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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정 서재

"궁색할 때는 홀로 자신을 돌보는 데 힘쓰고窮則獨善其身,일이 잘 풀릴때는 세상에 나가 좋은 일을 한다通則兼善天下."『맹자』의 가르침이다.
인생살이에는 궁과 통이 있게 마련이다. 궁만 있고 통이 없을 수없고, 통만 있고 궁이 없을 수 없다.
잘 풀릴 때는 그렇다 치더라도, 문제는 궁색할 때이다.
구석에 몰렸을 때 자기를 보존하고 자신을가다듬을 방법을 생각해두어야 한다. 좋은 방법의 하나가 산山과 사寺에 가는 것이다. 산에 가면 절이 있고, 절에 가면 산이 있다. 둘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우리 땅의 7할이 산이다. 국토의 7할이 산으로이뤄진 나라는 네팔이나 스위스 빼고는 별로 없는 것 같다. 그 7할도 아주 양질의 산이다. 한국의 산들은 해발 1천 미터 내외이다.
4~5천 미터가 되면 인간이 쉽게 접근할 수 없다. 동식물도 살기 어려운 죽은 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의 산들은 살아 있다.
내게 왜 산에 가느냐고 다시 묻는다면, 나는 ‘사람이 그리워서 간다‘고 대답한다. 산에는 사람이 있다. 산사람들이다. 산사람을 만나러 산에 간다. 시시해진 세상을 버리고 산에 들어온 사람, 세상에서버림받아 들어온 사람, 운명에 이끌려 자기도 모르게 들어온 사람………… 약초 캐는 사람, 백일기도하는 사람, 산을 좋아해 사업을 정리하고 자청해 들어온 사람, 도를 닦으려고 들어온 사람. 그렇게 산사람에겐 저마다의 사연을 지닌 채 산에 살면서 깨달은 나름의 소식들이 있게 마련이다. 나는 그 이야기들을 좋아한다.
산을 좋아하다보면 사찰을 좋아하게 된다. 절은 산에 있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한국의 절에는 산수가 있고 출가한 산사람이 있다.
선조의 문화와 사상이 있고, 깊고 너른 불교의 가르침이 있다. 초 단위로 빠르게 변하는 한국 사회이지만, 우리에겐 천 년 넘게 지속해온 문화유산이 있다. 바로 불교이다. 다른 것은 남아 있는 게 거의없다. 그 역사의 비바람 속에서도 아직 버티고 있는 게 산속의 사찰이다.
절은 번뇌를 없애기 위한 장소이다. 거기에는 불교 사상이 있다.
사찰과 종교적 영험을 분리할 수 없다. 한국의 절에는 영험이 서려있다. 어떤 절에서 도를 통하고, 어떤 절에서 병을 고쳤는가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절에는 그 배면에 풍수가 있다.
산과 절의 이야기는 천 년을 변치 않지만, 변치 않기에 역설적으로 찰나를 사는 우리에겐 늘 새로울 수밖에 없듯이, 이 책이 세월을뛰어넘어 조금이나마 산과 절을 찾는 이들에게 보탬이 되길 기대해본다.
서울 북한산 승가사
동국여지승람의 5대 명산
북한산이 깃든 기도도량

삼국시대 당시 고구려 백제·신라는 한강과 북한산을 차지하기 위해 국운을 걸었다. 뺏고 뺏기는 일진일퇴가 계속되었다. 최종 승자는 신라였다. 진흥왕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북한산의 한 바위 봉우리 위에 순수비를 세웠다. 이 바위 봉우리 아래,북한산의 대표적인 사찰인 승가사가 있다. 서울에 있기에 저평가되고 있는 북한산은 사실 예부터 빼어난 명산으로 꼽혀왔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북한산은 해동오악 중의 하나에 속한다. 북에는 백두산이, 동에는 금강산이, 서에는 묘향산이, 남에는 지리산이 있고 그 가운데에 북한산이 있다고 했다.
빼어난 명당 서울을 둘러싼 산과 물의 이야기한국의 명산에는 악산이 많다. 악산이란 바위가 돌출된 험한 산을 말한다. 하지만 험한 산이 영양가가 높다. 사람도 ‘성질 있는 사람이 성질 값을 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산도 악산에 먹을 것이많다. 여기서 먹을 것이란 ‘기도발‘과 ‘영험‘을 가리킨다. 기도발과 영험이 있어야 진부한 속세를 초월할 수 있다.
바위산은 악산이다. 그러므로 악산을 찾아다녀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한국에서 이름난 악산으로 강원도의 설악산이 있다. 설악산 다음의 악산은 어디인가. 내가 보기에는 서울의 북한산이다.
예로부터 북한산을 일컬어 ‘산형절어천하山形絶於天下지덕도어해동地德渡於海東이라 했다. "산의 형상을 보니 천하에 으뜸가는 산이요, 땅의 덕은 해동에 널리 퍼질 곳이다"라는 뜻이다. 북한산은 원래 삼각산한산화산 등으로 불렸으나 북한산성이축성된 이후로 북한산이라는 명칭이 공식화되었다고 한다.
