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년 간 각기 다른 질환으로 여러 차례 전신마취 수술을 받았다. 팔뚝에 나란히 나란히 도열해 있는 주삿바늘 자국들을 보면서 피부에 난 상처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결코 ‘원래 없었던 것처럼’ 돌아가지는 않는다는 걸 상기한다. 마음의 상처도 그렇겠지. 새로운 주치의는 잊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의해 더 이상 휘둘리지 않을 때가 치료를 마치는 날이라 했다.
가장 최근의 수술은 3년 전 가을이었는데,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수술 전날 단골(?) 대학병원에 입원했다. 대개 입원한 날 밤부터 수액이 들어갔던 것 같은데 이번엔 저녁밥도 주고(병원밥을 맛있어하는 신기한 입맛) 주삿바늘도 안 꽂고, 혈압이며 체온을 재러 와 선잠을 깨우는 간호사도 없어서 독방에서 나이롱 환자 같은 하룻밤을 보냈다.
또 잠깐 돌아가자면 (옛날 친구 하나는 언젠가 내 얘기는 반죽이 흘러넘친 붕어빵 같다고 했다. 흘러넘치는 바람에 붕어빵 가장자리에 굳은 과자가 두루뭉술 붙어 있지만 그게 붕어빵이라는 걸 알아볼 수는 있다나) 내 수술은 대개 장기 입원을 요하는 것은 아니어서 나는 입원할 때마다 1인실에 묵는다. (그러면서도 3박 4일 입원비는 4일치가 아니라 3일치를 낸다는 걸 얼마 전에야 알았다. 어쩐지 매번 생각보다 싸더라;) 대학병원 1인실, 그것도 내 단골 병원의 1박 가격은 상당한 금액이지만 그냥 여행 가서 좋은 호텔에 며칠 묵는다고 생각한다. 안 그래도 아픈데 남들과 함께 있으면서 스트레스 받느니 결과적으로는 이게 더 싸게 먹히는 거라고. 정작 여행 다닐 때는 숙소에 돈을 많이 안 쓰는 편이니 어쨌거나 대충 균형은 맞는 거라고 말이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수술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에 ‘잠깐’ 올라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왔니? 자, 수술하자! 어, 수술 잘 됐네. 이제 집에 가서 회복해라, 안녕. 땡. 돈을 많이 벌 생각도 자신도 없으니 부디 앞으로 병원에 장기 입원할 일은 없어야 할 텐데.
6시가 좀 넘었나 7시가 넘었나, 이른 아침에 간호사가 드디어 수액을 들고 왔다. 전날과 다른 간호사인 걸 보니 아무튼 아침 교대시간이 지나서였다. 수술과 그 이후 처치를 위한 혈관 확보를 위해서라도 어쨌거나 팔에 줄은 하나 달아야 하는 것이다. 헌혈 바늘보다는 가늘지만 일회용보다는 굵은 주삿바늘이다. 개인병원에서 피를 뽑을 때마다 듣는 얘기가 혈관이 가늘다(=바늘 꽂기 어렵다)는 것이어서 가끔 혈관을 드러내려고 애꿎은 손목을 난타 당하거나 있는 힘껏 주먹을 쥐어야 하는데, 그러고도 여러 번 찔리는 일이 종종 발생하는데 종합병원에서는 그런 일이 거의 없다. 혈관에 대한 얘길 아예 안 들어본 건 아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들은 능숙하게 핏줄을 한 번에 포착해 굵은 바늘을 꽂아 넣는다. 볼 때마다 경이롭다.
그런데 그날 아침의 간호사는 바늘을 잘못 꽂았다. 당황하고 미안해하는 그에게 나도 모르게 말했다. “괜찮아요. 너무 일찍 출근해서 그래요.” 어쩌다 그런 말이 나왔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마음 속 어딘가에 24시간 불이 켜져 있는 nurses station, 우리말로 뭐라는지 모르겠다, 간호사 스테이션? (이게 '우리말'이긴 한가?) 아무튼 그에 대한 각인이 있었던 건지. 같은 직장인으로서 새벽 같이 출근해야 하는 그 젊은이에게 나도 모를 안쓰러움이 있었던 건지.
작정하지 않았던 말에 대한 그의 반응을 아직 기억한다. 찰나의 침묵 후에 그는 말했다. 자신들의 입장을 헤아려 준 환자는 처음이라고. 그 말을 하는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요즘처럼 일찍 일어나는 날에는 가끔 얼굴도 이름도 기억 나지 않는 그 간호사 생각이 난다. 새로 채용된 간호사의 절반은 관둔다는데 그는 아직 거기 있을까. 그리고 내 수술을 집도한 의사들의 이름은 모두 기억하고 있는데, 의사보다 더 자주 만났던 간호사들의 이름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놀라고 부끄러워진다.
코로나 사태가 장기간 지속되면서 간호사들이 더 이상은 못 버티겠다고 눈물로 호소하는 뉴스를 보며 또 그의 생각을 했다. 여간해서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24시간을 지키며 육체노동과 정신노동, 감정노동을 병행하는 사람들. 인터뷰한 간호사는 자신들에게 고맙다고 하지 말고 밖에다 그들의 처우 개선해야 한다, 밥 먹여야 한다 호소해 달라고 했다. 부디 그들에게 정당한 대가와 휴식이 주어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