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친 포피코의 글이 스레드에 스쳐지나가는데 스크린에 비친 스친 사진에서 세 사진가가 문득 떠오른다.
피사체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정서적 긴장을 견지하는 사진 연작이 사후 조명되어 뒤늦게 큰 반향을 얻은 미국의 무명 여류 사진가 비비안 마이어와
프레임 속 복수의 시점을 병치하여 시선을 산란시키되 그 시각적 혼돈 속에서 구조적 리듬으로 시선의 질서를 회복하는 아메리칸 사회풍경의 채집자 리 프리드랜더와
극단적인 컨트라스트와 거친 입자감이 묻어나는 흑백표면을 통해 도시의 불안과 생기를 동시에 포착하는 오사카 출신 일러스트레이터-사진가 모리야마 다이도가
떠오른다.
셋 모두 구체적인 서사보다는 감각의 인상에 천착했고 거리를 천천히 걸으며 일상의 사물과 사람을 채록하며 도시의 파편을 시적으로 응시했다. 무엇보다 절제된 흑백의 음영을 통해 초점과 구도를 실험함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보는 행위 그 자체에 대해 화두를 낳는다는 공통분모가 있다. 하나의 사물을 여러 층위로 분절한 이미지로 무엇을 보는지 어떻게 담아냈는지에 대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질문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그러한 꼬꼬퀘는 물론 섬세한 시적 감응이 되는 이들에게만 의미있을 것이니, 이것은 핸드폰과 신발을 찍은 사진이야, A는 A이고 B는 B야로 생각의 흐름이 멎는 사람에게는 도통 의미가 없을 것이로다


원래 스레드 2번 사진(이후 원사진)은 1-2번 사진의 비비안 마이어의 관찰자적 시선을 닮았다. 그러나 마이어는 그림자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기도 그 형태 그대로 자기 얼굴을 찍기도 하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시각적으로 끊임없이 질문했다. 인물 연작도 많이 찍었다. 한편 원사진은 사람에게 마이어만큼 관심있지 않다. 오히려 마이어가 셔터 뒤에 숨은 채 사람과 도시 사이의 관계를 다양하게 실험했듯 스마트폰 뒤에 숨은 채 자아와 세계의 관계를 이모저모 궁리해보고 있다. 초점은 피사체의 정서보다는 빛의 궤적에 있다. 반사광에 의존해 주조된 포토는 중간 명도에 머무는 회색조다. 비비안 마이어의 자화상은 각도와 시점의 교체를 통해 정체성과의 긴장을 드러내곤 했는데 이와 달리 원사진은 인물의 윤곽이 배경에 손의 일부가 스며드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필름 카메라의 시대에 암실에서 명암과 채도를 실험한 마이어와 달리 스마트폰 카메라 일반 기능을 사용한 원 사진의 채도는 당연하게도 전체적으로 균등하다. 덕분에 시선은 색보다는 구조에 잔류한다. 인물과 배경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지점에서 오브제의 구분과 감정의 확인은 소거된다. 마이어처럼 인물이 살포시 드러나면서도 자신의 존재를 중심에 두지 않고 주변 공간과 빛의 변화에 더 민감했다는 점이 비슷하다. 뭘 더 잘 쓰고 싶은데 생각이 제대로 표현이 안되어 일단 여기까지만 쓴다.

리 프리드랜더의 사진은 여럿 있는데 하나만 가져왔다. 세 번째 사진. 중저채도의 색면 안에서 필라멘트 빛 덩어리 뒤에 숨어 얼굴의 내용은 지우고 윤곽만 드러낸채 다중 초점 구조를 취하는 사진이다. 프리드랜더는 유리창, 표지판, 거울을 이용해 시선을 겹겹이 배치해서 반사와 투과를 이용해 공간을 분절하곤 했는데 가져온 세 번째 사진은 대상 간의 공간적 분리보다는 동일한 심도 안에서의 병치를 선택한 사진이다. 그러니가 그를 유명하게 만든 사진 본체보다는 그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 싶었던 프리드랜더의 주된 특징을 잘 보여주는 덜 유명한 사진을 업로드한 것이다. 명도 대비는 낮은 편이고 사물의 외곽선은 빛에 의해 완전히 드러나지 않으며, 배경 하늘의 구름의 궤적과 해와 달의 부재가 아직 땅거미의 시각적 특징을 주지 않으면서도 시각적 침잠을 유도해 트와일라잇 즈음의 쇠퇴하고 소멸하고 어둠이 찾아오는 관조적 여운을 부여한다. 시선이 충돌하거나 불협화음을 내도록 하는 배치를 반사각으로 실험했던 프리드랜더의 주된 특징과는 달리, 이 세 번째 사진은 하나의 장면 안에 복수의 시선 포인트를 담고 있지만 프리드랜더 특유의 복잡성보다는 정적인 병렬 구조에 가깝다는 인상이다. 그런 병치와 병렬의 관점이 포피코의 원사진에서 드러나는 표현 의도와 동일하다.
그러나 마이어와 원사진은 다중초점과 관찰자적 시각은 동일하되 인물경향성에서 차이가 있고, 프리드랜더와 원사진은 병치와 병렬은 같되 불협화음이나 침잠과 관조라는 점에서는 다르다. 무엇보다 마이어와 프리드랜더에게서는 극단적 콘트라스트나 다양한 검은 이미지의 구성이 발견되지 않는 한편, 원사진의 반사되는 검은 구두의 표면질감과 빛의 부재로 인한 스마트폰 그림자 같은 여러 흑색의 교차가 뚜렷하다. 이는 모리야마 다이도의 사진연작과 비근하다.



