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너무 유명해서 온전히 "읽는" 게 쉽지 않은 소설들이 있는데, 프랑켄슈타인도 그 중 하나다. 프랑켄슈타인. 이 글자 덩어리를 마주하면 거대한 몸, 창백하거나 초록빛을 띤 피부, 목에 박힌 볼트 같은 이미지부터 떠오른다.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을 괴물의 이름으로 알고 있는 경우도 흔하다. 일단은 역시 가장 오래된 공포의 원형 중 하나를 읽는다는 기분으로 펼쳤다.
프랑켄슈타인은 이번이 첫 독서가 아니다. 이전에 다른 출판사의 번역으로 읽었고 원서로도 한 번 읽었는데, 오래전 일이라 그때 읽은 영어판이 1818년 초판을 바탕으로 했는지 1831년 개정판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서 2026년 열린책들에서 호러 컬렉션으로 새롭게 나온 판본은 나름 새 책을 읽는 기분으로 펼칠 수 있었다.
내게 프랑켄슈타인의 가장 무서운 부분은 생명 창조 자체가 아니다. 빅토어는 오랫동안 자신의 연구에 매달려 마침내 살아 움직이는 존재를 만들어 낸다. 그런데 그토록 원했던 성공이 눈앞에서 이루어지자 피조물의 외모에 질려 그대로 달아난다. 생명을 만드는 일에는 모든 것을 걸었지만, 그 생명이 눈을 뜬 뒤에는 아무 책임도 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 장면 때문에 나는 빅토어를 단순히 지식을 탐하다 벌을 받은 사람으로 보기가 어렵다. 할 수 있는 일을 해본 것이 문제라기보다, 자신이 해놓은 일의 결과에서 너무 쉽게 도망친다. 피조물은 태어나자마자 버려지고 인간을 관찰하며 언어와 감정을 배운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싶어 하지만 외모 때문에 번번이 거절당하고, 그 과정에서 점점 분노와 복수로 향한다.
피조물이 불쌍하다고 해서 이후 그가 저지르는 살인까지 감싸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이 소설이 좋은 이유가 바로 그 부분에 있다. 피조물은 분명 버림받은 존재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고통을 돌려준다. 빅토어 역시 가족과 친구를 잃은 피해자가 되지만, 애초에 아무 준비 없이 생명을 만들고 버린 사람이라는 사실에서는 벗어나지 못한다. 어느 한쪽을 완전한 피해자나 괴물로 정리하면 작품이 훨씬 단순해진다.
여성 피조물을 만드는 대목도 다시 읽으니 꽤 불편했다. 빅토어는 여성의 몸 없이 생명을 만들어 놓고, 두 번째 피조물을 만들 때는 그녀가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가능성과 번식할 가능성을 두려워해 작업 중인 몸을 파괴한다. 자신은 아무 동의 없이 생명을 만들어도 된다고 생각했으면서, 자신이 만들 여성에게는 아직 생기지도 않은 선택과 욕망부터 두려워한다. 메리 셸리가 출산과 죽음을 가까이에서 반복해서 겪은 사람이라는 사실까지 생각하면 이 장면은 더 쉽게 지나가기 어렵다.
프랑켄슈타인이 지금까지 계속 영화와 소설, 과학기술 이야기 속에서 다시 불려 나오는 이유도 조금 이해된다. 인간이 무엇을 만들 수 있는가는 지난 200년 동안 엄청나게 달라졌다. 인공지능이나 생명공학처럼 셸리 시대에는 상상에 가까웠던 일들이 이제 현실의 문제로 들어와 있다. 그런데 만들어 놓은 뒤 누가 책임질 것인가라는 문제는 별로 낡지 않았다. 이번 판본으로 다시 읽으며 가장 좋았던 것도 이 점이었다. 전혀 다른 작품을 만난 것은 아니지만, 이전에는 그냥 지나갔던 부분들이 다르게 보였다.
실제 작품이 무서운 것은 맞다. 다만 이제는 안다. 죽은 육체를 이어 붙여 만든 피조물보다 훨씬 섬뜩한 것은, 생명을 만들어 놓고 그 결과를 감당하지 않는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