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이 알기로 권신들이나 변방의 성주와장수들이 사사로이 죄인을 궁형에 처한다고 들었도다. 이는 당나라의 못된 제도를본뜬 것이요, 국법을 어긴 것이니 마땅히문죄하겠노라."
추상 같은 옥음은 곧장 변방의 뇌옥에까지 전달되었다. 이로써 죄인을 궁형으로 다루던 관습이 일거에 사라지게 되었다.
북정군 본진을 영자성에 설치한 양소화는 동쪽으로 군진을 넓혀 월희 말갈의 동태를 파악했다. 흑수와 인접해 있으면서 흑수의 완력에 복종하거나 눈치를 보는 부족이었다. 월희 쪽을 주시한 것은 월희를 먼저장악하여 흑수를 고립시켜야 하기 때문이었다. 동양 대해를 정복한 장문휴가 어느정도 토평했지만 완전히 굴복시키지는 못했는데 그가 사직하고 떠난 뒤에는 흑수의조종을 받았다.
"적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게 해서는 안된다. 명심하라!"양소화는 진병하는 순간에도 결코 적이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라는 장령을잊지 않았다.
남흑수의 맹장 오소걸몽은 발해의 북정군 통수가 여장군이라는 데 놀라움과 함께승리를 자축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북흑수의 수령낙길몽과 연합하여 발해를 치기로하고 월희부의 발문계와 발기계 형제에게선봉에 서서 발해군을 유인하게 했다.
오소걸몽이 발해 군사가 강병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대일하가 영자성을 지키고 있을 때만 해도 감히 발해 지경을 넘볼 생각조차못했다. 그러나 황제가 바뀌고 여장군이 북정군 통수가 되었다니 흑수의 존재를 부각시킬 호기라 여겼다. 발해를무찌르기만 하면당나라의 지원을 받을 수있고 발해의 집요한 공격도 피할 수 있을것이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은 잠깐이었다. 영자성으로부터 생각지 못한 흉보가날아들었다. 영자성 북동방의 전진기지인자림성이 흑수의침공을 받아 함락됐다는급보였다. 군사를 보호하기 위해 적을 유린하느라 여러 날 지체한 사이에 흑수군이 발해의 요충지인 자림성을침공한 것이다."아! 내가 어리석었도다."
영자성의 방어벽이자 흑수를 경략하는 제일 요충지가 오소걸몽의 수중에떨어졌기에 앞으로 적잖은 희생을 각오해야 했다. 자림성수성장 방철은 끝내 순절했고 포로가 된 군사만도 5백 명이 넘었다.
"대장군께서는 여자니까 행여라도 전공을 크게 세워야 한다고 고심하십니까? 대화인 장군께서는 적을 물리침에 힘보다는지혜를빌렸다고 들었습니다." 심복 장수 왕치장이 끝내 듣기 거북한소리를 했다.
태백산 일대의 사냥꾼과, 화전을 일구며칩거해 있던 현사들이 장문휴를 따르기로한 것은 법연스님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3백 명밖에안 되었지만 날이 갈수록 수효가불어나 북쪽으로 진병할 때는 1천여 명이나 되었다. 넉넉하지 못한 대로 군자금도충당되었고 군마와군막, 병장기와 수레도
모양새를 갖추었다. 발해의 제일 맹장이요보국대장군이었던 장문휴는 1천여 기밖에안 되는 민병으로 소소한 말갈 부족을 차례차례•굴복시키며 북진했다.
"우리가 쳐부숴야 할 적은 흑수가 아니냐. 흑수와 가장 가까운 부족이 월희와철리와 불열이 아니겠느냐. 그들을 앞세우면 흑수를가볍게 공략할 수 있을 것이다."장문휴가 발해인보다 말갈인들을 선호하고 중용하는 까닭을 알게 된 양두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쯤 양소화가 얼마나 노심초사하고있을까 걱정했다. 발해 역사상 두 번째 여자 대장군이지만 북정군 통수가 된 것은 정말 대단한일이었다. 임무를 완수하면 응당황성으로 올라가 중신의 반열에 오르게 될것이다. 그런 막중한 임무를 띠고 북방으로와서 요충지를적에게 내주었다니 지금쯤마음의 고통이 크리라고 생각했다.
"아, 속았구나!"
낙수몽은 말달리기 어려운 험로에 들어선데다 수효를 짐작할 수 없는 복병을 만났고, 뒤에는 추격병이 무서운 기세로 덤벼드는 걸 보고 맥이 풀렸다. 군사들은 제멋대로 도망치느라 경황이 없었다.
