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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님의 서재
  • 너의 하늘을 보아
  • 박노해
  • 17,550원 (10%970)
  • 2022-05-13
  • : 9,494

시인님의 ‘너의 하늘을 보아’라는 시를 처음 알게 되었던 건, 고3이던 1999년의 어느 가을날, 국어시간이었습니다. 수능이 백일도 채 남지 않았던 우리는, 수능시험일 그날 단 하루에, 그날 이후의 모든 미래가, 삶의 성패가 달렸다 믿으며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교실의 무거운 공기를 가르고 들어오신 선생님께서, 이 시를 말없이 칠판에 적어내려 가시던 그 모습이, 바로 어제 일처럼 또렷이 기억납니다. 공부에 지친 제자들에게 시 한 편을 건네며 뜨겁게 안아주셨던 선생님- 이 시와의 첫 만남은 그만큼 강렬했습니다.

그 후로, 이 시는 제 삶의 길잡이가 되었다고 할까요.

독서실 책상 앞에 적어 두고, 눈이 마주칠 때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시를 되뇌었습니다. 그래, 내가 자꾸 쓰러지는 것은! 내가 지금 길을 잃은 것은! 내가 꼭 이룰 것이, 내가 가야만 할 길이, 꽃 피워낼 것이, 있기 때문에! 당장은 앞이 안 보이는 것 같아도, 너무 힘들어 눈물이 흐를 때도, 이 시는 하늘 같이 넓은 품을 기꺼이 내어주며 따뜻한 위로와 응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문득 떠올려 보니 참 많은 세월이 흘렀네요.

꿈도 눈물도 많았던 열아홉 소녀는 마흔둘 아줌마가 되어 다시 이 시를 마주합니다.

지나고 보니

내 인생에서 단 하루뿐이며 가장 중요하다 믿었던 수능의 그날은,

매년 반복되는 많은 날 중에 하루일 뿐이었고

내 남은 미래의 성패를 전부 결정해버리고 말 거라는 두려움도, 실체는 없는 허상일 뿐.

내 꿈의 무대는 좁은 대학의 캠퍼스가 아니라 하늘만큼 넓은 대지에 있고

꿈을 이뤄가는 수많은 방법 중 한 가지일 뿐이라는 걸.

 

마흔둘에 다시 읽는 ‘너의 하늘을 보아’는

열아홉의 그때처럼 여전히 내 가슴을 뛰게 하고

마흔둘에도 여전히 쓰러지고 자주 길을 잃는 것만 같은 내게

한결같은 위로를 보내주고 있네요.

함께 나이를 먹어가는 오랜 친구를 다시 만난 것만 같은 기분-

하지만 이 시만은 늙지 않고,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생명력으로 생생히 살아 있다는 사실이 새삼 감사한 오늘입니다.

저는 오늘,

다시 이 시를 적어 책상 앞에 붙여 놓아야겠습니다.  

