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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샌드힐
  • 하서찬
  • 12,150원 (10%670)
  • 2025-04-21
  • : 980

아주 잘게 부서진,

하서찬 글, 박선엽 그림 - 『샌드힐』(웅진주니어)(☆가제본)

 

첫 문장을 시작으로 스윽스윽, 책장이 넘어갔다. 지훈은 사막이고, 라희는 오아이스라고 생각했다. 라희는 오아시스 같으면서도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는 그런 오아시스였다. 결국 지훈에게 오아시스로 계속 남아주지 못했으니 말이다.


지훈은 중국 사립학교 ‘펑동(얼어붙은 토지)’에서 '왕따'다. 학교를 가는 게 싫어서 버텨 보지만 강압적이고 버티기만 하라는 아빠 손에 끌려 학교에 억지로 가게 된다. 학교에는 지훈을 괴롭히는 애들이 수두룩하고, 지훈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지켜보거나 다른 애들이 보지 않을 때만 지훈에게 다가와 친한 척하는 애들이 대부분이다. 지훈은 그런 학교생활과 그 생활의 중심에 서 있는 아이들에게 역겨움을 느낀다. 직접적으로 자신을 괴롭히는 류웨이와 달리, 애들이 보지 않을 때 다가와서 친한 척하는 ‘장’의 모습에 역겨움을 느끼는 지훈이 이해가 되어 장이 미웠다. 차라리 장이 지훈이 대신해서 류웨이의 괴롭힘을 당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어른인 내가 어른인 척하는 아이일 뿐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어떤 사건으로 류웨이의 폭력이 지훈이 아닌 장에게 향했을 때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들었다. 장에게 미안하고 부끄럽지만, 지훈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최악의 상황은 아무도 지훈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거나 도움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충격적이랄 것도 없다. 현실에서는 더 잔인한 형태로 아무렇지 않게 반복되고 있으니까. 지훈을 대하는 선생님의 태도는 지훈의 삶에 균열을 만들다 못해 부숴버렸다.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것을 봤으면서 오히려 지훈이 잘못 본 거라고(축구공을 골대가 아닌 지훈의 배를 겨냥해 맞춘 상황에서 선생님이라는 사람이 보였던 말과 행동), 지훈의 탓을 하며 상황을 손쉽게 정리했다. 무책임하고 부끄러운 짓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선생님의 태도는 지훈에게 상처는 물론, 희망마저 앗았다. 애초에 지훈에게 희망이란 것이 있었을까? 한국을 떠나 중국으로 와서 하는 학교생활은 지훈에게 지옥이다. 지옥살이 중, ‘라희’는 지훈에게 오아시스, 파라다이스, 숨구멍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지훈에게는 잠깐 숨구멍도 허락되지 않았다. 라희와 가까이 지내면서 지훈은 더 이상 모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라희와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버텼다는 말도 어울리지 않지만) 겨우 버텨왔던, 원래 망가져 있던 것이 완전히 산산조각 부서진다. 가장 잔인한 것은 지훈의 상처를 보듬어 주고 이해하고, 함께 하며 상처가 아물 수 있게 도움을 줘야 할 아빠가 지훈에게 가장 냉정하고 강요하고, 아무것도 해주지 않으면서 자신의 성공을 들먹이며 형의 몫까지 해야 한다며 지훈에게 부담만 짊어주는 것이다. 지훈에게 필요한 것은 냉정하고, 이미 지훈이 알고 사실을 여러 번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평범하고 지루해서 하품이 수시로 나오는 하루가 필요하다. 지훈은 여전히 그날, 그 일에 머물러 있다. 그날 이후로 흐른 적 없는 지훈의 시간은 타인에 의해 겉으로만 흘러갈 뿐이다. 지훈의 시간은 가장 의지하고 좋아하던 형을 잃으면서 멈췄다.


