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봐도 내 취향은 아니었던 “카트린 M의 성생활”에서 건진 단 하나의 문장은 “공포는 무지에서 나온다”는 것이었다. (밑줄을 안 그어놔서 몇 페이지인지는 모르겠다. 그걸 찾자고 다시 읽고 싶은 생각은 없다)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리면 무섭지만 그 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왜 나는지 알게 되면 더는 무섭지 않은 것처럼. 한동안 그 문장을 적어 다이어리 내지 앞에 붙이고 다녔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르지만 사실은) 심약한 내가 세상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했던 이유는 바로 공포를 피하기 위해서였다는 걸, 그는 깨닫게 해 주었다.
지금 같은 가치관이 형성되기 한참 전인 어릴 때부터도 나는 과감하게 어떤 무지(無知)는 죄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몰라서 그랬으니까 다 괜찮다고 했다. 아니, 몰라서 그랬어도 괜찮은 게 있고 괜찮지 않은 게 있다. 탁자 위에 놓인 컵을 못 보고 쳐서 깨뜨렸을 때, 그건 몰라서 그랬으니까 괜찮다. 그러나 타인의 삶에 나쁜 쪽으로 영향을 주는 무지는 괜찮지 않다. 몰라서 하는 차별과 혐오는 위험하고 나쁘다. 당시엔 그것을 가르는 기준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할 수도, 차별이나 혐오 같은 단어를 쓸 줄도 몰랐지만 몰랐다는 것이 결코 면죄부가 될 수 없다는 것만큼은 분명히 알았다.
요즘 내가 궁금한 건, 해변에서 잠든 듯 엎드려 죽어 있는 쿠르디의 사진을 보고 눈물 흘렸던 사람들과 무려 우리 인구의 0.00007%나 되는(!) 아프가니스탄인들이 한국에 온다고 거리낌 없이 혐오를 표현하는 사람들이 같은 사람일까 하는 것이다. 정부에서 아무리 이들 절반 이상이 쿠르디 같은 ‘아이들’이라고 강변해도 (이걸 재삼 강조하는 속셈이 보여 짠하긴 하다) 그 아이들이 커서 무슬림 청년이 될 것이고, 그들이 다시 아이를 무한정 낳아서(대체 이 근거는 뭐람) 우리나라는 곧 무슬림 천지가 될 거라는 비약에는 헛웃음이 날 지경이다.
지역에 이슬람 사원 하나 들어오는 것에 무슨 십자군 전쟁이라도 벌어진 것마냥 난리가 나지만 (이들은 이스탄불 여행을 가도 블루모스크에도, 아야소피아에도 들르지 않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니 무슬림 천지인 터키 여행 같은 건 평생 하지 않을 거라 믿는다. 당연히 ‘난민으로 골머리 썩고 있는 유럽 나라들’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정작 이슬람은 선교를 하지 않는 종교라는 사실은 모른다. 무슬림들도 싫어하는 극단주의자들을 제외한 절대 다수의 무슬림들은 ‘도를 아시냐’고도 묻지 않고, 길거리에서 확성기로 ‘불신천국 예수지옥’을 외치지도 않으며, ‘오지’에 가서 ‘선교봉사’를 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불신천국 예수지옥’을 보고 개신교는 무조건 다 나쁘다고 하지 않는다. 아니다, 개신교는 국내에서 싸잡아 욕 먹는 경우가 많으니 다른 사례를 보자. 신부가 어린이를 성착취 했다는 뉴스가 가끔 등장하고 교황님이 이에 대한 유감을 표해도 천주교 자체가 문제라고, 천주교인을 다 몰아내자고 하는 사람은 없다.
어느 조직에나 또라이는 있는 것처럼 어느 종교에나 극단주의자는 있다. 미국의 ‘일부’ 극단적 개신교인들은 무슬림을 죽이기도 하고, 임신중지 시술이나 수술을 행한 의사들을 살해하기도 한다. 종교 자체가 비합리적이니 이들의 행위는 합리성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에게 보이는 건, 혹은 우리가 보는 것은 오직 이슬람, 이슬람, 이슬람. 그러면서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종교와 관계없이 타인을 해하고 있다는 사실은 생각지 않으려 한다.
사람들이 이런 무지의 성을 쌓는 데 적극 가담하고 부추긴 것은 단연 정부와 언론이다. 작년 한 해 동안 우리나라에서 난민 인정을 받은 사람은 고작 69명. 신청자 대비 0.43%, 성별로 보면 남성 0.31%, 여성 0.79%이다. 누적 인원으로 봐도 3% 정도에 불과하다. OECD 평균 난민 인정률은 대략 25% 내외, 세계 평균은 30% 정도라고 한다. 한국보다 난민 인정률이 낮은 나라는 우리가 평소 욕하기 좋아하는 일본과 이스라엘뿐이다. 이처럼 21세기 쇄국정책을 적극 시행해 온 법무부는 그 부메랑을 그대로 맞아 어제 도착한 아프가니스탄인들이 ‘난민’이 아니라 ‘특별공로자’, ‘조력자’라는 걸 설득하기 위해 진을 빼고 있다. 평소 이들이 나서서 난민에 대한 인식을 바꾸려는 노력을 조금이라도 했다면, 난민에 대해 보다 열린 자세를 취해왔다면 지금과 같은 고생은 덜 했을 테다. 이에 더해 물리적으로 가깝지 않은 지역에 대한 정보를 자연스럽게 습득하기 어려운 우리나라에서 언론은 극단적인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행태만 즐겨 보도하고, 무슬림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을 재생산해 왔다. 그 와중에 우리도 과거 난민이었다는 사실은 쉽게 잊힌다.
