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론뮤익전에서 왜 우리는 감동을 느끼는가?
명상적이고 성찰적인 색면추상 회화로 가득했던 이강소전이 자기 독백적인 모노톤 소설이라면
론뮤익전은 다층적 시각을 보여주는 연출방식이기에 관객들은 정확히 표현할 수는 없어도 무언가 다르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 같은 사소설이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자기독백적 내레이션, 멀리 나아가서는 수학자 이윤하가 쓴 <나인 폭스 갬빗>처럼 마치 한 캐릭터의 보이스톤으로만 점철되어 있는 듯한 분위기가 있다.
비슷한 색감, 비슷한 작품의 크기, 위치와 동일한 시선높이 등. 한 테마에 몰입하기에는 좋지만 다채롭다고 느껴지는 않는다. 색감이 아니라 관객경험이라는 측면에서. 그래서 다양한 레이어와 타이밍과 표현방식을 구사하는 이머시브 전시가 각광을 받는다.
그런데 디지털 스크린으로 연희문화적 한국인의 오감을 자극하는 이머시브 전시가 아닌데도 론 뮤익전의 티켓은 낙양의 지가를 올리고 있다. 무엇이 사람들을 환호하게 하는가? 다양한 관객경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동선과 시선적인 측면에서도, 메시지 측면에서도 다양한 해석을 낳는 다층적 구조를 띠고 있다.
론 뮤익전에서 사람들은 걸리버 여행기의 릴리풋 소인의 시점으로 보았다가(누워있는 거대한 여인)
다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되어 토끼굴 속으로, 즉 6전시실 계단 지하로 들어간다

우리가 이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과 소인국 릴리풋 인간들이 걸리버를 바라보는 시선이 같다.


앨리스가 토끼를 따라 새로운 세계로 가듯 관객도 국립현대미술관 6전시실 지하계단으로 홀리듯 내려간다. 6전시실까지 안 가고 집에 가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앨리스 사진 출처 : https://www.lookandlearn.com/history-images/A008091/Alice-in-Wonderland-by-Lewis-Carroll
그 토끼굴에는 두 개 합쳐 1시간 분량 론 뮤익의 작업영상을 상영하고 있다.
영상에서는 마치 루시안 프로이드가 살점을 그리는 것처럼 점토로 얼굴살을 제대로 표현하기위해 이리저리 시도하는 모습이 나온다.


Lucian Freud 사진 출처 : https://www.wikiart.org/en/lucian-freud

작품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관객들의 시선도, 저 멀리 바다 끝을 응시하는 나룻배 위 알몸의 남자도, 관객과 독대하는 거대한 론 뮤익의 자화두상도 모두 카라바죠가 그린 도마의 불신에서처럼 보기 전에는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그득하다.

전시를 오기 전 SNS를 보는 우리의 표정도, 전시에 와서 짓는 우리의 표정도, 조각의 표정도
모두 예수의 부활을 믿기 힘들어하는 도마의 표정을 닮았다.
카라바죠, 도마의 불신 incredulity of Thomas, 1602
사진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The_Incredulity_of_Saint_Thomas_(Caravaggio)
유럽회화에서 해골의 의미는 선명하다. 마지막 전시장에서, 이름 모를 죽음이 있었을 법한 옛 보안사 건물터에 지어진 국립현대미술관의 같은 공간에서 7m 높이에서부터 굴러 떨어지는 거대한 해골 더미와 함께 전시를 끝맺는다.
일견 론 뮤익전은 침착하고 차분하다. 그의 수도승과 같은 작업루틴과 완성되어 놓여진 정적 조각은 말을 건내지 않는다. 그러나 전시에서는 온갖 다층적 보이스가 난무한다.
라블레의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처럼 독자의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다층적인 구조를 통해 풍자와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드러내고 있다. 관객이 표면적인 이야기와 더 깊은 의미를 모두 파악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어디에 그런 사회적 풍자가 있냐고? 소녀의 손을 뒤에서 꽉 쥔 소년조각이나 자신에게 존재를 완전히 의탁한 베이비를 품에 안은채 무력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엄마의 얼굴에서 문화적, 철학적 함의와 사회경제적 조건을 읽어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뒷모습 디테일

Ron Mueck. Young Couple, 2013. Mixed media, 89 x 43 x 23 cm. Private collection. Courtesy: Hauser & Wirth. Photograph: Isabella Matheus.

Ron Mueck. Woman with Shopping, 2013. Mixed media, 113 x 46 x 30 cm. Collection: Fondation Cartier pour l’art Contemporain, Paris. Photograph: Isabella Matheus.
바흐찐의 말마따나 작품 속에서 다양한 인물들의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목소리가 서로 충돌하고 얽히는 다층성(다성성 폴리포니)이 읽힌다. 작품의 사이즈도 그렇고, 사이즈에 따라 상대적으로 변형되는 관객의 시선과 위치도 그렇고, 지하굴로 들어갔다가 죽음을 만나는 동선도 그렇고, 작품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그렇다. 그렇게 층층이 쌓인 여러 보이스가 상상력을 자극해 고작 30여 남짓 적은 수의 그냥 사람 조각일 뿐인데도 우리로 하여금 신기진기한 묘한 경험, 걸리버와 앨리스와 카라바죠와 루시안을 한꺼번에 모듬세트로 경험하게 하는 효과를 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