"혈로를 뚫어라!"
혈로를 뚫기 위해 장검을 들고 앞장선 낙수몽은 산자락에 우뚝 선 장수를 보았다.
"발해 대장군 장문휴가 낙수몽의 목을가지러 왔다. 항복하면 살려주겠지만 거역하면 몰살하겠다!"
쩌렁쩌렁 울리는 저 우렁찬 목소리, 발해제일 명장이요 당나라를 놀라게 한 그의 용맹은 신화처럼 떠돌았다. 동양 대해를 평정하고 말갈 제부를 속복케 한 대장군이 아니던가. 보국대장군이 전장에 나섰으면 적어도 수만 군사가 따르고 있을 것이다.
적장이 장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낙수몽도 장창을 꼬나잡고 말을 달렸다. 낙수몽이 뒹굴었다. 장문휴의 칼날에는 무서운 힘이 실렸다. 칼자루를 잡은 손이 얼얼할 만큼 상대의 장력이 느껴졌다.
낙수몽은 항복을 선언하고 군사들에게도 도망가지 말고 병장기를 버리라고 소리쳤다.
"나라의 근간을 바로잡고 태평성대를 구가하려면 무릇 밖으로는 변방이 조용해야하고, 안으로는 충절이 가득해야 합니다.당나라가 두려워하는 대장군께서 군권을쥐고 천하를 호령해야 나라의 안녕을 도모합니다. 저를 믿고 기다려 주십시오."
젊은 시절, 그들은 서로 좋아하면서도 황자대문예 때문에 결합할 수 없었다. 그 시절이 지나자 양소화는 장문휴를 오라버니 대하듯 했고, 장문휴 역시 누이 대하듯 정을나누었다.
"하룻밤만이라도 제 가슴 속에 살아 있는 연정을 달래 주십시오."
장문휴는 그제야 양소화가 못 마시는 술을 부러 마셨다는 걸 알았다. 그녀도 이제서른 중반의 여인이었다. 장문휴는 말없이양소화를 끌어안았다. 건장한 사내의 품에안긴 여인은 기다림에 매여온 지난 세월이서러운지 나지막이 흐느꼈다. 장문휴는 그런 양소화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대문예가아니었던들 두 사람은 혼례를 치르고 자식도 낳았을 것이다.
"폐하, 세상에 널리 알려진 대로 장문휴는 천하 명장이옵니다. 장문휴가 군권을 다지면 밖으로는 당나라를 견제하고 번족들의 경거망동을 막으며, 안으로는 충직한 장수를 널리 중용하는 성덕이 되옵니다. 지난날 성무고황제께서는 장군기만 휘날려도당나라 군사들이 지레 겁을 먹었사옵니다.사해를 다스리기 위해서 장문휴가 폐하의곁을 지켜야 하옵니다."
대신 미발계는 오히려 장문휴를 중용하라고 간했다.
"장문휴의 선대를 살펴보아도 충직하지않은 자가 없었나이다. 부친 장사무는 선제를 모시고 비사성을 빼앗고 장렬히 전사했으며, 조부 장작명은 반당투쟁으로 목숨을버린 충신이었나이다. 장문휴의 피 속에는반심이 있을 수 없으니 장문휴을 곁에 두옵소서."
태사 신승도 미발계와 같은 뜻을 피력했다.
"황명의 지엄함을 어찌 모르십니까?"
양소화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장문휴를전장에 내보내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이번전투가 그에게는 마지막 교전이 될지도 모른다. 도성으로 올라가 군권을 쥐게 되면다시는 일선에서 직접 칼을 휘두르지 않을것이다. 그렇기에 온몸을 던져서라도 흑수를 물리치고 오소걸몽을 사로잡으려는 것같았다.
적장을 사로잡은 장문휴는 추격을 늦추지 않았다. 오소걸몽의 본진을 섬멸하는 것은 오소걸몽을 사로잡는 것만큼 긴요했다.
양소화가 비보를 접한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아, 하늘이시여! 아니 됩니다. 아니 됩니다."
양소화의 울부짖음이 너무 처절해 보는이도 눈물을 쏟게 했다. 당나라를 놀라게했던 일세의 영웅 장문휴가 적이 쏜 독화살에 쓰러졌으니 하늘이 무심했다. 비로소 대수령을 사로잡아 남흑수를 토평했거늘 어찌하여 일세의 영웅을 거두어가는가. 부친장사무가 장렬히 전사하며 비사성을 되찾아 발해 품에 안겨주었듯이, 유복자로 태어나 불굴의 의지로 무시에 장원급제하고 수군을 길러 당나라를 거침없이 침공한 대장군은 독화살을 뽑지 못한 채 한세상을 마감했다.
