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리 템페스트 윌리엄스의 『빈 일기』를 읽고 나서>불치병에 걸린 어머니는 딸 테리 템페스트 윌리엄스에게 일기장을 남긴다. 하지만 자신이 죽기 전까지 그것을 보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라고 한다. 딸은 그 약속을 지켰고 어머니의 일기를 펼치게 된 날, 당황스러운 상황을 맞게 된다. 수십 권의 일기장이 모조리 비어 있었던 것이다.아무 것도 없는 어머니의 일기장. 저자는 어머니가 남긴 빈 일기장을 무려 이십 사 년 간 보관한다. 그리고 그 위에 자신의 글을 새로 써내려간다. 어머니의 빈 일기장이 남긴 의미를 묻고 답을 찾아나서기 위해서.
'어머니의 일기는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어머니의 일기는 나에게 모든 말을 한다.''어머니의 일기는 도난당했다.''어머니의 일기는 한 번도 적히지 않은 글자들이다.''어머니의 일기는 잔혹 행위이다.''어머니의 일기는 괴롭힘이다.''어머니의 일기는 수수께끼다.''어머니의 일기는 영겁을 더듬는다.''어머니의 일기는 투사막이다.''어머니의 일기는 심란함이다.''어머니의 일기는 각성이다.'그녀가 엄마의 빈 일기장을 이렇게 매 장 다르게 부를 때마다, 나는 우리 엄마의 조용했던 삶을 오버랩시키며 읽어나갔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어머니의 '일기'는 몸짓이자 맹세이다." 그러면 나는 "어머니의 '삶'은 몸짓이자 맹세이다." 이런 식으로 다시 읽어보는 것이다. 그 다음 페이지도 마찬가지. 나는 그런 식으로 읽어도 여전히 읽힌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 조금은 흥분상태가 되었다. 뇌성마비로 얼굴 근육과 혀, 목젖까지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던 우리 엄마의 모습이 빈 일기장 위에 투사된 영화 장면처럼 생생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나도 테리 템페스트 윌리엄스처럼 집요하게 써내려가기 시작하면 우리엄마의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더 들을 수 있을까. 이 책을 처음 읽은 작년 2월 이래로 놓지못한 생각이었지만 너무 욕심을 내었던 탓일까, 한 편의 글도 완결 짓지를 못해 내내 속이 상하고는 했다.그러다 며칠 전, 스무 살 큰 딸이 쓴 글을 우연히 읽게 되었다. 그리고 당장 딸의 동의를 구했다. 딸의 도움을 받으면 일 년이 넘도록 빈 일기장이라는 책을 둘러싸고 파편으로만 돌아다니던 문장들을 묶어서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미처 다 하지 못한 말을 딸이 꺼내주어서 고마웠다.=================================<할머니의 빈 일기장>우리 집에는 기묘하게 전해져 내려오는 빈 일기장이 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마지막으로 집을 청소하던 중, 엄마가 소중하게 품에 안았던 빛바랜 주황색 노트가 너무 탐이 나서 달라고 조른 결과로 얻게 됐다. 실상 물려주려던 의도 하나 없이 이 일기장은 외할머니로부터 엄마에게, 또 엄마로부터 나에게까지 전달되었다. 고등학생 시절의 엄마가 쓴 한 편의 일기를 제외하고는 어떤 글도 적혀있지 않다. 텅 비어있는 일기장이니 딱히 공유된 추억 같은 것이 적혀 있는 것도 아닌데, 나는 언제나 이 일기장이 외할머니가 내게 남긴 유품이라고 생각해 왔다. 이것이 외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나를 매개하는 하나의 우체통이라도 된다는 듯이. 이 일기장이 애틋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우리 외할머니는 뇌성마비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셨다. 원할 때 걷고, 씻고, 요리할 수 없다는 사실보다 내게 있어 외할머니가 늘 ‘낯선 가족’이자 다른 별에서 온 외계인 같았던 이유는 바로 ‘소통’이었다. 보통 뇌성마비 장애인들의 언어 수준은 천차만별이라던데, 불행하게도 외할머니의 성대는 생애 내내 품어왔던 지적 욕망을 억누르듯이 언제나 지나치게 긴장되어 있었다. 한 음씩 힘겹게, 간신히 토해내는 방식은 입을 막으려는 무언의 압박으로부터 할머니가 끊임없이 저항하는 힘겨운 투쟁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 몸을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은 말 뿐만 아니라 소소한 일상의 표현 방식까지도 바꾸어 놓았다. 