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박민규는 단편에서 대부분 남성 일인칭 화자를 내세운다. 「카스테라」는 소음이 심한 냉장고와 동거할 수밖에 없었던 대학교 일 학년 남학생의 이야기이며, 「갑을고시원 체류기」 역시 좁은 고시원 복도 끝 방에서 살던 청년 시절의 ‘나’의 이야기이다. 「야쿠르트 아줌마」에도 마찬가지로 남성 서술자가 등장한다. 그리고 역시나 새벽에 컴퓨터 속의 여자들로 자위하는 비루한 청춘이다.
주류가 아닌, 루저로서의 화자다. 그들은 그동안 익숙해 있던 세계에서 나와, 막 새로운 세계에 내던져진 상태이다. 하지만 그 새로이 도달한 세상은 ‘찌는 듯한 무더위’로 ‘불쾌지수’가 끝없이 올라가 있는 상태이며, 벌레의 울음조차 슬피 들릴 정도로 억압된 공간이다. 그들이 세상에 가지는 박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지만, 그들은 저항하지 못한다. 저항하면 바뀔 수 있는 세상은 이미 오래전에 지나간 탓이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몸을 한껏 웅크린 채 살아가야만 하는 마이너리티들인 것이다. 그들에게는 밀실의 벽을 부술, 무모한 패기가 없다. 그것이 무모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아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답답하고 암담하다. 하지만 별수 없다. 패기와 젊음으로 이겨내지 못할 그 세계는 현실과 너무도 맞닿아 있다. 이는 여러 사회경험을 가진 박민규이기에 가질 수 있는 핍진성일 것이다.
『카스테라』는 인간들을 소모품, 건전지 다루듯 배치하고 처리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체제에서 살아가는 청춘의 이야기이다. 치욕적인 대우를 받음에도, 숨을 쉬고 살아가야 하는 루저들의 이야기이며 그들에게 돌파구는 없다. 현실에서는 몰려드는 빚쟁이들을 가둘 커다란 냉장고도 없고, 답답한 세상을 부수어 줄 대왕오징어 역시 없다. 수능 전날 ‘아, 내일 전쟁 났으면 좋겠다.’ 하는 희망을 들어 줄 신 또한 마찬가지. 그들의 위안은 현실에서 찾아볼 수 없으며, 박민규는 그들에게 ‘환상’이라는 돌파구를 제시한다. 모든 귀찮은 것들을 다 때려 넣을 수 있는 ‘냉장고’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저항할 수 없는 현실에서 우회적 상상력을 통해 돌파구를 찾는 것은 그저 허망한 생각이 아닌, ‘사회적 상상력’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누구에게나 ‘소중하거나, 해악인 것들’이 있고, 소망하지만 이룰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많다. 그런 이들에게 작가는 냉장고라는 환상의 공간을 제시한다. 현실과 유리된, 화자의 내면에 있는 결핍된 욕망을 가능케 할 공간을. 세상의 모든 해악을 담을 수 있는 냉장고는 주인공들의 현실을 변화시킨다. 대상을 괄호 안에 넣을 수 있는 세상으로 전이시키는 것이다. 박민규는 현실과 환상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상상력을 부린다. 코끼리가 냉장고에 들어갈 수 있는 세상을 어물쩍 연결해버리는 것이다. ‘어?’ 하는 사이에 세상은 환상과 긴히 연결되어 있고, 너무도 간단히 우리에게 가능하다고 믿게 해 버린다. 아주 능수능란하게.
박민규가 환상에서 끌어온 결말을 통해 독자에게 바라보기 원하는 것은, 어쩌면 환상이 아닌 현실일 수도 있다. 환상과의 대비를 통해 현실의 억압적이고 불합리한 면이 강조되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는 김현의 말 ‘인간은 문학을 통하여 억압하는 것과 억압당하는 것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 부정적 힘을 인지한다.’을 떠올리게 한다.
환상을 보여준다고 해서 결코 현실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환상을 봐야 또 다른 눈으로 현실을 볼 수 있다는 말은, 환상과 현실을 모두 경험해 본 독자가 볼 수 있는 또 다른 현실을 의미하는 듯 보인다. 쓴맛만을 경험해본 사람과, 단맛과 쓴맛을 모두 본 사람의 미각은 분명 다를 것이다. 당연히 단맛을 경험해 본 사람의 혀에 들어간 쓴맛이, 더 쓰게 느껴지지 않을까? 물론 쓴맛과 단맛은 서로 함께 존재할 수 있는 것들이다. 둘 다 존재하기에 더욱 서로를 강조시켜줄 수 있는 것들 말이다.
냉장고가 외치는 소음이 갑작스럽게 커졌다면, 냉장고 문을 한 번 열어봐야 한다. 목청 좋은 훌리건의 메이데이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