 없었다.
광의면당은 천은사골, 화엄사골, 문수골 등 주로 노고단 근처를 넘나들며 토벌대의 끈질긴 공격을 피해 다녔다. 토벌대가 물러간 밤에는 각 마을로 내려가 정보를 수집하거나 비밀조직을 만들고 보급투쟁을 하는 등 당 정비, 강화사업에 주력했다.
좌익 가족은 개보다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런 박춘산의 어머니를 쫓아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 막내 박병주의 나이가 열다섯이었다.
잘 익은 밤송이처럼 단단하고 야무지던 병주는 나중에 남부군 사령관 박종하의 연락병을 지냈는데 어디에서 죽었는지 알 길이 없고 박춘산도, 그의 어머니도, 누이 정숙도 백운산과 지리산에서 토벌대의 총탄에 쓰러져 한 많은 눈을 감아야 했다. 무덤 하나 없이 온 식구가 남녘의 산에 뿔뿔이 흩어져 한줌의 흙으로 썩어간 것이다.
"아니요! 안 봤어라. 형수 안 봤다고라. 나는 산에도 안 갔어라!"
아홉 살짜리 소년은 기어이 형수와의 약속을 지켜낸 것이다. 어린 시동생이 자기와의 약속을 지켜내느라 어떤 고초를 당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녀는 시간만 나면 시아버지와 시동생들이 힘없이 걸어 내려가던 골짜기를 쳐다보았다.
그 날 이후 그녀는 시아버지를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며느리 얼굴 한 번 보았다는 죄로 끝내 총살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등사기를 짊어진 남자가 누구인지, 그가 나중에 그녀와 어떻게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채 두 사람의 짧은 첫 만남은 그렇게 스쳐갔다. 그러나 그녀의 가슴속에는 세 남자의 활기찬 모습과 힘차게 휘날리던 빨간 스카프가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등사기를 짊어진 남자는 바로 유혁운이었다.
그때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지만, 최후의 시기가 지나고 절망에 빠져 새롭게 주어진 삶 앞에서 방황하던 시절에 다시 만나 동지로 연인으로 부부로 살아갈 바로 그 유혁운이었다.
"선생님!"
그녀는 말없이 버선을 내밀었다. 노 동무는 그녀가 내미는 버선을 받아들고 싱긋이 웃었다.
"고맙소. 잘 신겠소. 그런데 내가 버선이 없는 줄을 어떻게 알았소?"
그 뒤로 몇 번 구례군당에 들른 노 동무는 그녀를 보면 다가와 아이를 얼러보기도 하고 안아주기도 하면서 그녀를 격려하곤 했다. 이 노 동무가 바로 그 유명한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이었다. 그녀는 얼마 후 남부군으로 소환되어 이현상의 측근에서 일하게 된다.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서는 자기들에게 반대하는 모든 사람을, 심지어는 핏덩어리 아이까지도 무참히 짓밟는 것, 그게 바로 적들의 본질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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