명절날 오랜만에 딸 내외를 맞이하는 외할머니식의 환영 표현은 침대에 누운 채 근처까지 다가온 가족들에게 고개 돌려 환하게 웃어주시는 거였다. 버선발로 맞아주거나,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기다리지 않더라도 할머니에게는 얼굴 근육을 사용한 미소와 약간은 어눌한 “왔나” 이 한 마디가 최대한의 반가움을 눌러 담은 방식이었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외할머니와는 길거나 진지한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 “...부, 열시미...... 해, 핵, 했나.” “네? ...어, 뭐라고요, 할머니?” “고, 공부후. 공, 부.” 할머니가 다소 굳은 것처럼 보이는 팔을 움직여 연필을 쥐고 공부하는 시늉을 내신다. 그제서야 나는 고개를 주억이며 이것이 안부였음을 깨닫는다. 남들은 별 힘들이지 않고 간단하게 던지는 안부 한 마디를 외할머니는 몸을 비틀고, 호흡을 여러 번 추슬러 뱉어내야 했다. 게다가 이런 식으로 짧은 몇 마디를 나누고 나면 힘이 드시는지 식은땀을 뻘뻘 흘리셨기 때문에 “아... 할머니, 땀 나요. 잠시만요.” 하며 휴지 찾다가 대화가 종료되었다. 사실 이 정도면 할머니와 대화가 정말 잘 이루어진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 자매는 자라면서 점점 외할머니 특유의 의사표현을 캐치하게 되었지만, 그전에는 외할머니가 입을 여시기만 하면 고개를 돌려 엄마를 보았다. “엄마, 할머니가 뭐라 하셔?” 중국어, 아랍어, 수어... 똑같이 나와 동생이 못 알아듣지만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는 외할머니의 말을 듣기 위해서는 통역가가 필요했다. 말하는 사람이 뻔히 앞에 있는데 다른 사람을 쳐다보며 대화를 이어나가야 할 때마다 나는 마음이 무거웠다. 언어의 목적은 의사소통인데, 가장 가까운 누군가를 거치지 않으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건, 또 그래서 언어를 입힌 생각들을 타인에게 공유하지 못한다는 건 너무 비참한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가끔씩은 외할머니와 엄마, 나와 동생이 보이지 않는 탯줄로 엮여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외할머니는 돌아가셨지만, 내 사소한 습관이나 인생의 주된 정서 하나하나까지 할머니가 개입되지 않은 부분이 없다. 외할머니의 영향인지 엄마와 나, 그리고 동생은 언제나 주변으로부터 ‘리액션이 과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보통은 농인 부모의 청인 자녀가 듣는 말이라던데, 말하고 써서 표현하는 것이 어려운 뇌성마비 장애인과의 소통에서도 미세한 얼굴 근육 표현과 몸동작은 중요한 것 같다. 우리 엄마는 글을 쓴다. 지체장애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비장애인 자녀로서 평생을 장애와 비장애 사이에서 ‘애매하고 이상한 사람’으로 살아온 경험 위에 문자를 덧입히기 시작하니 그것이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살 수 있었다고 했다. 나 또한 돌이켜보면 어려서부터 계속 글을 써왔던 것 같다. 외할머니가 남기고 떠난 빈 공책을 일기장 삼아 불쑥 치닫는 감정부터 생각들까지 여러 글을 썼다. 내게 이 빈 공책은 펜을 쥐고 글자를 쓰는 게 어려운 외할머니가 한 번도 ‘쓰지 못한’ 페이지였다.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빈 지면 위를 채워나가면서 나는 말하지 못한 외할머니의 바통을 이어받았다고 생각했다. 장애인 당사자, 장애인의 가족 등 나보다 더 적격한 것 같고 할 말 많은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한 세대 희석된 애매함을 가지고 태어난 내가 뭘 말해야 할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오히려 어중간하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에게 이해받을 수 있는 나만의 말이 있지 않을까? 이것을 찾는 것이 내 인생의 숙제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이 일기장과 함께 외할머니의 바통을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고 싶다. 못다 한 말이 오래 이어지도록.
"나는 글을 쓸 것이다. 나는 나의 화를 꺼내어 그것을 성스러운 분노로 바꿀 것이다. 그들의 죽음에서 나는 의미를 만들어 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