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이름 없는 자의 이름

나는 원체 걸음이 빠른 편이지만 급히 걸을 때는 거의 웬만한 사람이 뛰는 수준으로 걷는다. 한데 좁은 인도에서 요리조리 사람을 피해 걷다 보면 꼭 앞이나 옆에서 내 길을 방해하는 사람이 있다. 내가 한 발 나아가려 하면 반 발짝쯤 앞서거나 추월로(?)에서 절대 벗어나 주지 않는 사람들.


여느 때처럼 목적지를 향해 바삐 걷다가 거슬리는 사람을 만났다. ‘여느 때처럼’이 ‘바삐 걷다가’를 수식하는 건지 ‘거슬리는 사람을 만났다’를 수식하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끼어들 틈이 나질 않았다. 뭘 갑자기 깨닫는 게 많은 나는 그때 또 깨달았다. ‘걸리적거리는’ 사람은 늘 나와 비슷한 속도로 걷는 사람이라는 걸. 나보다 느린 사람은 애저녁에 내가 추월했기에 고려 대상이 아니고, 나보다 훨씬 빨리 걷는 사람은 또 애저녁에 나를 추월했을 것이므로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결국 남는 건 올망졸망, 도토리 키재기하는 사람들인 거였다.


예전 회사의 상사가 내 오라비의 배우자가 굴지의 대기업에서 돈 잘 벌고 있다는 걸 알게 되자 “땡땡이 너는 속상하겠다, 너보다 안 좋은 학교 나왔는데도 그렇게 돼서”라고 해서 매우 황당해한 적이 있었다. (심지어 그렇게 말한 본인은 고졸이었으나 내 상사였고 내 1.5배 정도의 연봉을 받고 있었다!) 그때 나는 “그런 사람이 한둘이겠어요? 사실 저는 대기업 회장이라고 저보다 그렇게 똑똑하진 않을 것 같은데요, 그 사람들이 다 저보다 똑똑해서 돈을 그렇게 많이 벌까요?”라고 했었는데, 그건 진실이긴 했지만 내가 오라비 부부를 보고도 평정심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건 오라비의 배우자는 나와 다른 세계, 그러니까 내가 관심 없는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도 그때 알았다. 재벌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들의 삶이 궁금하거나 그들의 부러운 적이 한 번도... 아니다. 초딩 때까진 재벌 아빠가 나 좀 찾으러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


그 순간은 내가 왜 몇몇 사람들에게 과도한 악의를 품고 있는지 알게 된 때이기도 했다. 그들이 무능하고 일은 못하면서 과한 대우를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나의 싫음을 포장해 왔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세상에 나보다 모자라고 무능하면서 대우는 더 잘 받는 사람이 한둘인가 말이다. 나는 실은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 업계에서 능력도 없으면서 ‘내 것이 될 수도 있었던 자리’를 꿰차고 있는 게 꼴보기 싫었던 거다. 정작 그럼 그 자리에서 일할래? 하면 싫다고 할 거면서. 그걸 인정하자 그들에 대한 혐오가 조금 가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몇몇은 업계에서 일하면 안 된다는 내 생각엔 변함이 없지만 말이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