"나라의 봉공을 받는 대장군은 법도를지켜야 하고 황상의 심기를 거슬러서는 아니 됩니다. 군국대사라면 바른 진언과 간쟁을 할 수 있지만, 이것은 정녕 사사로운 것입니다."
"황제는 사사로이 남의 여인을 취해도그만이고 대장군은 법도를 따라야 하느냐?법도란 물이 흐르는 것과 같아야 한다."
신달미는 양소화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표문을 어람한 대흠무는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양소화의 청을 받아들였다.
"양소화의 표문은 방자할 정도로 당돌하지만 밉지 않은 수작이로다. 술관 선수종은태사와 의논하여 영가혼례를 주선하라."
예상치 못한 대흠무의 찬찬한 배려에 모두 놀랐다. 지나간 일이지만 비빈 공사량과장문휴와의 인연도 그렇고, 양소화의 표문이 법도에 없는 간청이었음에도 황제가 친히 영가혼례를 주선하는 걸 보고 모두마음을 쓸어내렸다. 누가 보아도 도량이 넓은황제임에 틀림없었다.
대흠무는 국기를 바로세우고 부국강병을 꾀하기 위해 관제를 정비하고, 드넓은강역을 다스리기 위해 5경과 부, 주, 현을정비하기로 했다. 이는 당나라와 맞설 수있을 만큼의 치세를 굳건히 하기 위한 수순이었다.
황제를 보필하는 최고의 통치기관으로정당성을 두고, 그 아래에 선조성과 중대성을 두었다. 그 밑으로는 좌육사인 충부,인부, 의부와, 우육사인 지부, 예부, 신부를두어 당나라 관제와 겨루어도 모자람이 없었다.
3성 6부 외에도 1대, 9시, 1원, 1감, 1국을 두어 문관의 작제를 보강했다. 무관 작제도 과거보다 2위를 늘려 좌맹분위, 우맹분위, 좌웅위, 우웅위, 좌비위, 우비위, 남좌위, 남우위, 북좌위, 북우위, 10위를 두었다.
각 위에는 대장군, 장군, 도장, 낭장이 있어 군사들을 통솔했다.
고구려 때보다 강역이 넓어졌고 호구도많이 늘어난 터라 대흠무는 치세를 원활히하기 위해 다섯 개의 도읍지를 두었다. 5경은 숙신 땅의 상경 용천부와 조선 땅이자지금의 도성인 중경 현덕부, 예맥족이 살던곳으로 바닷가와 가까워 일본 가는 길로 통하는 동경 용원부, 옛 옥저 땅으로 신라 가는 통로인 남경 남해부, 고구려 때 국내성이 있던 곳으로 당나라 가는 통로인 서경압록부였다.
한편 대흠무는 태백산에서 발원하여 서쪽 바다로 흐르는 마자수를 압록수로, 동쪽바다로 흐르는 통문하를 두만하로 고쳐 부르게 했다.
대흠무가 크게 흥한다는 뜻으로 대흥이라 연호를 정한 것도 다 까닭이 있었다. 당나라를 경계하고 신라가 발호하지 못하게하기 위해서는 당나라와 화의하고 일본과화친해야 했다.
예인 이구년을 불러 가무를 즐기던 이융기는 문득 구룡전 연못에 비친 여인의 치맛자락을 보고 환관 고력사에게 풍류를 아는여인인 듯하니 데려오라 일렀다. 여인은 태자위에 오를 뻔했던 수왕 이모의 비인 양옥환이었다. 예전에 수왕과 같이 알현하던 자리에서도 잠시 느꼈지만 과연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천하절색이었다. 스물두 살의 여인을 반갑게 맞은 황제의 나이는 쉰여섯이었다
사사로이는 며느리요, 맺어져서는 아니 될 여인에게 한눈에 반해버렸으니, 이비극 서린 만남이 훗날 경국지색의 참화가될 줄 누가 알았으랴. 옛날 한나라의 성제가 조비연에게 빠지고, 은나라 주왕이 달기에게 빠져 나라가 기울었던 걸 외로운 황제가 어찌 기억했겠는가.