설악산 다음가는 아름답고 기운 센 명산이서울의 병풍 역할을 하고, 한국의 제일가는 강인 한강이 동남쪽을둘러싸고 있으니 조후용신調候用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북한산의바위 봉우리에서는 불기운이 타오르고, 한강은 유유히 흐르면서 화기를 식혀주니, 서울이라는 대도시의 조후調候가 조절되는 것이다.
이처럼 절묘하게 불과 물을 두루 갖춘 수도는 세계에서도 드물다.
풍수적으로 볼 때 도읍지에 해당하는 곳은 네군데의 방향에 산이 있어야 한다. 신라의 천 년 수도 경주를 보아도동서남북에 산이 있다. 동쪽에는 명산이, 서쪽에는 옥녀봉과 선도산이, 남쪽으로는 금오산(남산)이, 북쪽으로는 금강산(북악)이 자리잡고 있다. 후백제 견훤이 도읍지로 잡았던 전주 역시 동서남북 사방에 산들이 포진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하필 네 군데를 고집하는 이유는 하늘의 28수를 4로 나누면 청룡·백호·주작·현무라는 형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이뤄진 일이 땅에서도 이뤄진다‘는 주기도문처럼 하늘의 청룡·백호, 주작•현무는 지상에서 그대로 구현돼야 한다. 그러자면 네 군데 산이 있어야 한다.
북한산을 거의 빨치산 수준으로 오르내리는 전문 산꾼들 사이에서는 ‘불수사도북‘이라는 전문 용어가 통용된다. 하루 동안에 불암산-수락산-사패산-도봉산-북한산을 완주하는 코스를 말한다. ‘불수사도북‘은 도상 거리로는 45킬로미터이지만 실제 도보로 60킬로미터 거리가 된다. 이 거리를 하루 만에 주파하는 것이다.
바위의 기운으로 삶의 번뇌를 씻다북한산 등반에서 가장 위험한 코스는 인수봉과 염초봉이다. 인수봉에서는 바위 타다가 사고가 자주 난다. 염초봉 역시 마찬가지이다.
등산용품으로 유명한 회사 K2의 사장이 2003년에 염초봉에서 바위 타다가 안타깝게도 사고를 당한 적이 있다.
바위 절벽에3~4시간 매달려 있다 보면 모든 번뇌가 사라진다.
장거리 종주에서 10대가 포기를 가장 많이 한다. 그다음에는 20대가 포기를 많이 한다. 가장 포기하지않는 연령대는 의외로 50대이다. 50대는 살아온 연륜과 경험을 축적하고 있다. 어려움을 인내할 줄 안다는 뜻이다. 육체적인 지구력은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이 최고인 것 같다.
언제 하룻밤 유숙하고 싶은 절이었지만, 비구니들이 거처하는 절이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마음을 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친구인 춘산의 소개로 인연이 닿아 드디어 하룻밤을 묵을 수 있게 되었다.
머리에 두건을 쓴 것은 중국의 풍습으로, 겨울에 좌선하려면 춥기 때문에 두건을 쓰는 것이다.
주지의 방에는 ‘백초시불모是佛‘라는 액자가 걸려 있다. 만공스님 필체를 탁본한 것이라고 한다. "백 가지 풀이 모두 부처의 어머니"라는 뜻이다.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는 말이다. 이것은 옳고 저것은 틀리고가 아니다. 모두가 다 의미가 있다. 결국 분별을 하지 말라는 메시지이다. 부정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처음에는 쉽지만갈수록 어렵고, 긍정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처음에는 어렵지만 갈수록 쉽다고 한다. ‘백초시불모‘는 대긍정으로 들어가는 노선이다.
승가사에서 하룻밤을 묵은 날이 마침 보름이라, 저녁이 되니까 동편 산봉우리 너머로 둥그런 보름달이 떠오른다. 산에서 환하게 비추는 보름달을 보면 세속에 대한 욕심이 사라진다.
서울은 대단한 도시이다. 어느 시인의 말대로불과 40~50분이면 유목의 경계를 넘어 은둔으로 진입할 수 있는 도시가 서울이기 때문이다.
하동 지리산 칠불사
49일간 온기가 남았던 전설의 아자방과 개운 조사의 금강굴 이야기

동안거 중의 좌선이란 방바닥에 때를 묻히는 작업이다. 좌선이란 장시간 방바닥에앉아 있어야만 하기에, 방바닥이 너무 뜨거워도 안 되고 차가워도 안 된다. 그런가하면 좌선하는 사람이 불을 지피려 아궁이에 자주 들락거려도 분위기가 산만해지고시간을 뺏긴다. 그러므로 한 번에 몽땅 불을 때놓고 오랫동안 온기를 유지할 수 있는 온돌방이 좋은 선방이다. 지리산 칠불사의 아자방은 한 번 불을 때면 무려 49일동안 온기가 남았었다고 전한다.
