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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영님의 서재
  • 지구를 쓰다가
  • 최우리
  • 15,120원 (10%840)
  • 2023-04-13
  • : 604

이상하다. 날씨도, 자연도, 인간도. 이중 가장 대체 불가능할 만큼 잔혹하고 폭력적인 존재는 단연 인간이다. 윤택한 삶을 위한 끝없는 욕구와 이기심 때문에 이상기후가 발생했고, 자연과 생물 다양성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다.


말도 안 되는 짓을 시시각각 벌여대는 80억의 인구를 너그러이 품는 지구가 몸살을 앓고 미쳐가는 것은 당연하다.

디스토피아 문학에서나 볼 법한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는 어느덧 하나의 명제가 됐다. 누군가 극단적이라 손가락질하던 물음은 언제고 도래할 수 있는 미래로 변모했다. 그레타 툰베리 등 용감한 z세대를 중심으로 환경 운동이 널리 퍼졌고, 덕분에 그들을 손가락질하는 작자도 기후 위기의 심각성은 알아 버렸다. 탈플라스틱, 플로깅, 용기내 챌린지(다회용기 사용), 탄소중립실천포인트제 등은 각종 자원을 희생시켜 얻은 편리함을 다시 내어주는 과정이다. 기후 우울증의 시대에 무력감에 젖는 대신 과도하고 불필요한 껍데기를 하나씩 벗겨내기로 결심한 사람이 많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트위터와 인스타 같은 SNS에 꾸준히 업로드되는 친환경 컨텐츠는 널리 공유되어 일종의 'E'SG 유행을 만들어냈다. 특히 탈플라스틱과 플로깅의 인기는 꽤 뜨거워서 지자체에서도 관련 캠페인을 벌일 정도였다. 국가에서도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인식한 이상, 더 이상 환경 보호의 필요성과 당위는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물질 만능주의와 현대의 자본주의제는 인간에게 아낌없이 주는 비인간을 고려하지 않는다.

멸종위기종이나 천연기념물은 암암리에 이루어지는 밀매와 사냥으로 점차 우리에게 희귀한 존재로 남는다. 인간은 그런 동물을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관리하고자 동물원의 명분을 내세운다. 그러나 동물원은 제한된 공간에 갇힌 동물 고유의 야생적 습속을 약화시키고, 동물을 철저히 인간의 유희를 위한 도구적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시멘트 바닥과 조잡한 식생으로 이뤄진 좁은 공간은 아동 키만한 철제 울타리에 막혀 있다. 굵다란 쇠창살 사이로 수많은 사람의 부담스러운 시선과 이목을 집중시켜 좋은 포즈를 유도하려는 몸짓을 정신없이 받아낸다. 울타리 바로 앞까지 와서 위험할지도 모르는 먹거리를 쥐어주는 사람을 어떻게든 반겨줘야 한다. 동물원이 이익 창출만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며 관람객 유치에 앞장설 때, 정작 관광 대상인 동물이 인간을 거부할 권리는 고려되지 않았다. 동물이 본연의 식생과 자연을 누리며 살 권리를 보장해주지 못한다. 식사는 특별식이 아닌 이상 인공 배합 사료만 무한정 배급된다. 밥을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두세평 남짓의 슬레이트 공간을 반복해서 돌아다닌다. 동물은 개체군 고유의 습성과 행동 양상을 영영 잃어버린다.


한동안 가지 않다 최근 동물원의 변화가 궁금해 방문했다. 내가 보았을 때 그곳은 여전히 동물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육체적으로 박제하고 정서적으로 학대했다. 좁은 아쿠아리움에 펭귄 열댓 마리를 가두는 공간도, 영업 시간 내내 인간의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시선에 노출되는 공간도 변하지 않았다.


지구는 뜨거워지고 기후 위기는 더욱 심화되었다. 지구에서 살아가는 생물들은 각기 다른 방향의 파국을 맞고 있다. 한쪽에서는 IT를 이용한 신기술이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진다. 그 기술의 대다수는 인간을 눈먼 편리함에 노출시킨다. 다른 한 쪽에서는 갑작스러운 이상 기후와 자연 재해에 속수무책으로 죽는 사람이 있다. 동물도 다르지 않다. 어떤 동물은 뜬장에서, 방치된 사육장에서 구조되지만, 전염병과 인수감염병으로 살처분당하는 동물도 있다.


기술의 황금기와 생존이 위태로워진 시대라는 설명은 언뜻 이율배반적이라 양립할 수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 비대칭적인 수식은 오늘날의 지구를 명확하게 관통하는 키워드다. 동시에 환경에 관한 논의는 배부른 부르주아의 담론에서 그치지 않고, 살아가는 모든 생물과 비생물에게 해당되는 보편적인 담론이라는 사실을 말하기도 한다. 특히 발언권이 부족한 비생물과 저개발국 국민일수록 기후재난에 취약하기에 다른 무엇보다 가장 시급한 논제이기도 하다. 몰디브와 사모아, 파푸아뉴기니, 피지, 투발루 등의 섬나라들이 왜 기후 재난 성명을 내며, 선진국의 강제적이고 효력있는 책임을 촉구하겠는가. 다만 이들의 목소리는 강대국의 힘겨루기와 선진국의 의제에 묻혀 빛을 보지 못한 채 스러지곤 한다.


지금의 지구는 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아 보인다. 어떤 때는 지구를 지키려는 일부의 노력도, 효과도 무익하게 보인다. 이러한 회의주의적이고 패배주의적 사고에 사로잡히면, 모든 일이 지구의 멸망으로 수렴하는 듯 보여 허망하다.


