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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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차게떠올라님의 서재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도, 마치 공공의 보험처럼, 장애인 왕진을 가는 의사가 동네가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동네 주민들은 받아들이고 있었다. 당장 자기가 그 왕진의 혜택을 입지 않아도, 누구라도 장애를 가지게 될 수 있고 누구라도 나이 들고 약해질 수 있다는 걸 알기에.
이렇게 가면 동네가 더 잘 보인다. 얼마나 가파른 오르막을 걸어야 집에 도착할 수 있는지도 보고, 집까지 가는 길에 싱싱한 식재료와 생필품을 구할 곳이 마땅히 있는지도 본다. 집에 도착해서는 고혈압·당뇨 교육도 하고, 무좀 상태도 본다.
방 안의 가구 배치도 본다. 방에 볕과 바람이 잘 들어오는지 확인한다.
왕진 가방을 들고 길을 나서면, 진료실이 거리로 무한히 확장되는 느낌에 빠진다.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주중에 이렇게 여유 있게 동네를 거니는 의사도 없을 거라며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 가방을 들면 나는 코스튬을 입고 변장한 히어로가 되어 동네를 누비는 것 같아 가슴이 뻐근해진다.
이 민망하면서도 은근히 맛있었던 하루를 친구들에게 얘기했다. 친구들은 부끄러운 듯 즐거운 듯 웃어주었다. 얼마 후 그 친구들이 우리 집 근처로 이사 오게 되었을 때, 자기들 집 욕실 인테리어를 하며 욕조를 넣었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몸을 담그고 목욕하고 싶으면 언제든 부담 없이 오라는 말과 함께.
할머니는 아픈 와중에도 증손주를 위해 성냥개비에 찔리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그 옛날 햇살이 잘 드는 방 금침 위에서 죽음을 향해 한 발씩 다가가고 있으면서도, 증손주의 병원놀이에 기꺼이 한몫 참여하셨던 내 증조할머니가, 연분홍색 꽃반지 위에 겹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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