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고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형식면에서 우리 판단력에 대해서는 반-목적적이고, 우리의 현시능력에 대해서는 부적합하며, 상상력에 대해서는 폭력적이다.
- 『판단력비판』 §23
칸트는 문화적 존재자로서의 인간을 창조의 최종 목적으로, 도덕적 존재자로서의 인간을 창조의 궁극 목적으로 정의한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은 그를 통해 자연 저편에 문화의 세계를 건설하고 마침내 이상적인 윤리의 세계를 수립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문화적 인간은 특정 목적을 계획하고 그것에 적합한 수단을 찾아 실현한다. 반면 도덕적 인간은 모든 목적-수단 관계를 벗어난, 그래서 어떠한 다른 목적에 의해서도 제약되지 않는 법칙을 제정한다. 도덕적 인간이 창조의 궁극 목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취미를 정초하기 위한 참된 예비학은 윤리적 이념들의 발달과 도덕 감정의 교화에 있다.
- 『판단력비판』 §60
칸트는 첫 번째 비판서인 『순수이성비판』에서 이론철학을 신학에서 해방하면서 위대한 역사적 전환을 가져왔다. 그러나 두 번째 비판서인 『실천이성비판』과 세 번째 비판서인 『판단력비판』에서는 신학이 다시 살아나 때로는 실천철학에, 때로는 예술철학에, 그리고 마침내는 이론철학에까지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신학은 더 이상 근대 학문 위에 군림하는 신학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근대 학문에 맞추어 개조된 신학에 불과하다.
신학은 문화의 중심에 있는 학문이 아니라 그 주변부로 밀려난 학문, 근대의 문화적 조건 속에서 실체를 잃어버린 학문일 뿐이다. 이제 신학은 이 세상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반성적 주체의 자기 정향 속에 유령처럼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 그림자는 근대 과학에 의해 사막화된 자연에 오아시스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칸트는 인간 문화 전체의 기원을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만의 고유한 자질에서 찾았다. 그 자질은 다름 아닌 계획 능력에 있다. 자연에 의해 저절로 이루어질 수 없는 목적을 설정하는 것, 목적 실현을 위한 적합한 수단을 찾고 단계적 절차를 설계하는 것, 절차에 따라 실행하는 것, 이런 것들이 모든 문화적 성취의 배후에 있는 활동이다.
구제해야 할 것은 자연이라기보다 인간이다. 파스칼이 사막화된 자연 앞에서 느낀 공포는 허무주의의 위험성에서 온다. 맹목적인 물리법칙이 몰고 오는 허무주의에서부터 인간을 구제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칸트가 목적론적 판단의 필요성을 정당화하고 이를 위해 신학을 되살리는 마지막 이유일 것이다.
칸트의 『영구 평화를 위하여』(1795)는 이런 역사 진보의 마지막 단계로서 세계적 단위의 영구 평화를 달성하기 위한 조건을 논하고 있다. 그 조건은 국제법을 제정하고 세계 법정을 수립하는 데 있다.
단일한 세계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평화로운 국제 질서를 위해서는 국가 간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세계 법정을 설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오늘날 UN의 실질적인 모태가 되었다. 칸트의 『판단력비판』 후반부는 이런 역사의 합목적성과 그 원리들을 체계적으로 정당화하는 위치에 있다.
우리는 인공지능의 자기에 맞설 수 있는 사유 및 자유의 형식을 발견해야 하는 과제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과제에 부딪혀 우리에게 가장 커다란 용기와 지침을 주는 철학자가 있다면, 그가 바로 새로운 마음의 모델을 제시한 칸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