나는 끝내/너를 지켜주지도 못하고/깨어지고 쓰러지고 패배한/이 치명상의 사랑밖에 없는데//어둠 속을 홀로 걸을 때나/시련의 계절을 지날 때도/널 지켜줄게/붉은 목숨 바친/그 푸른 약속이/날 지켜주었음을//- P11
좋지 않은 일들이 한꺼번에 오고/좋지 않은 자들이 봄을 밟고 와도/눈 녹은 땅에 꽃씨를 심어요//지구에서 보낸 한 생의 길에서/곧고 선한 걸음으로 꽃을 피워온 그대/사랑이 많아서 슬픔이 많았지요/사랑이 많아서 상처도 많았지요//그래도 좋은 사람에게 좋은 일이 오고/어려움이 많은 마음에 좋은 날이 오고/눈 녹은 땅에 씨 뿌려가는 걸음마다/봄이 걸어오네요/꽃이 걸어오네요//- P15
죽어간 것들은 무거웠다/진정 사랑하다 죽어서/내 품에 안고 걸은 것들은/두고두고 무거웠다// ... 진정 사랑하다 죽어서/내 품에 안고 걸어가 묻어준 것들은/그 무게와 깊이만큼 생생히 살아있다//진정 사랑했으나 끝내/푸른 나무로 심어주지 못하고/저 바람 속에 어둠 속에 두고 온 이들은/두고두고 날 울리며 내 안에 살아있다//- P18
내 책이 300부가 팔렸다,좋다,/3천 부가 팔리고 3만 부가 팔리자 슬그머니 겁이 나고 무서워졌다/10만 부가 되어가자 아이쿠,/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뭔가 잘못된 것이다/내가 잘못한 것이다/10만 명이 읽었는데도 세상 사람들에 근본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책은/그냥 간식거리거나 쓰레기일 테니//- P21
봉기라는 것!/벌떼처럼 일어나 달려든다는 것/아주 작은 최후의 무기인 벌침을 품고 일어서/저 거대한 구조악의 실체를 쏘아버린다는 것/시대가 변하고 모순이 변하고 적 또한 변해도/저들이 정말로 두려워하는 단 하나는/목숨 걸고 달려드는 작은 자들의 봉기,/무장봉기라는 것//- P45
나는 그냥/인정받고 싶다/유명하지 않아도/남들만큼 빛나기를 원한다//나는 그냥/평범하게 살고 싶다/남부럽지 않게/남들 사는 만큼 살고 싶다//네가 부자가 되면 나는/너만큼은 부자가 되고/네가 잘나가면 나는/너 정도는 잘나가고/내가 못 따라잡으면/나는 내 아이를 기어코/네 아이만큼은 밀어올리고//나는 그냥/남들에게 폐 끼치지 않고 걱정 없이/어려움 없을 정도의 적은 재산으로/죽을 때까지 풍족하게 살고 싶다//나는 그냥/지금 뭔 말을 하는지 나도 모르지만/다들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들 하니까/뭔 소린지 몰라도 지금 나는 그냥//- P66
하루 아침에 공포가 세계를 지배하고/하루아침에 인간의 얼굴이 사라졌다/나는 만남이 끊어진 텅 빈 도심을/‘불가촉 존재‘가 되어 홀로 걷는다//인류의 역사는 ‘접촉의 역사‘인데/인간의 진보란 더 새롭고 다양한 존재와/ 접촉의 확대를 통해 이루어진 것인데/사랑과 정의란 두려움과 손해와 위험과/죽음까지를 감수하면서 낯선 이들을/접촉하고 받아들이는 결단과 용기인데//난 누구보다 사랑의 접촉자로 살아왔는데/내 몸의 상처는 다 나를 넘어 다른 존재와/만나고 손잡고 끌어안다 남겨진 상처인데/그 사랑의 감염이, 상처 속의 빛이,/내 인생의 별의 지도가 되었는데//- P129
조급함과 태만함은/모든 악이 파생되어 나오는 근본적인 죄이니/조급한 자가 실은 태만한 자이고/태만한 자가 실은 조급한 자이니//그래,니가 알아서 해부러라/살아나시든지 마시든지/씨앗도 나무도 시도 일도 인연도//- P200
춤 추고 노래하고 꿈을 꾸고/밥을 벌고 책을 읽고 대화하고/탐험하고 도전하고 깨어지고/함께 앞을 보며 나아가라//두려워하지 마라/실패도 상처도 이별마저도/재고 따지고 계산 따위 하지도 마라/쿨한 척 괜찮은 척 시크한 척하다가/척척 꺾인다 청춘//젊음은 사랑과 시와 혁명과/슬픔의 폭탄을 품고 있어 젊음인 것/젊은이의 불꽃같은 사랑 앞에서는/누구라도 이길 자가 없으니//- P412
네가 자꾸 쓰러지는 것은/네가 꼭 이룰 것이 있기 때문이야//네가 지금 길을 잃어버린 것은/네가 가야만 할 길이 있기 때문이야//네가 다시 울며 가는 것은/네가 꽃피워 낼 것이 있기 때문이야//힘들고 앞이 안 보일 때는/너의 하늘을 보아//네가 하늘처럼 생각하는/너를 하늘처럼 바라보는//너무 힘들어 눈물이 흐를 때는/가만히 네 마음 가장 깊은 곳에 가 닿는//너의 하늘을 보아//- P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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