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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영님의 서재
  • 별일은 없고요?
  • 이주란
  • 13,500원 (10%750)
  • 2023-04-30
  • : 930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랜만에 소설을 읽었다. 정확히는 한 권을 완독했다. 한 백 만년만인가. 마지막으로 완독한 소설이 지난 겨울에 읽은 정세랑의 <보건교사 안은영> 아니면 백온유의 <유원>이니 말 다했다. 문학의 중요성은 말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 알고 있지만, 쓸모를 강조하는 시대에 밀도 높은 정보의 가치만을 따지다 실용서에 우선순위를 내주기 일쑤였다.

드문드문 문학을 읽으며 느끼는 건, 문학만큼 인간의 희로애락과 일상의 면면을 다루는 장르가 없다는 것이었다. 문학은 다양한 인간의 군상을 묘사하고, 그들의 다른 삶을 적극적으로 내비친다. 문학이라는 렌즈는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이들의 일상을 주요 서사로 그려낸다. 저자는 이야기 속 주인공을 배척하지 않고, 같은 공동체의 일원으로 적극 존중하고 환대한다. 고전부터 현대까지, 문학에 수용되고 기록된 인물들의 특성은 조금씩 넓어졌다. 다만 시대와 상관없이 인간의 사랑, 분노, 정열, 슬픔 따위의 욕망과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이를 통해 개인의 이기심과 문제의식을 드러내며 세계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고유의 속성은 불변하다. 그것만으로 문학은 다른 장르보다 한 발 앞서 있다.

이주란 작가는 '모두 다른 아버지'라는 소설로 유명하다.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다. 다만 이번 신간인, 그간 발표한 단편을 엮은 '별일은 없고요?'를 읽으며 그만이 써낼 수 있는 이야기들을 찬찬히 살폈다. '별일은 없고요?'는 2019년부터 2022년까지 그가 문예지나 웹진 등 지면에 발표한 단편 8편이 수록된 소설집이다. 차례대로 '별일은 없고요?' '사람들은', '어른', '여름밤', '위해', '이 세상 사람', '서울의 저녁', '파주에 있는'이 실렸다. 긴 호흡을 요하지 않아 가볍게 읽을 수 있다.


이들 단편 소설들은 주인공도 서사도 다르지만, 유사한 플롯을 가진다. 연작 소설이라고 봐도 될만큼 등장인물과 내용이 묘하게 이어진다. 특히 '별일은 없고요', '사람들은', '어른', '여름밤'은 등장인물을 변주한 한 편의 이야기로 느껴진다. 수연, 두 명의 은영, 엄마, 박경미, 경아가 거의 차례로 등장하여 서로에게 '사랑'이라는 이름의 '따스함'과 '그리움'을 표출한다. 이때 그리움은 과도하게 표현되지 않는다. 있는 듯 없는 듯, 잔잔하게, 은은하게, 별 것 아닌 것처럼 주변화된다. 응축된 그리움은 '여름밤'에서 은영의 독백으로 폭발한다. 그러나 막상 그리워하는 대상이 돌아왔을 때 은영은 다시 건조해진다. 마음으로는 주체할 수 없음에도, 그 마음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지도, 살갑게 말하지도, 근황을 꼬치꼬치 물어보지도 않는다. 많은 말들이 축약되고, 들뜬 감정이 감춰진다. 그것은 '은영'이기에 가능하다. 존재만으로 본인의 그리움과 견뎌온 긴긴 시간의 부재를 이겨낼 수 있는 사람. 표현에 공백을 둠으로써, 사랑을 드러내는 사람. 언뜻 답답하고 껄쩍지근해 보이지만, 이것이 은영이, 아니 저자가 사람들과 궁극적으로 소통하는 방식임을 느꼈다. '어른'에서 나와 아주머니의 만남과 헤어짐도 마찬가지다. 뭘 하고 지냈는지, 어딜 갔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서로 구체적으로 묻지 않는다. 할 수 있는 말들을 삼킨다. 서로에 대한 마음을 확인하면서, 믿음은 단단해지고 애틋함은 태산이 된다.

그리움은 공간에 묻어 있기도 하다. 특히 이들 소설의 주인공은 과거에는 서울에서 태어나고, 살았을지언정 지금은 중소 도시나 농어촌에 살고 있다. 이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서울로 표방되는 대도시를 벗어났다. '별일은 없고요?'의 나는 사직서를 낸 뒤 서울에서 도망쳤다. '위해'의 수현은 대도시 입성에 실패한 세태로, 주변 반지하 주택에 머문다. '서울의 저녁'에 '나'도 서울에서 내려와 충북 진천에서 엄마와 만두가게를 운영한다. 그들에게 서울은 과거의 추억이나 아픈 기억이 지속적으로 환기되는 공간이자 떠나지 않고 남은 친구들을 보러 가는 곳이다. 서울에 거주했던 풋풋한 시절의 그리움과 쓰디쓴 기억으로 인한 상처가 상존하는 이중적인 공간인 것이다.