양옥환은 남방의 촉 태생으로 촉주사호양현염의 딸인데, 아버지가 일찍 죽어 숙부인 양현교 밑에서 자랐다. 풍만한 몸집이어디 한군데 빠진 데 없이 고르게 균형이잡혔으며 오관이 바르게 놓였고, 크고 해맑은 눈이 보석처럼 빛나는 여인이었다. 입술은 단물이라도 흐를 듯 촉촉이 젖어 미소가잔잔히 묻어나며, 희고 고른 치아가 유난히돋보였다. 살결은 희다 못해 푸른빛이 날정도여서, 마치 막 잠을 잔 누에가 고치를지을 때처럼 핏줄마저 투명했다. 엷고 붉은연지와 풀어놓은 머리채가 탐스러웠고 사향각시를 품었는지 향긋한 향내가 풍겼다.
"천하절색이 아니더냐?"
영남도호부가 있는 광주(광동성)는 도성에서 남쪽으로 수만 리 떨어져 있어 오가는데 오랜 시일이 걸렸다. 다행히 수왕 이모는 싫어하는 내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황제의 신임을 얻어 대임을 잘 마무리하면 태자위에 오를 수 있다 생각했다.
그것이 천하 대란의 시발이 될 줄 누가알았으랴.
여인은 금세 새로운 요지경에 빠진 듯신음소리로 사내의 애욕에 불을 지폈다. 입술과 혀끝으로 이융기의 몸을 핥아 자지러지게 만들었다. 천하의 음탕이 무슨 수로양태진의 육신에 스며들었는지 모르지만 황제의 늙은 몸을 펄펄 살아 움직이게 했다. 황제는 중원을 호령했지만 양태진은 그런황제를 옥문과 혀와 입술, 눈웃음과 자지러지는 신음, 금방 숨이 넘어갈 듯한 교태와온몸을 불사르는 열정으로 휘어잡았다.
그 무렵 동방의 전략기지 유주에서는 야심가인 안녹산이 평로병마사가 되어 동방의 맹주 발해를 노려보고 있었다.
발해를 둘러싸고 있는 당, 거란, 흑수, 신라와 항시 부딪혔다. 국운을 건 대전이 언제 벌어질지 모른다. 그러니 부지런히 군마를 늘려야 했다. 말을 강건하게 조련시켜전장에 나서면 당연히 승산이 높아질 것이다. 대흠무는 친히 봉희대까지 달려가 군사들을 독려하고 군마와 비둘기들을 살폈다.
"폐하, 때로는 바다 속 암초같이 모습을감추었다가 큰 파도 칠 때 모습을 드러내고, 때로는 바람 앞의 버드나무처럼 세상과같이 흔들리며, 때로는 돌밭을 경작하는 소처럼 우직하게 밀어붙이고, 때로는 진흙 밭에서 싸우는 개처럼 악착같이 적을 이겨야하며, 때로는 큰 바위 밑에 오래 된 불상처럼 꿈쩍하지 않으셔야 하옵니다."
사방에서 상주문과 표문이 올라오면 반드시 고력사가 먼저 본 뒤에 황제에게 올렸고, 고구려 후손으로 황제의 권위에 도전했던 왕모중을 제거한 실력자였다. 간사한재상 이림보조차 고력사를 두려워했으니고력사의 위세는 나는 화살도 멈추게 할 정도였다.
"그대는 발해 황제가 되고 싶지 않은가?"
당나라는 5년간이나 끌어오던 안서 땅을평정하고 이제 동쪽으로 눈을 돌렸다.
북방의 대초원을 지배하던 서돌궐의 한부족 돌기시 가한 궐특근이 사망하자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소록이란 걸출한 인물이등장했다. 소록은 백성들을 따뜻하게 보살피며 근면하고 검약하여 존경받았다. 전쟁에서 획득한 재화를 모두 부하에게 나누어주었으니 소문이 근동으로 퍼져 나가 여러부족이 충성을 바쳤다. 하지만 5년 동안이나 당나라와 맞서 싸우면서 많이 쇠락해졌다.
"전하, 거대한 동쪽의 용 한 마리를 낚아채는 데 울안에 기르는 어여쁜 고기 한 마리쯤 낚시에 걸어두는 게 천하 장부의 묘책임을 아십니까?"
그곳에는 과부나 이혼녀, 기녀로 입적하지는 않았지만 자유분방하게 즐기려는 처자들과 서방 몰래 정념을 풀려는 여인들까지 이른바 여자도사라는 이름으로 거룩한채 좌정하고 있었다. 여도사들의 기묘한 음행을 묵인하며 짭짤하게 이득을 챙기는 도관 중에 함의관은 제일 소문난 곳이었다.
격노한 신하들은 끝까지 추격해 대청천을 사로잡아 능지처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신 명림무흥은 대청천을 주살하여국기를 바로세우기를 강력히 주청했다.
