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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이드리언 브로디(Adrien Brody)는 The Pianist에 이어 홀로코스트를 다룬 연대기적 영화에 나왔다. 적절한 캐스팅이다. 


2. 중간에 인터미션이 있는 영화는 비비안 리Vivien Leigh가 스칼렛 오하라Scarlett O'Hara로 분했던 1939년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였다. 중간 휴식이 있는지도 모르고 갔는데 러닝타임이 3시간 48분에 달하니 필요했을 것 같다. 긴 영화라 하면 예를 들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Offret, 1986)가 러닝타임 2시간 29분이고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는 4시간 2분이다. 그런데 둘 다 별로 긴지 모르고 봤었는데 오히려 인터미션이 있으니까 길다고 느껴진다. 한 호흡에 쭉 끝까지 가느냐 아니냐의 문제인듯하다. 요즘 관객들은 OTT의 보급으로 인해 드라마 정주행하는 경우가 많아 6시간이고 앉아서 보지만 1시간마다 끊고 화장실에 갈 수 있으니 다음화 버튼 클릭하는 자체가 1시간 인터미션이라 볼 수도 있겠다.


3. 많은 사람들이 너무 지루하다고 느낄 수도 있고, 너무 적나라하다고 느낄 수도 있고, 편집을 조금 경제적으로 끊으면 더 흡입력이 있을텐데 왜 이렇게 굳이 길게 자잘하게 보여주나, 너무 젊은 감독(88년생)이라 모든 테이크가 소중해서 그런건가 의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감독의 영리한 연출방식인 것 같았다. 건축의 브루탈리즘(Brutalist movement)에서 추구하는 바를 영화의 문법에 맞게 구현했다. 영화의 메시지와 영화의 연출방식이 호응하느냐? 그렇다. 가공하지 않은 콘크리트를 그대로 드러내고, 필요없는 장식은 덜어내고, 내부 구조를 다 드러내되, 자랑하지 않고 그저 보여주는 것만으로 존재감으로 드러내는 브루탈리즘의 사조를 그대로 영화에 옮겨두었다. 


4. 사생활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펜하이머The Oppenheimer의 청문회에서 알몸으로 벗겨진 것 같은 느낌을 표현한 신이 생각난다. 시간 속에 풍화되어 삭아 낡아가는 고전시대의 영광스러운 건축물들과 함께 살아가는 유럽인들이 좋아하는 방식이다. 고양감보다는 치부를 드러내는 것을 더 예술적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젊은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산업발전단계나 인구구조 측면에서 혈기왕성한 젊은 사회에서는 애국심, 가족애, 할 수 있다는 진취감을 드러내는 서사, 딱 보면 무슨 말인지 아는 스토리가 흥행한다. 인도네시아에서 7번방의 선물이 흥행하듯이, 우리나라의 90-00년대가 그랬듯이.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 그전에는 용납할 수 없었던 자신의 부족함, 이해할 수 없었던 상대의 아픔,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던 주변인들과의 소통 등이 모두 복구가 되어가며 사태의 이면을 보는데 더 큰 관심을 헤아리게 된다. 인생의 희노애락을 다 맛보고 허무하다고 느끼는 자가 소비하느 서사는 다르다. 베를린 황금곰상 수상작을 보면 알 수 있다.


5. 실화는 아니다. 라즐로 토스는 실제 있었던 역사적 배우는 아니다. 그러나 있음직한 캐릭터이고, 역사적 사건과 배경에 밀접하게 기대어있다. 팩션이라고 봐도 되겠다. 홀로코스트+음악가=피아니스트, 홀로코스트+기업인=쉰들러리스트, 홀로코스트+건축가=브루탈리스트라고 거칠게 분류해 봐도 되겠다. 쉰들러리스트나 사울의 아들도 잘 만든 영화였고, 최근에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도 있었다.


6.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는 장면같이 감정이 고양이 되어야할 부분에서는 의도적으로 사운드를 미스매칭한다. 

에필로그가 너무 갑툭튀다. <1947보스톤> 같은데서 볼법한 영화의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설교하는 연설신이다.


7. 교포 배우들이 영어를 잘하는데도 할리우드에서 아시아계 스테레오타입에 경도되어 아시아계 못난 발음으로 해달라는 것을 차별이라고 생각해서 불편해한다는 여럿 접했다. 분명 미국인이 부탁하는 태도에서 미필적 무시나 뇌맑은 편견이 있었을 수 있다. 원래 잘 모르니까 모르고 그렇게 하는 것일 수도 있고, 누구는 알고도 그랬을 수 있다. 하지만 발음이 미숙하 아시아인을 연기하는데 너무 능숙하게 하는 것도 캐릭터의 설득력이 떨어질 수 있다. 스페인계나 인도계나 다른 인종들은 자기 인종그룹을 연기하면서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아시아계만 유독 백인들이 무시한다고 여긴다. 아시아계의 하나가 아니라, 배우로서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아시아계는 자기가 주류라고 인정받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면 뉴욕 퀸즈에서 태어난 미국 네이티브 에이드리언 브로디도 헝가리 출신의 인물을 연기하기 위해 그 악센트를 따로 연습했다. 영화 안에서 부자이 해리슨 밴 뷰런(van이 붙었으므로 조상은 네덜란드계였을 것이다. New York의 전신은 New Amsterdam인 것을 기억하자)이 악센트에 대해 트집잡는데 그는 솔직히 조금 심한 편이다. Over을 오버가 아니로 오베르라고 발음한다. 아내는 옥스포드에서 영어를 공부한 헝가리 기자인데, 밴 뷰런은 아내의 영어를 칭찬하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가 들었을 때 영어 악센트가 네이티브는 아니다. 그러나 큰 무리 없이 들어줄만하고 오히려 순발력 전달력 관습적 표현에 익숙한 정도가 더 중요한 것 같다. 


8. 마지막 엔딩 크레딧은 45도 각도로 상향하며 움직이는데, 이는 45도 각도로 서재를 낸 것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인상 깊은 점은 각도만 틀었을 뿐인데 애니메이션적 효과를 주었다는 점이다. 아래쪽을 주목해보면 올라오는 글자들이 마치 매트릭스의 글자가 흘러내리듯, 글자가 옆으로 써지는 것 같은 효과가 있다. 각도로 하나를 바꿈으로써 새로운 표현기법을 자아낸, 아주 조그마한 하나를 바꿈으로써 전체에 새로운 효과를 주는 브루탈리스트 무브먼트의 은유다.

9. 초반에 홀로코스트를 피해 탈출에 성공해 뉴욕에 도착한 주인공이 배가 정박하자 잠에서 깨 도착한 미국을 보기위해 허겁지겁 갑판으로 올라가는 장면에서 자유의 여신상을 휩패닝샷으로 반전해서 찍고, 다시 그 화면이 거울에 비친 것처럼 보이는 카메라 워크가 인상 깊다. 자기가 그리던 아메리칸 드림도 반전되었고, 심지어 그 반전된 장면도 거울에 비친 허상에 불과하다는 영화적 연출일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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