또한 이주란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한국 사회가 '욕망'하는 인간상과 거리가 멀다. 정확히 반대다. 우선 대도시에 살지 않는다. 중소 지방의 삶이 답답하다 여기면서도 이곳에서의 한적함과 여유를 잃고 싶어 하지 않는다. 언제 잘려도 이상하지 않을 일자리로 생계를 유지한다. 결국 일상적으로 경제적 빈곤을 겪는다. 비닐하우스, 반지하나 원룸 등 불안정한 주거를 전전하고, 가까운 가족 또는 친구가 멀리 떠났거나 그들과 기약 없는 이별을 했다. 인간 관계가 활발하지 않다. 성장기에 아동 학대, 가스라이팅 등으로 불우한 시절을 보내 PTSD에 시달리고, 편부모 또는 조손 가정에서 자랐다.

저들은 우리 사회 곳곳에 존재한다. 너무 많아서 찾기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존재는 국회에서도, 언론에서도 조명되지 않는다. 마치 없는 사람처럼, 철저하게 '비가시화'되고 배제되었다. 한국 특유의 능력주의와 자기계발 담론이 '가난한 사람의 특징/흙수저 특'으로 규정하고 배척한 삶이기 때문이다. 이는 흔히 능력주의의 끝판왕에 있는 사람들의 삶,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입학해, 대기업에 취직하고, 서울 주요 도심에 아파트를 소유하며, 페라리나 벤츠 같은 비싼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인생'과 정확히 대치된다. 여기에는 이들을 목표로 표를 갈구하는 정치권과, 일부 계층만 정치적 주체로 호명하는 정치권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언론과, 상류층의 일상만을 컨텐츠 소재로 다루는 방송업계와, 최상류층의 구매력으로 트렌드 지표를 만들어내는 광고 및 마케팅업계도 얽혀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어딘가 부족하고 엉성한 취급을 받는 사람들을 이야기의 주체로 소환한 작가가 고맙다.

사회의 치부를 가감없이 드러내고, 그 치부로 고통받는 약자들의 삶을 가시화하며 문제의식을 표현하는 매체는 한국에서는 문학이 유일해졌다. 이런 문학을 심층적인 정보량과 쓸모를 이유로 등한시하던 지난날을 반성한다.

이주란의 소설적 장치는 더 있다. 매우 의도적으로 보이는데, 그는 대화를 큰따옴표로 쓰지 않고, 산문체로 기록한다. 이로써 대화와 글의 경계가 흐려진다. 어딘가 비어 있는, 조금 싱겁기도 한 짧고 굵은 담화는 한 편의 유려한 산문이 된다. 서사를 잇는 또다른 이야기가 된다. 대화가 소설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서 따옴표를 쓰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아니면 이야기를 대화의 총합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인간의 생에서 말하기가 중요하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던 걸까. 말하기를 독백의 연장선상으로 여기는 걸까. 어떤 의도든 새로운 시도는 무한한 상상을, 다양한 동력을 불러일으킨다. 보는 재미도 있고.

다른 이야기도 인상깊게 읽었지만, 특히 <서울의 저녁>을 흥미롭게 읽었다. 개인적으로 저자의 산문체가 가장 빛을 발하는 단편이라고 생각한다. 곱씹어볼 여지가 있는 의미 있는 담화가 많이 나오기도 한다. <서울>이라는 공간에 투영한 우월하지 않은 시선도 마음에 들었다. 가장 좋은 건 화자인 '나'의 세심한 관찰력과 좋은 기억력이다. 화자에게 서울은 재희와 보라와 함께한 기억이 여전히 생생한 도시다. 그러나 간만에 만나는 친구 보라를 예전의 기억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보라가 살고 있는 집으로 가는 길목마다 보라와 재희와의 추억을 자동으로 소환한다. 보라가 자신이 산 12만 원 컵을 자랑할 때, 하고 싶은 건 반드시 이루는 보라의 기질을 단번에 떠올린다. 슬픔과 우울을 잘 감추는 대신 기쁨을 숨기거나 삭이는 데는 약한 성격도 구체적인 에피소드와 함께 회상한다. 서울이라는 도시에 덧입힌 보라와 재희와의 청춘을 소설 내내 그대로 재현해낸다.