"폐하, 공이 있는 자에게는 상을 내리는것이 좋은 규범이고, 죄가 있는 자는 주형하는 것이 선제의 영전이옵니다. 기릉과 무염이 극에 달해 흉사한 자를 잡아들이고,난역에 가담한 무리들을 징치하는 것은 천하의 도리이옵니다. 다행히 천지의 살핌과종묘 신령의 힘을 입어 옥체를 보전하실 수있었으나, 효경(어미를 잡아먹는 새와 아비를 잡아먹는 짐승)과 같은 흉측한 자들을 결코살려두어서는 아니 되옵니다."
닷새 만에 안녹산은 또 다시 이징관의 집을 찾았다. 별채에 마련한 술상 앞에서 안녹산은 이합비의 손을 덥석 잡았다.
"네 소원을 들어 주기로 했다."
이합비가 곱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소녀의 꿈은 드넓은 황궁에서 3천 궁녀, 3천 내시와 뭇 신하들이 머리를 조아리게하는 것입니다. 온 천하를 둘러보아도 천번지복하여 황룡 위에 앉을 분은 절도사 어른밖에 없습니다. 제 한목숨 언제든지 바칠수 있으니 기꺼이 밟고 용상에 오르셔야 합니다."
"발해의 운명을 네 마음과 몸으로 짊어진 것이니 어떤 신고가 따르더라도 이겨내거라. 목숨 바칠 일이면 기꺼이 바치고 몸바칠 일이면 아끼지 마라. 이합비의 충절은사관의 일필로 후세에 기록될 것이다."
난삼의 말을 가슴에 새기며 이합비는 안녹산의 마음과 몸을 사로잡기 위해 비법을배우고 익혔던 것이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연모하는 정인을 두고 당나라 땅에서 초개와 같이 목숨을 버리게 될 것을.
위기의 순간에 양소화를 구한 것은 놀랍게도 금군장수 임도빈이었다. 양소화가 어사를 제수받고 도성을 떠날 때부터 은밀히그녀를 뒤따르며 지키라 명한 것은 태부 신석정이었다. 양소화는 얼른 말에서 내려 동쪽을 향해 세 번 절을 올렸다.
그 순간 소리를 지른 것은 뜻밖에도 서경압록부의 운휘장군 검두삭이었다. 백전노장이지만 자원하여 변방 장수로 나가 젊은 장수들에게 규범을 보여주던 덕장이었다. 비록 공심지의 아랫자리에 있지만 청렴하고 결백하여 군사들이 어버이 섬기듯했다. 군사들이 머뭇거리자 검두삭은 또 한번 소리 질렀다.
"이 칙서는 가짜다. 죄상이 드러날까 두려워한 공심지가 꾸며 만든 것이다. 알겠느냐? 모두 무기를 내려놓아라!"
"탐관오리는 백번 죽어 마땅하옵니다.기군망상의 죄상은 반드시 참해야 국기가바로 서며 척신 공심지의 죄상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많고 크나이다. 지금양소화를 징치하면 반드시 어질지 못한 무리들이 음흉한 간계로 날뛸 것이옵니다. 멀리 보신다면 오히려 양소화에게 후한 상을내리심이 마땅하옵니다. 그러하면 척신과근신은 물론이고 탐관오리들이 사라질 것이옵니다."
자고로 충성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애국은 맹세를 저버리지 않는 법이로다. 근자에서경압록부 도독 공심지가 간악하고 요사스런 꾐에 빠져 국고금을 훔쳐 사욕을 채우고,백성들의 골육을 짜낸 뇌물로 사방을 어지럽혔으며, 국법을 어기고 기군망상하여 그 폐해가 극심했더라.
또한 공공연히 인륜을 어기고 무수한 여인들을 농락하며 음란을 자행했고, 국법으로 금지한 사형을 자행하매 죄 없는 남자들을 강제로 고자로 만드는 만행을 저질렀도다. 범법이있는 곳에 악이 따르고, 악이 있는 곳에 벌이따르게 마련이라. 짐은 양소화를 어사로 삼아국기를 엄히 다루게 했으며, 죄를 다스리매먼저 행하고 후에 장계하라 명했도다. 이에 어사 양소화가 위급한 지경에 공심지를 참한 것은 짐의 명을 따르고 법을 지켰으며 예를 벗어나지 않았다. 어찌 자식의 잘못이 부모의 죄가 되겠느냐만, 사공 공진방은자식의 죄를 감추고 짐을 속였으니 멀리 안변부로 귀양 보내 지은 죄를 씻게 하겠노라. 이에 짐은 조서를 내리니 진신들은 함부로공론하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