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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 미술관에서 외국어 공부하기
<공간루트> 메테즈
글을매일씁니다  2025/04/26 18:51


얼마 전 공간루트에 다녀왔다


6호선 끝동 순환고리 연신내역에 있는 곳이다. 간 김에 사비나미술관을 방문해도 좋고 조금 더 멀리는 은평한옥마을 삼각산 금암미술관과 동선연계성이 나쁘지 않다


10여년 운영한 합정지구도 사라지고 혜화역 아르코에서는 인미공 폐관전을 하고 있다. 막 태동하고 있는 영아티스트들이 접근가능한 독립전시공간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솔루션은 재벌그룹이나 투자회사의 지원을 받거나 국공립기관의 프로그램에 지원하는 것이지만 그마저도 지원자의 학력 경력 인플레로 인해 쉽지 않다. 탈출구는 정녕 지방공방이나 까페란 말인가. 롤모델과 트렌드를 모방하면서 이런 스타일 저런 스타일해보고 내가 누군지 내가 무엇을 잘하며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남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아볼 놀이터가 필요하다. 물론 같은 면적의 공간에 프랜차이즈나 디저트가게를 입점시키면 더 생산성이 올라간다는 것을 아는 전시운영자 입장에서 상승하는 임대료를 방어하는 나날 속 고민은 한결 깊어진다


공간루트에서는 메테즈 작가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었다


무수히 포개진 붓의 결과 올올이 살아 있는 색의 숨결이 정적인 풍경 위에 한 폭의 숨쉬는 윤슬을 빚는다. 파도의 선형을 따라 손끝에서 뻗어나간 물질은 단지 평면을 메우는 것이 아니라 너울너울 이는 곁의 겹으로 살아나 온새미로 만져질 듯 솟구친다. 마티에르감을 부여하며 층층이 쌓인 붉고 푸른 빛깔은 바다 속 감춰진 세계처럼 깊고 짙고 무거워 정적이 아닌 고동치는 맥박으로 관람자의 감각을 두드린다. 거듭 칠해진 흔적 틈새로 포말이 사부작사부작 부서지고 다시 일어 눈앞의 장면이 마치 해조에 감긴 기억처럼 선연하고 낯설다


회화는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부유하는 마음의 결을 그리는 것. 사실의 재현이 아닌 심상의 전달이다. 바람결처럼 미묘하게 흔들리는 선과 덩어리는 생명의 울림으로 되살아나 낯익은 풍경을 낯설게 바라보게 하며 꿈결처럼 흔들리며 내려앉은 심해의 고요 속에는 천천히 잠겨드는 듯한 감각의 겹이 숨어 있다.


물질의 회화적 전개는 비단 표면에 국한되지 않는다. 외려 물성의 내부로 파고드는 감각적 층위의 외적 확장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빌둥스로만형, 자기 세계를 빚고 있는 구축적 회화는 지각적 환영과 촉각적 실재 사이에서 경계를 허물어 회화가 공간을 점유하는 방식에 대한 새로운 미학적 사유를 요구한다. 완성된 무기물의 페인팅 위로 색채와 질감의 밀도가 마치 미생물마냥 유기적 존재처럼 호흡하여 시간의 침윤과 감정의 퇴적을 동시에 드러낸다. 낯익으나 아스라이 생경한 ㄱ달빛노을 속에서 관람자는 어느덧 물감의 심해로 잠겨든다


니콜라 드 스탈이나 장 포트리에 같은 작가들이 구현했던 마티에르의 회화적 육화와도 궤를 같이한다. 질료는 단순한 물감의 잔존물이 아니며 감각과 사유가 만나 생성된 심상의 표면이리니. 질 들뢰즈의 입을 빌려 말하자면 회화는 감각의 절단면을 도려내어 시간의 지층을 드러내는 행위인 셈이다. 이 회화는 그러한 감각의 층위를 촘촘히 쌓아 올린 시간의 퇴적물이다. 이러한물감의 부피를 강조하는 회화는 단지 시각을 넘어서 촉감과 내면의 심상까지 이끌어내므로 회화가 공간을 운용하는 접근방식에 관해 전면적인 재사유가 필요하다.


파도의 벡터방향을 따라 스트로크를 움직이되 결코 동일한 느낌으로 몰아치지 않는 붓의 쓸림으로 층층이 초롱초롱한 빛의 덩어리들를 매만졌다. 마치 물마루가 출렁이듯 일렁이는 가운데 너울너울 이는 붓의 흐름이 파도처럼 끊임없이 몰아치고 있으니.. 평면은 더 이상 평평하지 않다. 새록새록 만져지는 듯 촉감어린 질량감은 빛과 어둠, 깊이와 얕음을 품고 생명처럼 숨 쉰다. 한 점의 붓질이 바람결처럼, 혹은 파문처럼 퍼져 나가노니, 지각이전의 침잠이며 형태는 드러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생겨나는 것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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