현재 보라가 홀로 사는 '초록 지붕 집'에서는 재희와 '화자', 보라가 셋이서 산 주택과 자주 간 단골 슈퍼가 보인다. 화자는 '보라'보다 이 사실을 먼저 환기시킨다. 보라의 집에 와서도 화자는 끊임없이 과거를 재생한다. 보라가 수건에 얼굴을 닦는 모습을 보고 과거 보라의 버릇부터, 누가 밥을 하고 머리카락을 치웠는지, 좋아하던 차와 커피의 취향을 기억해낸다. 나아가 보라와 재희의 자취방에 제 집 드나들듯 방문한 시절과 셋이서 같이 살기 시작한 때, 청년 주거 관련하여 티비에 출연했던 시절을 회상한다. '나'는 주기적으로 과거를 들추어낸다. 지우지 않은, 재희와 주고받은 문자 메시지를 본다. '재희'와 '보라'를 빼고 20대를 설명할 수 없으므로. 그들에게 의지했기에 살아냈던 시절이 있었으므로.

재희가 없는 지금, 화자에겐 많은 것이 어색해졌다. 친하게 지내던 준영과의 관계는, 아물지 못한 기억과 3년의 세월이 겹쳐 어색해졌다. 둘의 사이가 나쁘진 않다. 다만 둘은 서로에게 미안한 존재가 되어,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꺼내 거리를 좁혀 나갈지 좀체 감을 잡지 못한다. 이들에게 재희는 여전히 살아 있다. 그를 정식으로 보내주지 못했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우리는 제사가 아닌 방식으로, 마음으로, '애도'하고 '추모'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으니까.

그래서인지 재희를 위한 제사를 지내는 이야기는 참 감동적이었다. 제사를 지내보지 않은 보라와 '내'가 준비하는 제의는 어설프다. 그러나 주방 일에 서툰 두 친구가 직접 전을 부치고, 산적을 만들고, 소고깃국을 끓이고, 나물을 버무려내는 정성은 그 어느 제삿상과도 비교가 불가능하다. 형식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하니까. 이들의 상차림은 재희를 향한 사랑과 그리움이 현재 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분명히 암시한다. 재희를 모르는 친구들까지 당사자를 진심으로 추모하려는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사랑은 실과 같아서, 누가 끊지 않으면 이어지는 거라고.' 어느 책에서 본 대사가 자꾸만 맴돌았다.


세상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 <서울의 저녁>에는 재희의 죽음이 그렇다. 다행히 어느 누구도 재희를 책망하지 않는다. 왜 나를 두고 가버려야 했냐고 따지지 않는다. 그 이유를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나올 수 있는 모든 물음표를 금기처럼 넣어둔다. 그저 재희가 안치된 공간을 계절마다 방문하며 안부를 묻고, 같은 모습으로 있는 그를 넌지시 그리워한다.

돌아오지 않을 말임을 알지만, 그렇게라도 내뱉지 않으면 화자는 알 리 없는 물음에 갇혀 스스로를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간만에 밀도가 넘치지 않은, 사이 사이 여백이 있는 이야기를 읽었다. 일상 곳곳에 스며든 따스함과 희망을 세심하게 포착할 줄 아는 이들만이 쓸 수 있는 글이 매우 반갑다. 죽음, 귀향, 폭력, 환대, 그리움 등 쉽지 않은 주제들을 명확하되 지나치게 무겁거나 자극적이지 않게 쓴 이야기를 필요로 했다. 이 책의 글이 다 그랬다. 천천히 속이 뜨끈해지는 잘 우린 곰탕 같았다. 오은 시인이 추천사를 쓸 정도면 증명됐다고 생각한다. 나를 살게 하는 지점은 어떤 것인지,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사소한' 디테일을 찾아보며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구절을 기재하며 마쳐본다.

소녀는 자라서 아줌마가 되었다.
할머니가 아니라 아줌마라고 쓰여 있어 처음에 누구의 이야기인가 싶었지만 모두의 이야기라도 괜찮을 말이었다. - P98
서울 다시 안 와?
올 수도 있을 것 같아.
근데 있잖아.
응.
보고 싶었어.
진심이었고 웃길 바랐는데 보라는 울었다. 평소 거의 울지 않는 보라, 나는 보라가 운 김에 더 울라는 의미로 봉투를 내밀었다. - P234
재희야,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재희에게 물은 다음에 대답을 조금 기다렸다. 나는 다시 재희의 이야기가 듣고 싶다.-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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