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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바름의 서재
  • 달팽이 안단테
  • 엘리자베스 토바 베일리
  • 11,700원 (10%650)
  • 2011-08-22
  • : 1,465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단단한 위로, 담담한 마음: 일상을 회복하고 싶은 당신에게’

 

『달팽이 안단테』∣엘리자베스 토바 베일리 지음∣창비

 

‘달팽이 안단테’, 책 제목만 봤을 때 ‘걷기’나 ‘쉼’ 또는 마음을 편안하게 녹이는 ‘음악’ 이야기일까 했다. 원제가 ‘THE SOUND OF A WILD SNAIL EATING’이란 걸 알고는 더 헛갈렸다. ‘달팽이가 먹는 소리’라니,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소리다. 아니 사실 달팽이가 먹는 소리를 사람이 들을 수 있는 걸까? 궁금증을 안고 책장을 넘겼다.

 

“나는 병이 난 뒤로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돌아서 그야말로 시간 속에 파묻혀 있다고 느꼈다.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한 일은 산처럼 쌓여서 달에 가 닿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 무엇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시간은 그냥 하염없이 나를 질질 끌고 갔다. 너무 시간이 없어서 쩔쩔매는 친구들을 보면 내가 쓸 수 없어서 넘쳐나는 시간을 그들에게 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아무리 바라는 것을 얻었다 한들 건강이 이 모양이 되었으니 그 얼마나 부질없는 짓이었나 하는 생각에 착잡해졌다.” -54쪽

 

건강이 이 모양이라 시간이 차고 넘치게 됐다는 작가 엘리자베스 토바 베일리, 그녀의 사정은 담담하게 들리지만 ‘절망’이란 단어를 되뇌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하루아침에 몸을 가누지 못하는 병에 걸렸다. 후천성 미토콘드리아병, 이름부터 생소한 희소병이다. 근육이 약해져 전신 마비와 자율신경계 기능 장애를 동반하는 질환이라고 한다. 작가는 아프기 전엔 하이킹, 요트 타기, 원예 등을 즐겼다. 더없이 활동적인 그녀에게 ‘몸을 쓸 수 없다는 것’은 형벌과도 같은데 여기서 반전, 병문안을 온 한 친구가 우연히 숲에서 ‘달팽이’ 한 마리를 데려온다. 그리고 제비꽃 화분에 달팽이를 올려놓는다. 마치 귤 한 봉지나 식빵 한 덩이인 양 무심히 그녀를 찾아온 달팽이, 그런데 그녀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진다. 마법의 달팽이일까? 그건 아니다. 숲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육상 달팽이일 뿐, 다만 작가가 달팽이를 섬세하게 관찰하고 공부하며 새롭게 알아간다. 사랑하면 보이는 것이랄까? 달팽이 관찰기는 자신의 투병기와 함께 때로는 당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유머, 때로는 이보다 쓸쓸할 수 없는 고독을 섞어 이야기를 엮어간다.

 

“사람들이 문병을 왔다 가고 나면 심신이 힘들었지만 달팽이는 내게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녀석의 호기심과 우아함은 나를 평화와 은자의 세계로 점점 더 가까이 이끌었다. 녀석이 유리 용기 속 작은 생태계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57쪽

 

 

달팽이가 속한 복족류 관련 책과 논문 그밖에 참고한 과학 문헌 등 작가가 출처를 밝힌 저작만 60여 종 가까이 된다. 찰스 다윈부터 일본 하이쿠 작가 고바야시 이사, 동화작가 안데르센과 페미니스트 시인 엘리자베스 비숍 등이 남긴 달팽이에 대한 글과 통찰을 읽으면 작가보다 먼저 달팽이의 매력에 빠진 이들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책에 인용하지 않았지만, 글을 쓰며 심장에 꼭꼭 새긴 자료들이 이 밖에도 얼마나 많을지……. 달팽이가 가는 길에 뿌리는 점액과 같이 맑고 담담한 표현을 뱉기까지 작가가 했을 숱한 상념이 책장 사이사이 느껴진다. 이토록 정성 어린 관찰과 기록이 가능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녀의 몸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책의 끝 나희덕 시인의 추천하는 말 가운데 “세상과 불화하거나 고립된 채 삶의 막다른 지점에서 정신의 놀라운 집중력을 보여준 저작”으로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 시몬 베유의 『중력과 은총』 등과 함께 『달팽이 안단테』를 꼽는다. 이 말에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게 된다.

 

달팽이는 먹이가 부족하거나 날씨가 나쁘면 잠자는 미녀처럼 깊은 잠에 빠져든다. 보통의 점액 방식으로 물리치기 어려운 적을 만났을 때 고약한 유독성 화학물질이 함유된 특수 점액을 뿜기도 한다. 놀라운 생존력이다. 한없이 정적으로 보이지만 충분히 역동적인 달팽이를 보며, 작가는 비록 몸을 움직일 수 없지만, 자신의 세계는 넓게 뻗어 나갈 수 있음을 알았던 것 같다. 그런데 이토록 사랑하는 달팽이가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춘 날, 작가는 절망한다.

 

“질병은 사람을 고립시킨다. 고립된 사람은 남의 눈에 띄지 않는다. 보이지 않게 되면 자연스럽게 잊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달팽이......우리 달팽이는 내 영혼이 증발하는 것을 막아주었다. 우리 둘은 온전히 하나의 사회를 이루었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 고립감에 빠지지 않게 도와주었다. 달팽이가 사라지자 날이 저무는 것처럼 내게는 더 이상 기댈 희망이 없었다.”-152쪽

 

다행히 사라진 줄 알았던 달팽이는 유리 용기 속 흙에서 발견된다. 그 후 작가의 몸도 아주 조금 나아진다. 계절이 바뀌고 시골집으로 돌아가게 된 작가는 함께하던 달팽이를 그가 본래 살았던 숲으로 돌려보낸다. 20년 투병 생활 가운데 달팽이와 함께한 시간은 1년이었다. 20년 가운데 1년이라니 짧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암수한몸인 달팽이는 무수한 알을 낳고 그 알이 부화해 새끼가 다시 부모만큼 자라는, 세대가 교체되는 놀라운 시간이었다. 매우 특별한 달팽이를 만나 기적처럼 건강을 되찾는 이야기도 아니고, 사랑하는 달팽이를 남기고 세상을 등지는 슬픈 이야기도 아니다. 작가의 근황까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여전히 작가는 아픈 몸으로 하루를 살아내고 있을 것이다. 극적 결론에 이르지 않는 이 이야기가 우리나라를 포함해 프랑스, 중국, 대만 등 세계 10여 개 나라에 번역돼 독자들의 사랑을 받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작은 생명이 주는 단단한 위로를 바탕으로, 일상을 회복할 가능성이 딱히 없음에도 불구하고 조급하지 않은 담담한 마음, 포기나 막연한 희망과는 결이 다른 이 마음을 느꼈기 때문 아닐까 싶다. 코로나 19 가운데 일상의 회복을 바라는 우리가 품어 봄 직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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