지훈의 부모는 매일 싸웠다. 물건을 던지고 고함을 지르며, 마지막에는 아빠가 현관을 박차고 나가는 엔딩으로 끝난다. 반복되는 싸움에 지훈과 형은 그 싸움을 피해 밖으로 나가야 했다. 나가라고 하지 않았지만 나가야 할 것 같은, 나가야 더 안전할 것 같을 때가 지훈과 형에게는 매일이었다. 지훈에게 형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날도 여느 날과 다르지 않게 부모님이 싸웠고, 던져진 물건에 부화 직전에 있던 병아리가 맞아서 죽었고 숨이 붙은 병아리 한 마리를 데리고 형과 밖으로 향했다. 한강을 가자던 형의 말대로 둘은 자전거를 타고, 달렸다. 형이 발견한 아지트에서 남은 시간을 보내고, 다음날 학교에 가기 위해 둘은 서두른다. 자전거를 타고 앞서가던 형은 지훈이 잘 오고 있는지 뒤돌아서 확인했고, 그러던 중 달려오던 트럭이 형을 순식간에 삼켰다. 이미 불행은 시작되었지만, 그때부터였을까? 항상 미소만 띄운 채 주변을 맴돌던 불행이 이젠 기지개를 켜고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드러낸 순간이. 형은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고, 형이 병원 생활을 한 지 2년이 되던 때 부모님은 이혼했다. 차라리 더 빨리 이혼했다면, 서로에게 아니 지훈과 형은 덜 불행했을까? 거의 형을 잃은 거나 다름없는 지훈과 더 이상 미래를 꿈꿀 수 없는 형이 안타깝다.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자라고, 자신만의 삶을 꾸려나갈 수 있도록 보호와 돌봄을 책임지고 실천해야 할 부모의 역할을 지훈의 부모님은 하지 않았다.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부모 때문에 지훈의 삶은 균열이 계속 생기고, 메꿀 틈도 없이 크고 작은 충돌이 일어나 계속 부서졌다. 그렇게 이혼한 당사자들보다 자식들이 더 괴로운 엔딩으로 지훈의 불행 서사는 다시 시작되었다. 엄마는 한국에서 언제 깨어날지 알 수 없는, 아니 깨어나지 못하고 호흡기에 기대어 숨만 붙어 있을 확률이 높은 형의 곁을 지키고, 지훈은 이미 정해진 계획에 몸만 덩그러니 실어 아빠를 따라 중국으로 간다. 지훈의 중국행에는 지훈의 의견이 0.01%도 없다. 그저 아빠가 독단적으로 한 선택에 희생, 아니 피해자가 되었을 뿐이다. 아빠가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지훈의 말에 가려면 세계에서 알아주는 명문대에 가고 나서 가라고, 한국은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부분은 정말 최악이다. 지훈은 아빠보다 현실을 더 잘 알고 있다. 아빠는 그저 한국에서 병상에 누워 있는 형과 엄마에게서 희망이 없기에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버티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정말 희망이 있다고 믿는 걸까? 희망을 찾아 떠나온 중국에서 희망을 찾았던가. 지훈 아빠는 일에서 희망과 성과를 얻었을지 모르지만, 지훈은 모든 것을 잃었다. 형을 잃은 순간부터 모든 것을 잃고, 한국과 중국 거리보다 더 멀리 와버렸다. 지훈이 여기까지 온 데는 지훈의 선택이 단 하나도 없다. 하지만 라희와의 관계는 지훈이 선택했다. 어리석은 선택으로 지훈과 라희의 엔딩은 ‘모래 알갱이가 입안을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듯 텁텁하고 씁쓸했지만’ 지훈이 선택했다는 사실 하나가 텅 빈 마음을 어떻게든 채우려고 애쓰는 것 같다. 그래서 라희가 지훈에게 사막의 오아시스가 되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훈 또한 라희에게 오아시스가 되어주면 서로 타국에서 외로움의 자리에 희망을 심어 싹을 틔우길 바랐지만, 그건 내 바람이면서 동시에 지훈의 간절히 뻗어도 닿지 않을 잔인한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라희와 지훈의 관계는 ‘그 시기에 겪는 당연한 복잡하고 정신 사나운 일들과 감정들’이 뒤섞여 물건이 정리가 하나도 되지 않은, 창문과 문 없이 벽으로만 이루어져 공기가 통하지 않는 숨 막히는 공간처럼 느꼈다. 처음에는 공간이 낯설어 두리번거리다가 답답해서 눈에 보이는 물건을 치우지만 창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답답함을 느끼고 자연스럽게 날이 서면서 서로 갖고 있는 상처가 한 사람은 칼날이 되어 상대방을 향해 겨누고, 다른 한 사람은 칼날을 막을 수 없는 모래 알갱이를 뭉쳐 만든 방패를 들고 있는 것 같다. 지훈에게 항상 말을 거는 쪽은 라희였는데, 라희는 언제나 목적을 갖고 지훈에게 닿았다. 목적이 있지만 라희 덕분에 지훈이 아주 잠깐 어둠 속에서 작지만, 선명한 빛을 보았다. 빛은 빠르게 달아났지만.


