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름의 빌라』는 내용을 잘 모르고 표지에 반해버렸다. 주변에 나 같은 독자가 제법 있었던 거로 기억한다. 아름다운 표지는 인상주의 화가 알프레드 시슬레의 <Windy Afternoon in May> 다. 표지가 말을 건다. 여름이 무르익은 나무 아래 한 여인과 소녀를 따라 이야기의 한 가운데로 들어가 보라고.
소설집 『여름의 빌라』는 동명의 단편을 포함해 모두 7편의 단편을 묶었다. 읽다 보면 인생의 어느 때쯤 겪었음 직한 상처와 불화를 떠올리게 된다. 갈등 지점으로부터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야 이해나 공감, 비슷한 것이라도 가능하다는 걸 소설 속 인물들은 보여준다. 분명 내가 피해자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가해자였던 경험, 아니면 그 반대였던 상황, 살다가 겪게 되는 이런 관계의 모순을 『시간의 궤적』은 이야기한다. 프랑스라는 낯선 땅에서 만난 유학생인 나와 주재원인 언니, 둘도 없는 단짝이었지만 헤어지며 나는 언니에게 독설을 뱉고 만다. 당시에는 알 수 없었던 죄책감이 뒤늦게 밀려든다. 결혼 생활이 녹록지 않은 데다 언니의 귀국으로 홀로 남게 될 두려움에 나는 언니에게 가장 아픈 말을 하고, 결국 소중한 인연을 놓치게 된다. 이렇게 멀어진 후 되돌아가지 못하는 인연이 소설집 곳곳에 수두룩하다. 『폭설』에서는 아빠의 회사 동료인 미국인과 사랑에 빠져 이혼 후 미국으로 떠난 엄마와 엄마를 이해할 수 없어 괴로운 딸이 그려진다. 어릴 때는 미국에 가서 엄마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하지만 사춘기를 겪으며 자식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는 엄마에 대한 원망으로 더는 미국에 가지 않는다. 서른 무렵 연인과 헤어지고 직장에서 계약 해지를 당하는 등 불행이 겹쳤을 때 마지막으로 엄마를 찾아간 딸, 모녀는 옐로스톤공원으로 여행을 갔다가 갑자기 내린 폭설에 갇히고 만다. 『폭설』의 마지막 대목은 이렇다.
“그래서 이제는 엄마를 이해할 수 있게 됐어?”....“그녀는 그것에 대한 답을 말하는 대신 그저, 우리는 침묵 속에서 어둠의 도로를 달릴 뿐이었어, 라고 말했다. 그리고 드문드문 불빛이 켜진 인가가 있는 곳으로 마침내 접어들었을 때, 두껍게 내려앉은 침묵을 깨고 엄마가 이렇게 말했다고도.” “짐승을 한 마리도 치지 않고 빠져나올 수 있었으니 우린 참 운이 좋구나.” 『여름의 빌라』138쪽
때론 이해한다는 말보다 침묵이 더 큰 공감을 주기도 한다. 상대를 영영 이해할 수 없다 해도 괜찮다고 다독인다.
소설이 불가해한 관계만 얘기하는 건 아니다. 한 차원 다른 이해와 소통을 그린 작품 『흑설탕 캔디』는 백수린 작가가 가장 아낀다고 알려지기도 했다. 아내와 사별한 후 프랑스 주재원이 된 아들과 함께 손자 손녀를 돌보기 위해 낯선 땅으로 온 할머니가 말은 통하지 않지만, 피아노를 연주하고 음악을 함께 들으며, 이웃인 프랑스인 할아버지와 사랑하고 소통하는 이야기다. 외국에서 말이 통하지 않는 상태는 『시간의 궤적』과 『폭설』에서도 그려지고 있는데, 이는 단절과 고립을 증폭하는 장치다. 『흑설탕 캔디』가 다른 점은 말을 대신할 훌륭한 소통 방식을 제안한다는 점인데, 그것은 바로 ‘음악’이다. 할머니 난실이 리스트와 슈만의 곡을 연주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브뤼니에 씨가 정성껏 쌓아 올린 각설탕은 할머니의 연주에 대한 선물. 이보다 우아한 노년의 사랑을 본 적이 없다. 대명사 두 개와 동사 한 개로 남은 브뤼니에 씨 이별의 말이 손녀가 상상한 것처럼 ‘사랑해요. Je vous aime’ 이길 독자로 바라게 된다. 손주들을 돌보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 할머니, 손에 꼭 쥔 흑설탕 캔디가 욕심으로 비치지 않고 아름다운 것은 그녀가 보여준 삶에 임하는 품격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고요한 사건』에서 뜨거운 여름 해지네 옥상에서 주인공이 느낀 우정, 연대감은 안타깝게도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눈 내리는 밤 고양이 사체를 묻어주지도 못하고, 문고리 안에서 보잘것없는 삶을 살게 되리라는 암시를 받으며 비겁하게 구는 것이 주인공의 마지막 모습이다. 그런 날 하필 아름다운 눈이 내린다. 다툼과 살상 대신 해지네 옥상을 기억하라는 듯이. 『여름의 빌라』에서 독일 베를린 크리스마스 시장에서 일어난 테러로 딸을 잃고 이후 알츠하이머 진단까지 받은 베레나의 말도 인상 깊다.
“지난 2016년 12월 (테러가 발생한) 이후 당신은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쉽게 폭력 앞에서 소멸하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다고요”....“긴 세월의 폭력 탓에 무너져 내린 사원의 잔해 위로 거대한 뿌리를 내린 채 수백 년 동안 자라고 있다는 나무. 그 나무를 보면서 나는 결국 세계를 지속하게 하는 것은 폭력과 증오가 아니라 삶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단다.”『여름의 빌라』 68쪽
대체 삶에 가까운 것이란 뭘까? 골똘히 생각해보니, 해지네 옥상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캄보디아 소년 앞에 섰던 베레나의 손녀 레오니가 소년 사이에 그어진 선을 지우며 새 친구가 생겼다며 망설임 없이 반기는 것. 이런 것들이 주인공을 파멸의 나락에서 구한다. 『폭설』에서 모녀가 함께 듣던 ‘레너드 코헨’의 ‘Bird on the wire’ 중에는 “난 나에게 손 내밀어 주는 모든 이들에게 상처를 줬어”란 가사가 있다. 부드러운 멜로디를 타고 흐르는 아픈 말, 이렇게 아파야 또 인생은 한 걸음 나아가는 거라고 소설은 말한다. ‘완전한 이해와 용서는 불가능하단 걸 받아들여라. 하지만 사랑의 순간을 기억하려 애쓰라.’『여름의 빌라』가 나에게 들려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