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넘게 약을 먹었어도 일희일비하는 성향은 고쳐지지 않았고, 마음이 잔잔해지지도 않았다. 잔잔해지지 않은 게 아니라 저 밑에 가라앉은 채로 잔잔했다는 게 더 맞겠다. 하루는 의사에게 물었다. 남들의 간증(?)에 따르면 약을 먹으면 화도 나지 않고 마음이 평온해진다던데 그게 사실인가요? 의사는 그렇다고 했다. 저는 아니던데요. 화가 나는 상황에서는 별 거 아니어도 똑같이 화가 나던데요? 그는 약의 효과가 나타나는 데는 최소 2주 이상이 걸리니 약을 더 꾸준히 먹어보자고 했다.
그러나 맞는 약이 없어 내 처방전은 2주마다 바뀌었다. 일전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약 조합이 있다는 게 놀라워 의사에게 “와우, 약의 세계란 정말 무궁무진하군요!”라고 했더니 그는 “아니요,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지금이 플랜 E, F 정도 됩니다”라고 했다. 나는 끝이 궁금했지만 결국 플랜 Z를 보지도, 마음이 평온해지는 경지에도 이르지 못했다.
새 주치의는 첫 진료 때 ‘완벽한 사람’의 근황을 물었다. 다른 사람 탓을 하고 다닌다는데요? 그러자 의사는 마치 그를 보듯 나를 흘겨보았다. 뭐 그런 나쁜 사람이 있냐며. 외과의 대하듯, 내 증상이나 잘 파악하고 처치나 해주쇼, 딱 이만큼의 기대치를 갖고 병원에 갔던 나는 적이 당황했다. 아니 공감과 지지는 상담사한테나 가야 얻는 것 아니었어? 의사가 이렇게 막 환자 편파적이어도 되는 거야? 그 전 의사가 (예민한 사람이 아니면 눈치채지 못했을) 약간의 콧방귀와 함께 ‘그런 서비스는 제공하지 않습니다’ 했던 장면이 뇌리에 깊이 박힌 것처럼 지금의 의사가 눈을 흘긴 그 순간 역시 깊이 각인되었다. 속 깊은 얘길 하고 싶지 않아 일부러 상담센터가 아닌 정신과에 갔던 건데 이렇게 훅 들어와서 무장해제를 시켜버릴 줄이야.
상담을 끝낸 의사는 이전에 먹던 것과는 조금 다른 조합의 약을 처방했다. 꼴랑 세 알, 아침 약까지 해도 네 알. 약은 서서히 줄여야 하는 게 맞지만 너는 이미 1주일 동안 약을 끊은 상태이니 이참에 그냥 확 줄여보자고 했다. 전보다 약 개수가 줄어든 게 일단 마음에 들었다. 이전에는 1회분의 색색깔 약으로 무지개를 그릴 수도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게 이제 한 달쯤 되어가나 보다.
그런데 가만 보니 요즘 텔레비전을 보며 웃는 횟수가 늘었다. 예전엔 하나도 재미없었던 예능 장면에서 나도 출연자들처럼 낄낄대고 있다는 데 종종 놀란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웠던 깨달음은 아, 남들은 대개 이런 기분으로 이렇게 살고 있었던 거야...? 이십 평생 삼겹살을 먹지 않다가 군대 휴가 나와서 처음 먹어보고 이 맛있는 걸 지금까지 니들만 먹고 있었던 거냐며 식당 안의 손님들을 흘겨봤다는 성석제의 심정을 알 것 같다. 인생을 반 넘게 살고서야 새로운 세상을 약간 엿본 기분. 이게 약발 때문인지 의사에 대한 신뢰 때문인지 다른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나 역시 그 세계에 속해 있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나도 삼겹살을 한 번 먹어보았다는 걸,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다. 아, 그리고 나는 여전히 화가 날 때는 화를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