4-6번 사진은 다이도의 전형인 고대비 흑백사진, 극적인 명도 스펙트럼이 있다. 암부의 깊이가 시각적 구조를 지탱한다. 다만 원사진쪽이 모리야마와는 달리 강한 채도 대신 톤 간의 완만한 전이를 추구한다. 핸드폰 그림자는 선명하되 위협적이지 않으며 음영은 다층적이고 조밀하지만 인공광원의 인위성이 배제되어 있다. 빛과 어둠의 간극은 명확하지만 감정적 해석은 유예된다. 거친 입자의 표면으로 불안한 나날의 휘영청함을 나타낸 모리야마, 한편 원사진의 에칭감있는 노후된 바닥은 그저 배경으로만 기능할 뿐이다. 밟는 바닥. 무엇보다 기괴한 이미지의 아상블라주와 노이즈와 흔들림을 통해 문명의 불안을 표현한 모리야마처럼 음습하지 않다. 흑암의 중심부를 겨냥해 찌르는듯한 블랙으로 도쿄의 광기를 찍은 모리야마의 거칠고 압축된 명암과 비슷한 대비 구조이나 검은색을 통한 감정적 톤앤매치만 비슷하여 외양은 같되 의도한 바가 다르다는 말이다.
포피코의 사진은 비비안 마이어, 리 프리드랜더, 모리야마 다이도의 사진 계보를 일부 터치하면서 세 명의 차이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시선을 오물조물 빚어낸다. 뭔가 더 잘 쓰고 생각을 표현하고 싶은데 필력이 딸린다. 그러니까 이 사진의 소구력은 찍는 자의 존재감을 중심에서 지워낸 채 찍히는 대상의 빛과 구조가 교차하는 지점을 응시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인물은 배경 속에 스며들고 사진가는 나를 찍는 나, 내가 찍은 것, 내가 찍은 화면을 보는 너, 그리고 내가 진짜로 본 것에 대한 성찰적 질문이 스크린에 시각화된다. 다중초점, 거리의 관찰자적 시선과 함께 평면 속에 병렬적으로 정리된 명료한 레이어의 심도가 있고, 이에 다채롭고 짙은 블랙이 생성한 음영의 형체가 화면의 리듬을 조용히 지배한다. 그리고 마이어와는 달리 인물에 대한 관심이 적고, 프리드랜더와 달리 시각적 충돌이 배제되어 있으며, 모리야마와 달리 광기나 불안은 없다. 원사진 속 찍는 자의 존재는 보는 자를 위해 자리를 양보하고, 원사진 속 레이어의 병치에는 침잠하는 회한의 덩어리가 없으며, 사진 속 오픈 스페이스에서 찍되 어둠은 치안이 부재한 도시거리의 위협이 아니라 사유와 성찰을 위한 실내 공간이다. 세 작가의 시선이 한 장의 프레임 안에서 겹쳐지지만 그 접점은 어느 누구의 정밀한 재현이 아닌 자신만의 주체적 창조물인 셈이다. 나라는 지각 주체의 흔들리는 감각은 곧, 보는 행위 자체에 대한 메타포이며 누군가를 찍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비추는 어두운 거울이리라
사진이라는 것은 결국 관찰이라는 행위의 잔류물이다. 혹은 부유물이다. 그러나 예술적 사진은 구질구질한 정념이 제거된 관찰이며 채도, 명도, 음영 등 빛의 존재와 부재를 컨트롤해 동시에 감정을 조절한다. 사진은 말하지 않는다. 어떤 사진도 말하지 않는다. 단지 보는 자를 향해 동등하게 바라볼 뿐이며 그러한 침묵의 대화를 던지는 사진이 이미지의 진짜 목소리다.
사진출처
https://www.dostreetphotography.com/blog/vivian-maier
https://fraenkelgallery.com/portfolios/lee-friedlander-self-portraits#lee-friedlander-self-portraits_s-5
https://loeildelaphotographie.com/en/daido-moriyama-a-diary-pp/
https://www.polkagalerie.com/en/news-daido-moriyama-a-diary-exhibition-at-fondation-foto-colectania-barcelona..htm
https://bldmiraishokuhin.jp/user_data/t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