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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흠무가 즉위한 뒤 발해는 무왕 시기의 공세 국가에서 문왕 시기의 수성 국가로 넘어가는 길목에 들어선다. 그러나 그 출발은 결코 평온하지 않다. 흑수말갈이 다시 세력을 떨치며 북방을 위협하자 대흠무는 양소화를 북정군 통수로 내세워 이를 막으려 한다. 양소화는 초반에는 기세를 잡지만 요충지 자림성을 오소걸몽에게 빼앗기고, 이를 만회하려 무리하게 공격하다 큰 피해를 입는다. 이때 대흠무에게 정혼자를 빼앗기고 태백산에 물러나 있던 장문휴가 민병 5천을 이끌고 돌아와 전세를 뒤집는다. 장문휴는 자림성을 수복하고 오소걸몽을 추격해 끝내 제거하지만, 승세를 멈추지 않고 적진 깊숙이 들어갔다가 독화살을 맞고 전사한다. 장문휴의 죽음은 나라를 구한 충신의 승리이자, 황권이 끝내 감당하지 못한 비극으로 남는다.

이후 대흠무는 장문휴의 죽음을 영가혼례로 예우하고, 양소화를 다시 불러들여 감찰과 정치를 맡긴다. 양소화는 서북압록부 감찰어사로 나가 도독 공심지의 악행을 밝혀내고, 결국 그를 선참후결로 처단한다. 공심지가 황비 공사량의 오라비였음에도 대흠무가 양소화를 벌하지 않고 오히려 대신으로 중용한 것은 문왕 치세가 혈연보다 체제 정비와 실무 능력을 앞세우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대흠무는 기존 수도가 남쪽에 치우쳤다고 판단해 흘한해 일대를 순행하고, 국토 중심에 가까운 상경용천부 건설과 천도를 구상한다. 이는 발해가 더 넓어진 강역을 안정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장기적 재편의 출발점이 된다.

이와 함께 대흠무는 무명선사에게 천축으로 가 진신사리를 구해 오게 하여 왕권의 종교적 권위까지 다지려 한다. 무명선사는 돈황, 옥문관, 총령과 탄구령을 넘어 천축으로 향하는 극한의 순례길에 오르고, 그 과정에서 혜초와 고선지를 만나 도움을 받는다. 결국 진신사리를 무사히 가져와 바침으로써 문왕의 통치는 군사와 행정만이 아니라 불교의 상징과 성덕의 언어로까지 확장된다. 그러나 왕실 내부의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대문예의 아들 대청천은 당과 연결되어 대흠무 암살을 시도하고, 이는 대조영의 두 아들 가운데 한 계통은 황통으로 이어지고 다른 한 계통은 대를 이어 반란으로 흐르는 비극을 드러낸다. 동시에 당에서는 현종의 궁정 문란과 안녹산의 비대화가 심화되고, 발해 여인 이합비의 공작까지 겹치면서 안녹산의 난이 현실화된다. 결국 6권은 문왕 대흠무가 북방의 위협, 충신의 희생, 체제 정비, 천도 구상, 불교 권위 확보, 그리고 대당 질서의 붕괴 조짐 속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 6권의 내용이다.

무혜비가 태자 이영과 황자 이요, 이거에게 사람을 보내 궁중에 적란이 일어났으니 급히 구원해 달라고 청했다 하옵니다.무혜비의음모를 알 리 없는 태자가 두 황자와 함께 군사를 모아 궁중으로 달려가자무혜비가 다급히 황제에게 고하기를 태자와 두 황자가모반을 꾀해 군사를 일으켰다고 하옵니다. 환관을 내보내 확인해 보니사실이어서 재상 이림보와 상의 끝에 태자를 폐출하는 칙지를내렸다 하옵니다.
호색의 당제 이융기는 무려 서른 명의황자와 스물아홉 명의 공주를 두었다
당나라의 후궁 제도는 수나라의 제도를 본떠 황후 이외에 귀비, 숙비, 덕비, 현비를 둘 수있고, 소의, 소용, 소원을 비롯한 아홉명의빈을 두었으며, 첩여, 미인, 재인을 각각 아홉 명씩 두었다. 그 아래 보림, 어녀, 채녀가 각각 스물일곱이나 되어 후궁 숫자만121명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통칭 3천 궁녀라고 불리는 궁녀들이 궁궐을 가득 메웠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태자를 포함하여친아들 셋을죽였으니 어찌 참화가 아니겠는가.
이듬해인 무인(738)년 6월에 충왕 이형이 태자로 책봉되었다. 당나라에서는 뒤늦게 대흠무의 등극에 경하 사절로단수간을파견하여 금은옥향과 비단과 명마를 바쳤다. 대흠무는 답례로 담비가죽과 약재, 마른 문어와 포를 보내며 한서, 삼국지,진서,
십육국춘추, 당례의 필사를 요구했다.대흠무는 묵은 원한을 딛고 일어서 당나라와 당당하게 겨루기 위해 그들의 학문과문물을배우고 익혀 맞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유학생을 파견하여 당나라 문물도 배워오게 할 작정이었다.
대흠무가 당나라 문물에 관심을 쏟기 시작한 것은 정묘(727)년, 신라 승려 혜초가천축(인도)의 성적을 순례하고 왕오천축국전 세권을 지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였다.혜초는 남해에서 바다로 천축에 이르러동, 중, 남, 서, 북의 다섯 천축을 두루 돌아부처의 성적을찾아 참배하고 마지막에 총령을 넘어 10년 만에 당나라로 돌아왔다고한다.
개국 황제 대조영이 부처의 나라 천축에가서 진신사리를 구해, 탑을 쌓고 나라의 안녕과 태평성대를 축원하라는 유지를 남겼지만,
아직 그 유지를 받들지 못했다. 돌궐과 거란의 와해로 당나라와 발해 지경에서 완충 역할을 하던 세력이 사라졌기에, 발해는 당나라와직접 부딪쳐야 했다.
신이 알기로는 보통 두 가지 방법이 있나이다. 하나는 아편으로 마취한 후 대나무집게로 고정시켜 예리한 칼로 고환을 빼내거나,
옥경을 절단한 부위에 식물에서 짠기름을 뜨겁게 하여 붓고 기름 적신 천으로환부를 압박하는 방법이나이다. 다른 하나는 뜨거운호초탕(후추나무의 열매로 만든 탕)으로 마취하여 절단한 뒤 백납의 심지를요도에 삽입하고, 냉수에 적신 한지로 환부를 압박하는방법이나이다.
"경들의 뜻이 갸륵하여 내시를 두기로했노라. 다만 궁중에 항시 기거해야 하는내시는 충절이 깊고 총명하며 신뢰할 수 있어야 하니,
경들의 아들 중에 가려 뽑을 것이로다. 스스로 기꺼이 천거하라. "황제의 옥음이 이러하자 편전은 삽시에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일부 대신들의얼굴은 흙빛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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