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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자의 이름

이래 저래 회사에서 스트레스 받는 일이 많아지면서 ‘일’이 아닌 데서 오는 스트레스를 최소화해 보기로 했다. 그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처음 산 것이 22인치짜리 중고 모니터. 예전에 편집 디자이너들과 일할 때 24인치 LED 와이드 모니터 두 개(어부지리+직급의 힘)를 놓고 쓰던 것에 너무 익숙해져 이제 모니터 하나로는 속이 터지고 그에 비례해 일의 능률도 급격히 떨어진다. 나처럼 성격 급하고 손 빠르고 생산성 좋은 사람에게 모니터 하나는 거의 차꼬 같은 것이어서 진짜 급할 때는 빈 자리에서 하나 가져와 잠깐 빌려 쓰기도 했다. (지금만 해도 내 작업표시줄에는 8개의 프로그램과 28개의 창이 띄워져 있다. 물론 크롬 탭은 제외하고다.)


또 붕어빵 가장자리 같은 얘길 하나 하자면 이전 직장에서도 모니터는 하나밖에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모니터를 두 개 쓰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길래 입사 초기 어느 날 담당에게 조심히 물었다. 혹시 모니터를 하나 더 쓸 수 있는 방법이 없냐고. 1인 1모니터라는 지극히 당연한 답이 돌아왔다. (빈 자리에서 모니터를 갖다 썼던 때가 이 시기다) 그렇다고 내가 포기할쏘냐. 몇 달 뒤 내구연한이 다 된 컴퓨터를 교체하는 시기가 되었고, 몇 대의 하드와 모니터가 현업에서 물러났다. 그 과정을 유심히 보고 있다가 담당에게 쪼르르 달려가 나 저 폐기 모니터 하나만 쓰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담당 부서에 직접 연락해서 승인을 받으라 했다. 그걸로 쫄 내가 아니지. 당장 전화해 나 모니터 하나만 쓰게 해 달라고 사정했더니 (하나로는 도저히 일을 할 수가 없어요 흑흑) 오래 되어 금세 고장이 날 수도 있고 색감이 이상할 수도 있고 등등등 부정적 의견을 피력했다. “괜찮습니다! 되기만 하면 됩니다. 고장 나기 전까지 쓰겠습니다!” 씩씩하게 외친 후 드디어 버려질 모니터 하나를 획득. 그 얘기를 전했더니 담당은 마뜩잖은 표정을 지었지만 본인이 한 말이 있으니 모니터 하나를 갖고 가라고 해주었다. 얏호.


몇 달인가 지나서 보조 모니터는 드디어 고장이 났다. 나는 다시 우리 부서 담당에게 쫓아가 혹시 남는 모니터 없냐고 물었다. 담당은 너무나 간단하게 우리 창고에 어찌 어찌 해서 잉여가 돼버린 모니터가 몇 대 있을 거라고, 거기서 하나 갖다 쓰라고 했다. ...응? 원래 여분이 있었다고?


입사 직후와 그때의 다른 점은 내가 그 조직에 어느 정도 적응했고, 그들도 나에게 좀 익숙해졌고, 그간 특유의 오지랖을 발휘해 사람들에게 소소한 정보와 도움을 주었고, 동료들과 나쁘지 않은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리하여 나는 이전보다 더 멀쩡한 보조 모니터를 하나 갖게 되었다. 평소 대단한 통찰력을 지닌 애인에게 이 얘길 해주었더니 “디폴트가 달라졌기 때문”이라는 간명한 답이 돌아왔다. 역시 뭐든 처음 세팅이 중요하고, 그걸 위해선 남다른 노력이 필요하다. (왜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나와 비슷한 시기 입사한 사람 하나는 결국 내가 거길 관둘 때까지 추가 모니터를 확보하지 못했다. 내 상사급이었는데도. 꼬숩... 아, 아닙니다.)


회사를 옮겼더니(그러니까 여기 등장하는 회사만 세 개다) 으아, 여기도 1인 1모니터 체제였다. 심지어 오래 전 디자이너랑 일할 때 LED 들여오면서 폐기한 것과 같은 모델... 그러나 이 회사에서는 담당 부서에 연락할 수도 없었고, 우리 부서 담당도 내가 튀는 걸 싫어했다. 몇 달은 꾸역꾸역 버텼고, 또 한동안은 마침 나간 사람이 있어 빈 자리에 있던 모니터를 갖다 썼다. 그러나 ‘완벽한 사람’은 그조차 눈치를 주었다. 그래서 결국 사비로 중고 모니터를 하나 사서 연결한 것이다. 하나 클리어. 그러나 그 모니터는 지금 사무실이 아니라 내 집 책상에서 다른 열일을 하는 중이다. 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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