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이름 없는 자의 이름

자기계발서를 읽을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시간에 실제로 나를 계발하는 게 낫다는 가치관을 갖고 있는 내가 읽은 자기계발서는 한 손으로도 꼽을 수 있는데(내 손가락이 몇 개인지는 비밀이다) 오랜만에 골 때리는 자기계발서를 읽었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알려주는 무너지지 않는 마음 장벽 세우기”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는 법”이다. 다만 시중의 자기계발서가 소위 스펙이나 외모, 사회적 성공에 집중한다면 이 책은 불안한 마음에 집중한다는 차이는 있다.


사실 냉정하게 따져보자면 이 책도 자기계발서라는 범위를 크게 벗어나는 건 아니지만, 보편적인 자기계발서와 다른 점은 바로 그 분야가 다름에서 기인한다. 그게 굳이 자기계발서를 읽고 감상평을 남기는 이유다.


우선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두 가지 신기한 점을 발견했다. 하나는 사실 신기하기보다 약간 무서웠다는 데 더 가까운데, 거기 나오는 증세가 다 나를 가리키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나의 망상이면 좋겠지만 아무튼 거기 나오는 사례나 증상을 보면 응? 이거 난데? 싶고, 또 다른 증세를 보면 에? 왜 또 나 같지? 싶어서 대체 나의 병명은 무엇인가, 의사가 나를 보며 가끔 머뭇댔던 게, 다른 건 다 괜찮냐고 재삼 물었던 게 혹시 그 때문인가 싶기도 했다. (그러나 다 내 얘기 같아서 다시 새로운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나는 대체 병원에 왜 다니는가, 하는.)


두 번째로 신기하면서도 다행이었던 건 병원에 다니기 전부터도 내가 비교적 그 증상들에 잘 대처하며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가 제안한 여러 가지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는 법’을 나는 대체로 이미 하면서 살고 있었다. 역시 살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이란 대단한 것이다.


그와 별개로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건 의사가 자신의 사례를 들어 각종 불안증세와 대처법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정형외과에 비하자면 ‘저도 허리가 아파 봤는데 말이죠, 뼈에는 이상이 없더라구요. 그럴 때는 찜질과 견인치료나 도수치료가 도움이 됩니다. 제가 실제로 해봤더니 나아졌어요. 집에서 핫팩으로 찜질을 해 보세요’ 하는 식이다. 정신건강의학과는 환자의 개인정보 노출에 대한 우려는 물론이거니와 사회적 편견 때문에라도 구체적인 사례를 들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에 본인의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것이 한편 이해되기도 한다. 아 물론 정말 필요한 경우 환자의 이니셜을 써서 설명하기도 하지만 거기서 거론되는 건 아주 아주 보편적인 사례들이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이라든가(저자는 대입부터 공인중개사 시험까지 각종 시험 일정을 꿰고 있다고 한다;;;), 배우자의 혼외관계에 상처를 받은 사람이라든가. 독자들은 의사 본인의 사례를 접함으로써 그가 제안하는 대처방법에 더 큰 신뢰를 갖게 되고 그래, 정신과 의사도 우리 같은 사람이었어, 하는 묘한 안도감도 갖게 된다. (어떤 과든 병원을 자주 다녀본 사람이면 의사가 ‘사람’으로 보이는 일이 얼마나 희귀한지 알 것이다.) 이를테면 그는 반복되는 불안한 생각을 소리 내어 읽거나 글로 쓰는 것을 해 보라고 권하는데, 그러면서 자신은 가끔 ‘나에게 카톡 보내기’를 한다고 한다. 그 내용인즉슨...


늘 쓰던 상품이 특가로 나와서 사려는데, 사는 데 ISP 결제가 오류 나서 자꾸 뒤로 갔다 앞으로 갔다 반복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시간이 지났고 품절. 진료 끝나고 5분의 1이 남은 책을 읽고 오려다가 막상 진료가 끝나니 까먹고 그냥 집에 옴. 책도 두고 옴. 집에서 카톡 계속 와서 자꾸 답해야 하는 것들 끊지 못함. 애들은 그 사이 유튜브만 보고. 숙제도 챙기지 못했다. 무능력하고 바보 같은 엄마인 것 같아 열받는다.


저 문장을 읽고 현실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독자, 아니 환자가 몇이나 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여느 자기계발서처럼 아주 보편적인 얘기만 하고 있어서 ‘내 사례’에 특별히 도움은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건 이 책이 내게 특화된 상담이나 처방이 아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나의 불안한 마음을 내려놓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불안장애 환자들에게 큰 위안이 될 수는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확실히 세상에 나뿐이라는,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고립감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된다. 그에 더해 내게는 몇 시간의 읽는 즐거움과 여러 번의 ‘현웃’을 주었다. 그는 이런 효과까지 의도하고 본인의 얘기를 기꺼이 내놓은 것일까? 아마 그럴 것이다. 책에서 느껴진 저자는 매우 영민하고 예민하며, (예민함과 불가분의 관계인) 공감력이 뛰어난 사람인 것 같으니까. 바로 앞에서 상담하는 것 같은 조곤조곤한 구어체도 아마 의도한 것일 게다. 최소한 읽는 시간이 아깝지는 않았던 자기계발서로 기억이 될 것 같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환자들이 병원을 찾는 가장 큰 이유는 돈, 건강, 사랑 셋 중 하나라고 한다. 셋 다 아닌 나란 사람은 대체...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