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을 바꿔서인지 새로운 의사에 대한 신뢰가 커져서인지 스트레스 요인이 하나 줄어서인지 잠을 조금 더 잘 수 있게 되었다. 그래봤자 서너 시간에서 대여섯 시간으로 바뀐 거지만 지금으로선 이마저도 감지덕지.
병원을 다니면서 수면장애에는 쉽게 잠들지 못하는 불면증뿐 아니라 너무 일찍 깨는 것, 수면의 질이 떨어지는 것 등등이 모두 포함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대개 자리에 누우면 10분 내 잠이 드는 나는 (당연하지. 졸리기 전까지 끊임없이 뭔가를 하니까.) 입면 시간보다는 수면의 질과 지속 시간에 문제가 있었다. 나이 들어도 커피를 줄이지 않아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그래서 커피는 아침에만 마시는 걸로 한정했는데도 새벽에 깨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전 병원의 의사는 항우울제와 항불안제를 여러 가지로 조합해서 내 수면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는데, 그러던 그도 수면제인 졸피뎀을 처방했던 때가 있었다. 아마 진료 초기에 몇 주, 작년에 또 몇 주 정도였던 것 같은데, 진료 초기에는 상태가 좋지 않아 무슨 약이 처방되었는지 알 바 아니었지만 그 다음에 처방 받았을 때는 아, 이게 졸피뎀이라는 걸 알았다. (이전 글에도 썼듯이 의사는 약의 종류와 효능, 부작용에 대해서만 얘기해 주고 정확히 무슨 약인지는 말해주지 않았었다.) 그리고 그가 다음 진료에서 지난 2주간 어떻게 지냈는지 물었을 때 내가 처음 한 말은 “아유, 졸피뎀은 졸피뎀이더라구요”였다.
정말 졸피뎀은 졸피뎀이다. 약효 지속 시간이 짧아서 수면 유지에는 크게 도움 되지 않지만 거짓말처럼 대개 30분 이내에 잠이 들게 해준다. (와와, 진한 커피를 마음껏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알려진 대로 중독성 문제가 있어서 길게 먹을 약은 못 된다. 몇 주가 지나자 약을 먹고 금방 잠드는 건 좋았지만 이걸 이렇게 계속 먹어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굉장히 희한한, 양가적인 감정이었는데 한편으로는 내 잠은 약이 재워준다는 데서 오는 자신감? 같은 게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다가 약 안 먹으면 못 자게 되는 거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동시에 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너무 일찍 깨는 것은 여전했고, 그건 졸피뎀과는 상관 없는 것이었다. 그 얘길 했더니 의사는 어차피 졸피뎀은 장기간 처방할 약은 못 되니 대체 약으로 바꾸어 주겠다고 했다. 대신 졸피뎀을 따로 싸주면서 정 잠들기 어려울 때 먹으라고 했다.
다음 진료에서 졸피뎀은 며칠이나 먹었냐고 묻는 그에게 말했다.
“한 번요. 엊그제인가 새벽 한 시까지 잠이 안 왔는데도 잠들 기미가 없어서 그 때 한 알 먹었습니다.” (실은 그 때도 먹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기껏 처방해 줬는데 한 알도 안 먹으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먹었...)
의사는 적이 놀란 눈치였다. 몇 주 간 졸피뎀을 먹어오던 인간이 저렇게 한순간에 끊어버릴 수 있나, 그런 생각을 한 걸까. 왜 한 번밖에 안 먹었냐는 그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사람들이 식당에서요, (얘가 왜 갑자기 식당 얘기를? 하는 눈빛) 찌개에 이미 조미료가 들어 있으면 그런가 보다 하고 먹지만 식탁에 조미료 병을 두고 ‘원하면 넣어 드세요’라고 하면 대부분이 넣지 않고 먹는 것과 같은 이치죠.”
휘유, 다행히 의사는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중독성 있는 뭔가를 끊는 것이 어렵다고 느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담배를 끊을 때도 이것까지만 피우고 말아야지 하고 그 이후로 10년 가까이 금연 중이다. 아주 아주 열이 받았을 때 담배 생각이 전혀 안 나는 건 아니지만 그건 담배를 원해서라기보다 잠깐의 브레이크가 필요해서다. (그리고 그럴 때는 흡연자를 꼬셔서 간접흡연을 한다. 이봐 이봐 친구, 바람이 부는 쪽에 서서 피우라구.) 가끔 꿈에서 담배를 피우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걸 보면 아직 의식의 저 밑바닥에서는 니코틴을 공급하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니코틴 패치도, 정신을 다른 데 돌릴 수 있는 손운동 기구도(금연 클리닉 가면 준다 카더라) 다른 간식도 필요 없이 그냥, 끊었다. (금연이 가장 쉬웠어요;)
술도 마찬가지. 사실 술은 내가 끊었다기보다 술이 나를 끊은 것에 가까운데, 젊었던 시절, 몸이 계속 이상 신호를 보내고 있는데도 무시하고 거의 이틀에 한 번꼴로 술을 마셨다. (매일이 아니었던 건, 한 번 마시고 나면 다음 날 너무 아파서 마시고 싶어도 마실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또 어느 날 갑자기, 이제 술을 그만 마실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2~3년 간 나는 단 한 방울의 술도 마시지 않았다. 그게 한... 20년쯤 전의 일이다. 그 후로는 컨디션이 아주 괜찮을 때만 맥주 한 잔, 와인 한 잔, 아니면 막걸리 한 잔 정도 마셨는데 요즘은 그마저도 옛날 일이 되었다. 술도 담배처럼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나는 알코올보다는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켤 때의 그 시원한 기분, 데킬라를 한입에 털어 넣을 때의 그 찌르르함이 그리운 것이다. 그리고 아쉽지만 그건 다음 생에서나.
이쯤 되고 보니 아무래도 중독에는 적합하지 않은 몸이 따로 있는 걸까, 문득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