“한국 전쟁의 발발로 600만 명이 넘는 피난민이 포화를 피해 피난길에 올랐다. 이처럼 국경을 넘지는 않았지만 거주지를 탈출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국내 실향민이라 부르는데 유엔난민기구는 이들 또한 난민으로 분류한다. (중략) 유엔은 유엔한국재건단을 설립해 긴급 구호와 원조를 제공했다. 집이 없는 피난민을 위해 집을 지어 주고 공부도 가르쳤다. 이는 유엔이 설립된 뒤 처음으로 실시한 난민 구호 활동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한국 전쟁 당시 한국을 도왔던 나라 중에는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 같은 유럽 선진국뿐만 아니라 미얀마, 라이베리아, 이라크, 스리랑카, 그리고 현재 내전으로 가장 큰 고통을 겪고 있는 시리아 같은 나라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 나라는 의료 및 물자 지원을 비롯해 전후 복구에도 힘을 보탰다. 한국 전쟁고아 2명은 시리아에 입양되어 가기도 했다. 불과 60여 년 전 이들 나라에 의지했던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문경란 “우리 곁의 난민” 34-35쪽)
그러나 공포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다. 그래서 내 안의 공포를 물리치기 위해 한 번 따져보기로 했다. 내게 위해를 가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은 과연 자국민일까 난민일까. 한국엔 한국 사람이 많으니 한국인 범죄자가 많은 게 당연할 터. 2019년 기준 주민등록 인구 중 한국인은 51,849,861명, 그 해 살인 등 강력범죄부터 교통범죄까지 다~ 합친 한국인 범죄자는 1,549,238명이다. 계산기 두드리기 귀찮은 사람들을 위해 제가 한 번 해 보았습니다. 2.99%다.
외국인 범죄율도 마저 따져보자. 2019년 법무부 통계에 따르면 미등록 외국인 포함 체류외국인은 2,524,656명. 같은 해 범죄자 국적 통계에 의하면 한국 국적이 아닌 범죄자는 36,400명, 1.44%이다. 한국인 범죄율의 절반도 채 안 된다. 그리고 공식적인 통계는 없으나 (“그런 통계 자체가 차별적인 심증을 가지고 진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작성하지 않는다고 한다) ‘난민’의 범죄율은 그보다 더 낮다. 남의 나라에 와서 살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사람이 간도 크게 범죄를 저지르고 다닌다? 뭘 믿고? 왜 때문에?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뿐인가. 한국여성의전화 분석에 의하면 우리나라 여성들은 거의 하루 한 명꼴로 친밀한 관계의 ‘자국’ 남성에게 살해당한다. 여성에게 가장 공포스러운 존재는 ‘난민’이 아니라 내 옆의 파트너일 수 있다. 그렇다면 내가 길에서 마주칠 확률이 높은 건, 내게 위해를 가할 가능성이 높은 존재는 ‘귀신’일까 ‘사람’일까. 당신은 귀신이 무서운가 사람이 무서운가. 나는 사람이 더 무섭다.
“한국 사회는 내부에서 비롯된 공포를 외부의 ‘적’에게 투사하고 있다. 공포는 난민이 몰고 오는 것이 아니다. 공포는 내가 처한 현실의 반영이지 언젠가 맞닥뜨릴 미래에 대한 것이 아니다. (김선혜 외 “경계 없는 페미니즘” 53쪽)”
지금 ‘난민’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우리 사회 내부의 공포와 차별을 정확히 반영한다. 자국민 범죄자에게 향해야 할 비난과 공포를 타인에게 돌리고 있는 것이다. 결국 난민에 대해 우리가 가진 혐오와 공포는 우리 사회가 (외국인이나 난민 없이도) 안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 왜 이것도 몰라! 하고 개인을 단죄할 수만은 없는 까닭이다. 그러나 남들에게 휘둘리는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 개개인은 문제의 원인을 분명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마음의 문제를 푸는 것은 그 문제를 직시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처럼. 나의 공포는 어디서 비롯되는가, 그것이 혹시 무지에 따른 것은 아닌가.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나는 과연 정말 알고 있는가. 바쁜 세상에 굳이 그런 것까지 파고들 필요는 없다고?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것, 혹은 몰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 그로 인해 불편을 느끼지 않는 것 자체가 내가 ‘다수’라는 의미이다. 상사가 부하직원 눈치를 살피지 않는 것—나 같은 부하직원 제외—과 같은 이치다. 그런 권력을 가진 사람이 대체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나는 아직도 세상 모든 것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내 두려움을 직시하고 그것을 떨치려 고민하고 노력하면서 살고 있다. ‘고민하고 노력하면서 살고 있다’라니, 이렇게 자신 없고 소극적일 수가 없다. 그래도 평생 이 노력을 게을리하지는 않을 것이다. 공포를 물리치기 위해. 나의 무지로 죄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