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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
  • 이기호
  • 17,820원 (10%990)
  • 2025-07-17
  • : 24,280


우리는 이제 반려동물을 ‘가족’이라 부른다. 함께 밥을 먹고, 산책을 하고, 때로는 사람보다 더 깊은 위안을 받기 때문이다. 으레 가족은 그래야 하고, 그런 존재에 반려동물을 포함시킨다. 하지만 이 관계는 정말로 평등하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일까. 반려동물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그 사랑 속에 ‘동물을 사랑하는 나’를 더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족’이라는 프레임 속에 반려동물을 넣는 행위 자체가 언뜻 평등하고 따뜻해 보이지만, 사실은 인간 중심의 질서 속에 그들을 편입시키는 일일 수 있다. 가족이라는 말은 애정을 전제하지만, 동시에 위계와 소유의 언어이기도 하다. 누구를 ‘가족’이라 부를지는 결국 인간이 결정하며, 그 결정 속에서 반려동물은 선택권 없이 이름과 관계, 그리고 운명을 부여받는다. 그 안에서의 사랑은 진심일 수 있지만, 그 사랑의 틀과 조건을 만든 건 언제나 인간이다.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출발한다. 주인공 ‘나’와 주변 인물들의 삶 속에서 반려견 이시봉은 인간 관계의 균열과 소유욕, 위선, 상실과 애도의 복잡한 감정을 드러나게 한다. 작품은 현재와 과거,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왕실 비숑의 혈통사와 ‘앙시앙 하우스’ 인물들의 서사를 병치한다. 프랑스 혁명과 전쟁 속에서 가장 먼저 희생되는 개들의 운명, 강아지 혈통을 보존하려는 인간의 계획, 사랑과 죄책감이 뒤섞여 결국 돈과 관리로 수렴되는 현실이 교차한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인간은 동물을 인간화하지만 인간의 동물화는 참지 못한다”는 냉정한 통찰을 던진다.

 

이시봉과의 우정을 지키고 싶어 하는 ‘나’의 소망은 순수해 보이지만, 작품 속 수많은 사례는 그마저도 인간의 시선에서만 유효한 ‘순수’일 수 있음을 경고하는 듯했다. 인간이 만든 종(種), 보호라는 이름의 통제, 사랑이라는 명분 속의 자기애는, 동물과의 관계를 끝내 불평등하게 만들며 인간 자신조차도 불행하게 했다.

 

제목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은 역설적이게 느껴졌다. ‘명랑함’은 강아지가 지닌 순수한 현재성, 조건 없는 즐거움을 상징하지만, ‘짧고 투쟁 없는 삶’은 그 생이 인간의 선택과 통제 속에서 주어진 조건에 순응한 채 끝났음을 드러낸다. 투쟁이 없었다는 말은 선택과 저항의 기회조차 없는 존재들의 운명을 의미하는 것만 같았다.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실제로 8년째 함께 사는 강아지 ‘이시봉’을 바라보며 이 이야기를 썼다고 밝힌다. 그는 “소설은 강아지에 대해 말하기엔 적합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강아지를 둘러싼 인간의 책임을 묻기엔 여전히 유효한 장르”라고 말한다. 이것은 곧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사랑한다는 이유로 동물을 길들이고, 품종을 관리하며, 관계를 소유한다. 그렇다면 그 사랑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동물일까, 아니면 결국 나 자신일까?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서 쓴 솔직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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