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줄기 볶음. 엄마 밑에서 자랄 때는 여름에 종종 먹었던 음식인데 (물론 그를 위해서는 상당한 양의 껍질을 까야 했다. 그래봤자 엄마의 속도에는 못 미쳤지만.) 커서는 먹기가 힘들다. 아주 가끔 엄마가 볶아서 부쳐줬던가 말았던가. 쉬이 상하는 반찬이라는 기억 정도.
한 보름 전부터 갑자기 고구마줄기 볶음이 먹고 싶어졌다. 다행히 가끔 강렬하게 먹고 싶어지는 음식은 소박한 것들이다. 고구마줄기 볶음은 해본 적이 없지만 ‘볶음’이 뭐 그렇게 어려운 음식이던가. 대차게 고구마줄기 4킬로를 주문했다. 2킬로가 아닌 4킬로인 까닭은, 2킬로보다 단가가 몇천 원 쌌으며, 잎을 제외한 실중량은 얼마 안 될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실 나는 무게와 양에 대한 감이 별로 없다. (...)
며칠 뒤, 예상보다 거대한 스티로폼 상자가 도착한 것을 보고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음, 저걸 지금 열어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시중에서 파는 고구마줄기에는 청대와 홍대가 있다. 청대는 우리가 알고 있는 고구마줄기 색이고 홍대는 껍질이 자색이다. 벗기면 청대와 똑같은 색이 나온다. 하필 홍대를 산 것이 첫 번째 패착이었다. 고구마줄기 껍질을 벗겨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특히 이파리 바로 아래 u자처럼 옴폭 패인 부분이 있다는 걸. 청대는 껍질과 속대의 색이 같아서 대충 두어 번 벗겨내면 손질이 끝났다. 그러나 홍대는 안 벗긴 부분의 색깔이 너무 튀어서, 그런 사소한 데 집착하는 나는 과도까지 써가며 기를 쓰고 긁어냈다. 그래도 완벽히 제거하진 못했다. (지금 찾아보니 홍대는 껍질을 안 벗겨도 된다고도 하는데 이미 다 벗겨놔서 그 맛이 어떨지는 나도 모른다.)
집의 식탁도 문제. 홍대 껍질의 안토시아닌은 식탁 곳곳에 파란 물방울을 흩뿌려대었고 그게 하얀 식탁에 착색될까 싶어 그때 그때 닦아내느라 손질 시간은 한없이 늘어졌다.
그리고 당연히 가장 큰 패착은 4킬로나 되는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고구마껍질을 벗기며 정신수양을 하겠노라 큰소리치던 나는 열 줄기나 벗겼을까, 이번 생에 득도는 글렀다는 사실을 애저녁에 깨달았다. 왜 고구마줄기의 껍질은 벗겨야만 하는가, 심오한 화두를 얻기는 했지만. 음식물쓰레기도 줄일 겸 이파리까지 나물도 해 먹고 장아찌도 담그겠다는 결심을 버린 것도 그 때쯤이었다.
세 시간 넘게 꼬박 매달렸으나 잘 시간이 될 때까지 손에 쥔 고구마줄기는 몇 대 되지 않았다. 고구마줄기는 바로 손질해야 하는 재료라 저렇게 계속 두면 안 되고, 잘 시간은 다가왔고, 고민 끝에 이파리만 뎅강 잘라내고 남은 대를 10리터짜리 곰솥에 꽃꽂이하듯 꽂았다. 줄기 끝이 말라서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더는 무리였다. 요새 안 좋은 허리도 계속 아우성이었고. 곰솥이 빽빽해졌다;;;
첫날 벗긴 줄기는 그래도 프라이팬을 가득 채울 만큼은 됐는데도 한 끼에 다 털어 넣었다. 시골에서 부쳐온 마늘과 들깨라는 최고급 부재료를 아낌 없이 넣었으니 맛이 없을 리 없다. 아아 음식을 하는 건 어려운데 먹는 건 왜 이리 쉬운지. (내가 식당에서 조리사나 차림사들에게 꼬박꼬박 인사하는 이유가 다 있다.) 다음 날 먹을 줄기를 까며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산다는 게 이런 건가 하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남은 줄기를 째리며 저걸 당근에 올려야 하나 하는 생각도.
대전을 마치기까지 2박 3일이 걸렸다. 다행히 대부분의 고구마줄기는 아주 마르거나 물러지지 않고 내가 손질을 마칠 때까지 버텨 주었다. 모든 것이 정리된 후 내게 남은 것은 요통과 피로, 다섯 덩이의 데친 고구마줄기. 승리한 기념으로 고구마줄기를 잔뜩 넣은 된장찌개를 끓여 오랜만에 아침으로 밥을 먹었다. 이런 호사라니. 내년에도 고구마줄기는 사야겠다. 단, 청대로.
아 그리고, 고구마순에서는 고구마 냄새가 난다는 당연한 사실을 이번 사태를 통해서야 알았다. 내 감각이 예민하다는 건 다 거짓부렁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