‘샌드힐’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서 검색했지만, 내가 원하는 정보를 얻지 못했다. 정식 출간본이 나오면 <작가의 말>이나 완성된 스토리에서 내가 ‘샌드힐’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사막에 바늘 찾기만큼 ‘샌드힐’의 의미를 찾는 것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샌드힐이라, 샌드(sand, 모래)와 힐(kil, 페르시아어 gil/진흙, 점토)의 합성어인가? 형이 준 조각칼로 점토를 조각하여 사람을 만드는 지훈에게 딱 제격인 제목이기는 하나, 정확하게 의미를 알지 못하니 답답하다. 아마 ‘샌드힐’은 읽는 독자마다 다르게 해석되고, 세상 곳곳에서 각각의 샌드힐이 생길 것이다. 세상 곳곳에 지훈과 라희가 있을 것이고, 점토를 조각해서 탄생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조각하여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점토 인간들이 본인을 빚어준 이를 지켜줬으면 좋겠다.


나는 아직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사막 위를 목적지 없이 걷고 있다, 지훈과 라희의 이야기를 곱씹으며. 아마 나만의 샌드힐을 찾기까지 목이 마른 것도 느끼지 못하고, 사막을 걷고 또 걸을 것이다. 나만의 샌드힐에 닿을 때쯤이면 지훈과 라희가 부서져 떨어진 부스러기로 단단한 성벽을 만들어 자신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었으면 좋겠다(지훈과 라희가 행복해질 거라는 희망이 자꾸 고개를 내민다. 행복했으면 좋겠다. ‘너를 죽이지 않는 것이 너를 강하게 만들 거야.’라고 지훈에게 뻔한 위로의 말을 하던 라희 본인이 듣고 싶었던 말을 내가 그만 떠돌고 싶다고 말하는 라희에게 해주고 싶다.). 내가 바랐던 엔딩과 다른 엔딩이라서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지만, 그동안 자신을 짓눌렀던 것을 훌훌- 털고 가벼워지지 못한 지훈과 라희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다. 지훈과 라희는 앞으로 지금보다 덜 불행할까? 불행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을까? 어디서 다시 시작해야 할까? 꼭 본인이 선택했으면 좋겠다. 그러면 적어도 진심으로 자신을 위한 결정을 내릴 테니까. 제목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글자마다 균열이 있고, 작은 부스러기가 아래로 떨어지고 있다. 그 아래에는 황량한 사막이 펼쳐져 있다. 꼭 균열로 인해 생긴 부스러기가 모이고 모여 사막이 된 것 같다. 얼마나 많은 균열이 생기고, 그 균열 사이로 다양한 크기의 부스러기가 떨어져야 한눈에 담을 수 없는 사막이 생기는 걸까? 사막을 구성하는 모래는 아주 작은 입자다. 아주 작은 모래가 사막을 이루려면 수많은 균열과 충돌을 반복해야 할 텐데. 완전히 산산조각, 아니 파괴된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닐까? 지훈과 라희의 삶을 파괴되었다고 봐도 될까.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에는 균열이 생기고 그 사이로 부스러기가 떨어진 것이 아니라, 애초에 아무것도 없이 모래만 있는 사막에 모래와 다른 무언가가 떨어진 것 같다. 내 희망사항일 수도 있고(이래서 희망은 잔인하다).

세상 곳곳에 있을 지훈과 라희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저 멀리에 있는 누군가도 얼굴 한 번 본 적 없고, 나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지만 나를 응원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힘이 난다. 다리가 아프고 목이 마른 느낌을 느끼지 못하다가 생각지 못한 오아시스와의 만남으로 그제야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앉아 두 손으로 물을 퍼마시고, 다리를 주무르며 ‘이제 살겠다.’라고 말하며 나의 샌드힐에 닿았음을 깨달을 때, 손을 모래 위에 얹고 눈을 감은 채 저 멀리서 다가오는 존재의 심장 박동을 느낄 것이다.

 

◎ 이 가제본은 서평단 활동을 위해 ‘웅진주니어’에서 받았습니다: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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