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의 주관적 조건은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에 있다. 존경이라는 주관적 조건을 결여한 채 도덕법칙과 일치하는 행위가 있을 수 있지만, 그렇게 객관적 조건만 만족시키는 행위는 아직 도덕적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합법적 행위에 불과하다.
도덕성과 합법성의 구분은 칸트 윤리학의 주요 특징이 드러나는 결정적인 대목이다. 칸트 윤리학이 의무의 윤리학이라 불리는 것도 도덕성과 합법성의 구분을 배경으로 한다.
도덕법칙과 일치하는 행위는 외견상 의무와 구별할 수 없는 행위를 말한다. 이런 유사성은 결과에 있다. 결과에 있어 어떤 행위는 의무와 동일할 수 있으나 아직 도덕적 행위라 불릴 수 없다. 그 동기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도덕법칙에 따른 행위는 그 동기가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에 있는 행위를 말한다. 칸트는 존경이라는 동기에서 나온 행위만을 도덕적 행위로 인정한다.
의무와 유사한 또 다른 용어는 책임이다. 책임에 해당하는 서양 말로는 ‘responsibility’도 있다. 이 경우 책임은 의무에 대한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부담을 가리킨다. 반면 ‘obligation’으로서의 책임은 의무에 대한 수동적이고 강제적인 부담을 의미한다.
별이 빛나는 하늘, 내 안의 도덕법칙
칸트가 1804년 80세의 나이로 인생을 마감했을 때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여 그의 위대한 삶을 기렸다. 그리고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새겨 넣었다.
내 위에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법칙
The starry heavens above me and the moral law within me.
그것에 대해 자주, 그리고 계속해서 숙고하면 할수록 점점 더 새롭고 점점 더 커다란 경탄과 외경으로 마음을 채우는 두 가지 것이 있다. 그것은 내 위에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법칙이다. (···) 전자[별이 빛나는 하늘]는 내가 외적 감성 세계 안에서 차지하는 자리에서 시작해서 내가 서 있는 그 연결점을 무한 광대하게 세계들 위의 세계로, 천체들 중의 천체들로, 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주기적인 운동의 한없는 시간 속에서 그 시작과 지속을 확장한다. 후자[내 안의 도덕법칙]는 나의 볼 수 없는 자아, 나의 인격성에서 시작해서 참된 무한성을 갖는, 그러나 지성에게만 알려지는 세계 속에 나를 표상한다. (···) 무수한 세계 집합의 첫 번째 광경은 동물적 피조물로서의 나의 중요성을 말살해버린다. 동물적 피조물은 질료를 짧은 시간 동안 생명력을 부여받은 후에 다시금 (우주 안의 한낱 점에 불과한) 유성에게 되돌려줄 수밖에 없다. 이에 반해 두 번째 광경은 예지자로서의 나의 가치를 나의 인격성을 통해 한없이 드높인다. 인격성에서 도덕법칙은 동물성으로부터, 나아가 전 감성 세계로부터 독립해 있는 생을 나에게 개시한다.
- 『실천이성비판』 맺음말 전집 5권 161~162쪽
이론은 진의 가치를, 실천은 선의 가치를, 예술은 미의 가치를 추구한다. 칸트의 3대 비판서는 각각 이론적 지식, 실천적 행위, 예술적 창조가 어떻게 서로 다른 가능 조건 위에 서 있는지 밝히고, 따라서 각각의 타당성 영역이 어떻게 다른지 입증했다.
칸트의 비판철학은 결국 마음을 해부하여 이론적, 실천적, 예술적 보편성이 어떻게 서로 다른 조건에 근거하며 따라서 어떻게 서로 다른 타당성 범위를 거느리는지를 보여주는 작업이다.
칸트는 『판단력비판』 전반부에서 숭고의 미학을 제시하며 조화의 논리에 갇혀 있던 과거의 예술철학을 비로소 전복한다. 칸트는 근대 미학의 문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탈근대 미학의 초석을 마련한다.
세 번째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칸트는 근대 미학의 출발점으로 간주된다. 심미적 체험의 독특한 특성을 포착하는 것은 물론, 심미적 판단1이 지닌 보편적 타당성을 정당화하는 길을 처음 열어놓았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런 두 가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반성적 판단’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였는데, 이것은 칸트가 철학사에서 일으킨 또 하나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 할 수 있다.
칸트는 이렇게 우연한 사실로부터 새로운 보편자로 나아가는 판단을 ‘반성적 판단reflexive judgement’이라 명명한다. 그리고 이것을 보편적 개념에서 출발하여 특수한 사실로 나아가는 ‘규정적 판단determining judgement’과 구별한다.
‘규정’과 ‘반성’을 말과 사물 사이의 관계를 중심으로 새롭게 정의해보자. 즉 규정이란 말에서 사물로 가는 판단이고, 반성이란 사물에서 말로 가는 판단이다. 아이가 말을 배우는 과정을 생각해보면 규정적 판단과 반성적 판단이 무엇인지 좀 더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천재성은 배우거나 가르칠 수가 없다. 따라서 과학에서는 천재가 있을 수 없다. 과학적 지식은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보편적으로 전달 가능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칸트는 셰익스피어와 더불어 천재의 사례로 꼽히던 뉴턴을 천재로 인정하지 않았다.
앙꼬 없는 찐빵은 찐빵이 아닌 것처럼, 감성적 이념이 빠진 작품은 작품이 아니다.
어떤 시는 정말로 산뜻하고 우아할 수 있으나 정신이 결여되어 있을 수 있다. 어떤 이야기는 정확하고 정연하나 정신이 결여되어 있다. 어떤 축하 연설은 철저하고 동시에 엄숙하지만 정신이 결여되어 있다. 회화會話도 즐거움은 없지 않지만 정신은 결여되어 있는 게 많다. 심지어 어떤 귀부인에 대해서도 그녀는 예쁘고 사근사근하고 얌전하지만 정신을 결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도대체 여기에서 정신이라는 말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정신이란 미학적 의미에서는 마음에 생기를 일으키는 원리를 말한다.
- 『판단력비판』 §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