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포에 있는 스페이스 이수에 다녀왔다.
이수그룹의 사옥 1층을 전시장으로 꾸민 곳이다. 이전에는 김범의 점토로 만든 차가운 통닭 조각, 서도호의 실제 입었던 유니폼(교복, 군복)으로 인물의 생애사를 짐작하게 하는 자화상 연작이 있었고, 그 더 이전에는 안규철 작가의 공간의 장소성을 문으로 탐구하는 작품이 있었다.
이번에는 특수복과 폐기물의 자원순환이라는 주제로 만든 작품군 네 가지가 눈에 띈다. 패션섬유의 최전선에서 불량 에어백을 재활용한 디자인작품, 폐기 군용소재로 만든 업사이클링 군복, 파라 아라미드 섬유(헤라크론)으로 만드는 방탄 및 보호복, 의료 폐기물으로 만든 의료복.
전시장에 놓인 것들은 대체로 말이 없다. 군용 섬유, 해체된 폐기 에어백, 식물성 섬유와 버섯 균사, 조각난 섬유조각은 누가 봐도 쓸모를 다한 물건이다. 그러니까 보통은 잊혀져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혹은 수상하게도 이 장소에 함께 모여있는 이 섬유작품들은 하나같이 뭔가를 되뇌이는 듯하다. 어쩌면 내 착각일 수도 있고, 어쩌면 맞고 어쩌면 아니고...
근대는 언제나 완결을 꿈꿨지만 역사는 파편에서 말을 시작한다.



텐트 재활용 밀리터리룩은 근대적 신체와 생명정치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작동해온 감각적 통제 장치이다. 섬유조각보라는 물성이나 패션의 미학에 그 의미가 그치지 않고, 규율의 표면이며 통제된 몸의 껍질이자 국가 권력의 미시적 구현물까지 외연이 확장된다.
전시장은 기능을 상실한 패션소재를 업사이클링했다는 데만 포인트가 있지 않고, 장소에 묻은 기억, 시간과 함께 묵은 감정, 사회적 흔적의 운용과 생의 응결 등 사물의 비가시적 내면을 재질 표면 위로 호출한다. 재소환하고 재구성하는 것은 회빙환적인 리셋이 아니라 감각과 윤리의 복원이다.
보는 일은 언제나 위험하다. 보는 순간, 우리는 어떤 해석의 길로 스르륵 끌려들어가고 만다. 이 전시는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어온 섬유들을 다시 보게끔 하고, 재배치를 통해 우리에게 본 적 없는 것들을 보여주게 만든다.
예컨대 군복은 언제나 다른 몸을 향한 명령이다. 제복을 입는 순간, 그 몸은 국가의 지시를 수행한다. 하지만 해체된 군복은 그런 권위를 박탈당한 채 펼쳐져 있다. 마치 유예된 육체나 정체불명의 기호처럼. 관객은 그 직물의 접힌 선들을 따라가며 질문한다. 어떤 신체가 이 옷(들)을 입었었는가? 누구를 보호하고 누구를 위협했는가? 그 질문이 곧 이미지의 정치과 진배없다.
또한 군복은 계급의 코드로 짜여졌지만 그 코드가 해체될 때 비로소 몸의 진실이 비친다. 정치의 스펙터클이 아니다. 되려 피로에 절절이 절은 살갗의 기호들이자 주머니 속 땀의 자국이다. 이때 단추의 빠진 어긋남 같은 사소한 변화가 모여 권력을 탈색시킨다. 소리 없는 사유의 조각이라함직하다.
에어백은 삶을 보호하는 장치이면서 동시에 두려움의 상징이다. 전시장의 에어백은 빵빵하게 부풀어 오를 일 없다. 납작하고 주름지고 시간을 안은 채 출동할 일 없이 영원히 침묵한다. 그 모습은 꼭 생명을 지키고도 상처받은 손처럼 보인다.
그 감정은 복잡하다. 지켜냈지만 완전히 지켜내진 못했다는 자책 같은 느낌이다.
그 에어백은 공기라는 이름의 새어나가는 환영을 품고있다. 에어백은 살아 있다는 착각을 부풀리고 죽음과의 간극을 영점 몇 초 차이로 결정한다. 전시는 그 보호의 신화를 벗긴다. 주름진 에어백은 성긴 박막이 되며, 거기엔 구멍이 있고 그 구멍을 통해 말이 샌다. "나는 늦었다" "나는 터지지 못했다" 같은 이런 나직한 중얼거림
버섯 균사를 모티브로 한 식물성 섬유는 나뭇잎이 속삭이듯이 소근소근 거린다. 식물은 기억을 저장하지 않는다. 대신 시간에 노출된다. 우리가 인식하기 전에 실존했으며 우리가 만지기 전에도 이미 삶을 살아냈고 그러다 아기자기한 형태에서 부드럽고 빠르게 소멸해버린다. 그 조용한 시간감은 시만큼 명징하다. 보는 일은 부서짐을 응시하는 것일지도.
식물성 섬유는 흙에서 나와 흙과 접속하면서도 흙을 닮지 않으려 한다. 식물은 흙의 기억을 옮기되 인간의 손이 닿는 순간 새로운 구성물로 탄생한다.
흙을 거부하는 긴장 위에 물질의 존재론이 시작된다. 생태학이 아니라 섬유의 자기반역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나는 그것을 마지막 촉각의 미학이라 부르고 싶다.
그러나 전시장의 섬유가 아니라 인간의 몸이야말로 가장 쉽게 잊혀지는 섬유인 것 같다. 대체불가능한 일회성 섬유. 그 위에 걸치는 모든 것은 외투다. 아담과 이브 이후로 계속 입어 온 문화의 외피다. 그러한 문화의 껍질은 인간의 몸을 감싸고 보호하고 드러내고 마침내 폐기되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은 인간보다 인간의 몸을 오래 더 많이 기억한다.
이 전시는 우리가 안다고 생각한 모든 물질에서 낯선 감각과 새로운 응시를 호출한다. 이는 사물의 타자성에 대한 헌사이자 우리가 감각하지 못한 감각을 상기시키는 시도다. 시끄럽지는 않다. 침묵하니 웅건하고 단호하다. 존재는 언제나 단아한 방식으로 말을 걸어오기 때문이다.
그룹 사옥의 전시장에 들어가자마자 크루엘라가 입었을 법한 하이퍼 롱스커트의 거대한 드레스가 관객을 맞는다. 군용텐트조각보라는 것을 일견 감각해낼 수 있을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