한국인들에게 지리산은 속세의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질 수 있는 하나의 탈출구이자 해방구이다. 지리산은 쫓기는 자들이 마지막으로숨어 지냈던 은둔처이다.
"이제 금강산은 인연이 다했으니 남쪽으로 내려가자."
보화 선사가 20년 동안 머물던 금강산 영원암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멈춘 곳이 바로 지리산 한가운데 있는 칠불사였다.
금강굴 주변에는 무협지에서 말하는 ‘진법‘이라는 것이 설치돼 있기때문에 속인의 눈에는 절대 띄지 않는다고 한다. 아마도 시공이 다른 차원의 세계일 것이다. 제발 눈에 띄지 않기를 바란다.
불교 전래에 대한 정설은 고구려 소수림왕 때(372) 북쪽의 전진으로부터 들어왔다는 북래설이다. 북쪽 그러니까 고구려를 통해 육로로 들어왔다는 게 정설로 돼 있다.그러나 일연 스님은『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서 48년에 인도의아유타국 공주인 허황옥이 가야국의 김수로왕에게 시집오면서 불교도 함께 들어온 것으로 설명한다.
칠불사는 한국에 처음 불교가 수입된 통로가 고구려가 아닌 가야이고, 전래 연대도 무려 3백 년 이상 소급시킬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는 절인 셈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학계에서 남래설을 공식적으로 처음 제기한 인물이 북한의 간첩으로 밝혀진 단국대의 무함마드 깐수 교수였다는 사실이다.
구전에 따르면 이 구들은 신라 때의 구들 도사 ‘담공 선사‘의 작품이라고 한다. 하도 구들장을 잘 놓아서 구들 도사라고 불렸던 담공 선사의 대표작이 바로 칠불사 아자방이었다.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에 나오는 "백 년 동안 탐낸 물건은 하루아침에 먼지가 되고, 삼 일 닦은 마음일지라도 천 년의 보물이 된다百年貪物-朝塵三日修心千載"
6·25전쟁을 전후하여 지리산 일대에서 죽은 사람은 얼마나 될까. 어림잡아 4만 명쯤 되지 않을까 싶다. 근거는 이렇다. "2000년대 초반지리산 생명평화운동을 할 때 지리산에서 죽은 빨치산과 군경 토벌대의 위령제를 합동으로 지냈던 적이 있습니다. 이때 양쪽 죽은 사람 가족들의 위령제 신청을 받아보니까 그 숫자가 4만 명쯤 되었습니다." 지리산에서 20년 넘게 살고 있는 ‘지리산 시인‘ 이원규의 증언이다.
이 보광당 멤버들을 속칭 ‘구빨치‘라고  부른다. 반면 광복 이후로 지리산에 들어온 빨치산들은 ‘신빨치‘라고 한다.
지리산 빨치산 총대장이었던 이현상이 빗점골에서 1953년 9월에죽었다. 이현상 이후에도 박영발이 남아 있었다. 이현상보다는 카리스마가 약간 덜했지만 나름대로 한가락 했던 박영발은 1954년 3월에 죽었다. 이현상이 죽고 난 후에도 대략 6개월이나 더 버티다가죽었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드는 의문이 어떻게 6개월이나 더 버틸수 있었을까다. 수만 명의 군경 토벌대가 이 잡듯이 지리산을 뒤졌는데, 어떻게 그 촘촘한 수색망을 피해 잠을 자고 밥을 먹으며 은신할 수 있었을까? 거의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고 생각된다.
박영발은 토벌대에 발각되어 사살당한 것이 아니고 스스로 자폭했다고 전해진다. 심한 부상이 있었고, 포위망은 점점 좁혀오고,먹을 것도 여의치 않으니까 스스로  자폭한 것이다.
희한하게도 신선의 수행터와 발치산의 비트가 동일 장소였던 것이다. 삶의 커다란 아이러니다.
귀거래사‘를 입으로 옮기는 많이 읊지만 이걸 실행에 옮긴 인물은 많지 않다
천 석이 들어가는 큰 종을 보시오
看千石鐘
크게 치지 않으면 울리지 않네
大打無聲
어찌하면 두류산처럼 하늘이 울어도  오히려 울지 않을 수 있을까
天嗚不嗚
지리산은 예전부터 도교적 체취가 강한 산이었다. ‘지리산에 상주하는 도사가 5천 명이다. 계룡산에는 8백 명의 도사가 항상 머문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계룡산의 몇 배인가? 여섯 배가 넘는다. 그만큼 지리산은 도사들의 천국이었다. 도사는 유교의 선비보다는 탈속적이다. 도시보다는 산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세상사에 일정거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불교보다는 좀 더 세속적이다. 머리를 기르고 있어서 언제든지 시중에 내려와도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
불교 승려는 시중에 내려오면 바로 눈에 띈다. 유교와 불교의 사이.
그 중간 위치에 도사가 있다. 평소에는 숨어 살지만, 유사시에는 역사의 무대 뒤편에서 작업할 수 있는 존재가 도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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