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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정 서재

바람이 너무 냉랭했다. 코끝이 찡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햇살 속에 봄이 들어 있다고 했다.
딸은 바람 속에 봄이 들어 있다고 했다.
그러자 아내는 봄바람은 처녀 죽은 귀신이라고 했다. 그래서 봄바람은 뼛속까지 사무친다고 했다.- P26
삽질하고 있을 때, 지나가던 동네 어른들이 "어허! 어깨에너무 힘 들어갔다"고 했다. 예술은 힘 들어가면 힘 못 쓴다.
어깨에 힘 들어가면 자기 작품을 자기가 해석하거나 설명한다. 궁색해진다. 작품은 말이 없다.- P29
봄에는 저렇게 산에 강에 바람이 불어야 한다. 그래야 강물도크게 출렁이며 숨을 내쉬고, 산소를 보듬고 흐른다. 산도 몸을흔들어 탁한 숨을 쏟아 낸다. 바람은 바람을 털어 낸다.
나에게도 바람이 온다.
나는 내게 오는 봄바람을 피하지 않는다.- P30
아내의 잠
봄비 그친 날, 우리 집 장 담그는 날. 장 담그는 일의 순서와차례는 아내의 머릿속에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설계되고 준비되어 있다. 딸하고 내가 아내의 손발이 되어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일을 도왔다. 장을 담그는 차례 속에 우리의 활동은 아름다운율동이었다.- P35
장을 다 담았다. 아내는 자기 혼자 이 일을 하면 하루가 걸린다고 했다.- P35
이따금 밀려 쌓인 고단을 털기 위해 아내는 깊고 먼 잠을 잔다. 그렇게 고단을 모아 지운다.- P35
정돈이 자연이다. 정돈은 실상이다. 정돈은 질서다.
그것은 수긍과 긍정으로 세상과 나를 연결하는 고요다. 아름다운 운동이다.
나의 하루를 시작한다.- P43
구례 남원 순창 지났습니다. 모두 사람 살기 좋은 고을들입니다. 해와 달이 오래 머물다 가며 하루를 다 못본듯, 뒤돌아보게 하는 땅입니다.- P47
우리나라 국토지리에서 그이들끼리 잘 살 것 같은 고을. 우리가 안 찾아가도 쌀쌀한 이른 봄, 홍매가 교정에 피어날테니까요.- P48
길은 아스팔트 길이랍니다. 아직 차는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작은 막대기로 민달팽이 가운데 몸을 살짝 들어 올렸습니다. 사람 맨손보다 나무 막대기가 달팽이 몸에 익숙할 테니까요. 나는 그렇게 생각했답니다. 민달팽이가 가려는 곳이 어디인지 모르지만, 길 건너까지 가만가만 걸어가서 키 낮은 풀잎위에 살며시 내려놓았습니다. - P49
달팽이를 들고 가면서,
"너 길 잘못 들었다."
내가 그렇게 말했답니다.- P49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또 나를 잊었다.- P53
이발하고 강천산으로 물 받으러 갔다. 몸에 좋다는 이 물을받아다가 먹은지 이 년쯤 되었다. 이 물을 마시고 건강해지거나 오래 살 생각은 없다. 물이 맛나서, 아내는 고추장 담그고나는 봄여름에 찬물로 마신다.- P54
묘목을 심고 나서 삼 년 정도가 지나면 나무의 첫 과일이 열립니다. 대개 첫 과일은 나무의 장기적인 성장을 생각해서 열매를 따 준다고 합니다. 그래야 나무가 튼튼하게 자란다고들하지요.- P60
나는 열매를 들여다보며 딸까 말까 망설이다가 어린 살구가 아까워서, 에이 자기가 알아서 열렸으니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하며 그냥 두었습니다. 자기 일을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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