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비단 공간이동에 머무는 것이라면
그리하여
이곳에 점을 찍고 저곳에 족적을 남긴 걸로만 만족해야 하는 것이라면 참 심심할 것 같다.
시간이 바뀌는 지점들을 통과할 때 마다 몸의 세포들이 그 바뀐 시간대를 향해 스스로를 적응시키는 동안가슴은 벌써 몇 백년을 거슬러 올라가곤 한다.
이런 식의 여행은 돌아올때 무척 위험하다. 왜냐면, 시공간개념을 완전 상실한 채로 기진맥진해있을때에는 아무리 런던에 시간이 시작되는 지점이 있다해도, 이미 몸과 영혼과 공간이,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인 시간 속에서, 그 원리대로만 작용하려드는 못된 버릇이 생겨버린 터이니.
그런 느낌을 이해하는 자들이 읽어야할 여행기, 런던을 속삭여줄께.
대신 이 책은 교양인들이 읽어야한다. 그녀의 말을 빌어 이야기하자면,
고흐의 <해바라기> 앞에서, '성질이 지랄같은' 고흐가 자른 게 자신이 아닌 고갱의 귀라고 열변을 토하는, 그 시점에서는 엉터리 터무니없는 정보에 스스로 흡족해 어깨를 으쓱였을 꼬죄죄한 아버지 같은 교양인 말이다.
왜냐하면 그는 먼 훗날 그 아들로 부터
"그날 우리 아빠는 나를 사랑했었지, 고흐의 <해바라기> 앞에서" 라는 회상을 유도케 할테니까. (293P.)
책을 읽기전에, 혹은 런던으로 떠나기 전에 -이 책의 부제가 '언젠가 떠날 너에게' 인데, 그 언젠가 떠나갈 그 곳이 런던이 아니라 죽음이라 해도 난 기쁘다-우리가 단단히 준비해야할 것은
"자기가 사는 도시의 위도를 팔뚝에 문신으로 새기"는 것.(268 P.)
만약 이 속삭이는 여행기가 ‘런던에서 가볼 곳’만 적어내린 거라면 몇 줄 안 가 책을 덮어버렸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다행히도 이 책은 그 친절함과는 거리가 멀다. 불친절하게 순전히 작가가 만난 과거의 유령들과의 대화이다.
이승을 떠나지 않고 내내 구천을 떠돌다가 저랑 통하는 자가 있다싶으면 세속의 모든 규율을 다 뭉개버리고 뜬금 없이 나타나 책임지지 않을 자세로, 가히 폭력같은 아름다움으로 자신의 영예로왔던 삶을 구슬프게 넋두리하는 그런 유령들과
뺀질뺀질 한 말투로, ‘그래서요?’라고 말하면서 눈을 치켜올리거나, 안 그래도 이미 짧은 치맛자락을 무심코 슬쩍 올릴 것 같은 정혜윤 작가와의 대화 말이다.
언젠가 국내에서 <사랑한 후에 남겨진 것들>이라는 제목으로 상영되었던 cherry blossom이란 영화를 보고 부토 라는 일본춤에 반한 적이 있다. 생경한 춤이라 그 의미를 제대로 짐작하긴 어려웠으나, 영화 전반을 흐르는 기저로 보아, 모든 것을 내 몸안으로 빨아들인 후 간신히 내뱉는 그 자세들은 마치 삶과 죽음을 고스란히 제 속에 품었다가 토해내는, 이른 바 삶이기도 하고 죽음이기도 한 것에 대한 우리 인생들의 태도같아 보였다. 이 책의 한 구절이 바로 그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데, 이를테면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는 남편의 대사 “그녀는 어디에 간거지? 내가 이렇게 그녀를 기억하는데. 그렇다면, 내가 죽으면 내게 남아 있는 그녀의 기억은 어디로 가는 거지?” 라는 이 말이 정혜윤의 글에서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사람은 자신의 몸으로는 정말로 잠시만 사는 것이고, 진실로 오래 사는 곳은 다른 사람의 가슴속일 뿐이란 생각도 든다. 결과적으로 사람은 한 번이 아니라 아주 여러번, 수없이 죽으면서 잊혀가는 것이고 그리고 완전히, 깨끗이 죽는 것은 아무도 기억하는 사람이 없어지는 순간일 지 모른다”
그녀의 이야기들은 내가 그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고백, 그 무엇보다 그런 그들을 고스란히 기억하기 위해 몇 백년 동안 한 번도 웅크리지 않고, 기죽지도 않고 런던이 부지런히 쌓아두고, 뚝딱거리며 보수하고, 때론 치장하고, 가끔은 떠벌이는 그런 공간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미 그 공간은 과거 그 자체이자 현재형이다. 우리가 삶이자, 죽음이듯, 부토춤이 죽음을 빨아들여 삶을 내뱉고, 삶을 삼켜서 죽음을 토하는 춤이듯,
런던은 과거 완료형에서 현재 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지상의 형제인 우리를 위해 이야기 한다. 죽은 자를 빌어 살아있는 자와, 앞으로 죽을 자들에게 나긋나긋하게 속삭인다. 이렇게
“그들 바로 아래 계단에는 블라우스 단추를 과감하게 네 개나 풀어놓은 여성 가이드가 돔의 가장 높은 지점인 골든 갤러리에 대해 침을 튀기며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여성 가이드는 손을 들어 높이 111.3 미터, 베드로 성당에 이어서 세계에서 두번째로 크다는 그 돔을 가리켰는데 우리의 열여섯 사내들의 고개는 아무도 그녀의 손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지 않았다. 그들의 시선은 오로지 지상의 거대한 돔, 그녀의 가슴에만 고집스럽게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천국이 바로 여기 있다는 듯, 지상이 이렇게 아름다운데 뭐 다른 거대한 돔이 저 높은 곳에 필요하냐는 듯.
십분 이해한 나는 기도했다.
지상의 형제들을 위해 상쾌한 바람 한자락 불어 그녀의 옷섶이 살짝 흔들리기를.
우리 지상의 형제들은 감히 삶을 바꿀 수는 없어도 삶의 태도를 바꿀 수는 있다. 어느 바람 불던 날에“
런던을 다녀온 그녀의 여행기를 그녀의 말투를 빌어 설명하자면 이렇다
“정혜윤이라는 사람이 있대, 나는 그녀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어. 내가 정혜윤에 관해서 이야기 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아는 게 없어서 말해줄 수가 없구나. 하지만 너희들이 듣고 싶다면 말이야, 파란색에 대해서는 내가 아는 모든 것을 말해줄 수 있단다”
그녀의 책 속 곳곳이 왜 파란색이었는지는..아마도 책을 읽은 사람들은 알 것이다.
ps: 런던에 간 김에, 레이크 디스트릭트를 가게된다면,
그녀가 만난 여자 중에서 가장 만나고픈 여자 하나 , 이 여자
"영국에서 그해 처음으로 내린 눈이나 비를 보고 싶으면 이곳으로 오라고.
내게 그렇게 말한 처녀에게 나는 어떻게 그걸 아느냐고 되물었다.
그랬더니 자기는
아직 고향을 한번도 떠나보지 못해서
다른 곳은 모르기 때문에 자신에게는 그 눈이 첫눈인 게 확실하다고 했다"(289 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