물론 내가 비관적일 때조차도 누군가는 탈플라스틱을 실현하고, 일회용품을 사용하지 않으며, 배달 음식을 시키지 않는다. 이에 더해 국가 정부나 사기업, 세계 주요 건물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하고, 화력 발전소, 골프장 등 반환경적인 건물이 들어서는 부지 앞에서 농성을 벌이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일부는 자본을 앞세운 세계 기업과 국가 권력에 억울하고 비참하게 죽는다. 그러나 친환경을 이야기하면 목숨이 위협받는 순간이 반복되어도, 행동을 포기하지 않는 활동가들이 있다. 그들을 응원하는 시민들은 세계 곳곳에서 SNS를 통해 지지와 연대의 물결을 일렁인다.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다는 말은 환경운동에도 진실로 들린다. 덜 쓰고 더 아파하는 마음이 모여 오존층이 회복하는 기적이 일어난 게 아닐까?


인간이 지구를 여러 방면에서 괴롭혔음에도 아직까지 그런대로 잘 버티고 있음에 감사한다. 저자도 비슷한 인식을 생각을 가졌다. 유망한 언론 '한겨레'에서 '기후변화팀'에 소속되어 환경 관련 취재를 이어가는 기자 최우리의 신작 '지구를 쓰다가'를 보면 사랑하는 환경이 파괴되는 시대에 사는 사회인의 복잡다단한 시선이 나타나 있다. 여기에는 서울 토박이인 저자가 사라져가는 동네의 면면을 기억하고 기록하려는 마음, 동물의 아픔이라면 종을 가리지 않고 나서서 애쓰는 의지, 활동가가 아닌 사회인이기에 일부 환경 의제(EX 비건)와 타협할 수밖에 없는 유연함,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산업 재편 과정에서 일어날 사회적 혼란과 당사자의 실직을 걱정하는 섬세함, 환경 감수성이 높아서 따라붙는 유별나다는 낙인과 존중받지 못하는 외로움에 대응하는 방식, 치열하게 고민하고 분노하면서도 냉철함을 잃지 않는 기자 정신, 모든 환경 문제는 에너지와 자원 분배 문제, 산유국과 선진국의 정치적인 욕망과 연관되어 있음을 설명하는 구체적인 논리가 들어 있다.


결국 저자는 환경 문제는 한 가지 원인이나 결과로 촉발하거나 환원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환경 의제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개인과 사회 집단 간 뚜렷한 욕망의 충돌, 불평등한 국제 관계의 대립, 경제 발전 논리만을 중시하는 자본주의의 황금만능주의적 폐해를 골고루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 중심의 물질적 자본주의를 갈아엎거나 지속가능한 자본주의를 고안하여 세계 질서를 재편하는 것이 가장 순리일 테지만, 당장 실현가능성은 낮다. 


특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통 화석 연료의 수급 불안, 미국이 주도하는 러시아와 중국을 배제한 공급망 구축, 세계화 역행, (러시아/중국, 오펙 등) 에너지 부국의 자원 무기화, 자국 경제 발전을 위한 보호무역 확산, 기후위기로 인한 식량난, 고금리로 인한 저개발국과 개도국의 디폴트(채무불이행) 선언, 주요 국가 은행의 뱅크런, 대규모 기업 파산은 국가별 ESG 진전에 관한 유의미한 제안을 멈추거나 없던 것으로 되돌리며, 자본주의 재편을 위한 새로운 시도를 늦춘다.


그러나 무력한 구조 앞에서 저자는 쉽게 움츠리지 않는다. 바꿀 수 없는 상황에 매달려서 좌절하기보다, 당장 내 삶에서 실천하고 바꿀 수 있는 활동을 찾아 해봄으로써 소소한 기쁨을 느껴보기를 조심스레 권한다. 그렇다고 개인에게 지나친 책임을 강조하는 주장은 경계한다. 모든 실천은 개인의 온전한 '선택'의 영역이기에, 하지 않을 선택도 같은 시민으로 존중해줘야 한다고 말한다. 개개인의 실천보다 중요한 건 국가와 기업의 문제 인식과 의미있는 노력임을 강조하면서.


저자는 일상에서 페트병 라벨 떼서 분리배출, 포장이 최소화된 제품 구입 및 이용, 탈플라스틱, 일회용품 지양, 장바구니와 손수건 이용, 텀블러 사용, 실내 난방 대신 옷을 덧입어 온도 향상, 채식 지향, 대중교통 이용 등을 실천한다.


이런 작고 기본적인 '일'들이 모여 친환경을 선도하는 사회적 '흐름'이 만들어질 것으로 저자는 믿는다. 그 흐름은 굽이치며 뒤로 꺾일 수도, 멈출 수도 있으나 이미 형성된 '흐름'은 되돌릴 수 없으므로 점진적으로 나아진다고 본다. 그런 단계적 '희망'이 탈탄소, 탄소중립, 탄소 발자국 규제의 제도화를 이뤄냈고, 기업의 ESG 경영 의무 공시라는 성과를 만들었다.


앞으로도 기후 위기를 억제하려는 다양한 기술적, 행정적 시도들이 펼쳐질 것으로 기대한다. 기업들은 (특히 한국) RE100 등 탈탄소 요구를 발빠르게 받아들여, 친환경 발전으로 지속가능한 수익을 달성하는 모델을 연구해야 한다. 기업에게 탄소세(배출한 탄소량만큼 세금 부과), 탄소배출권 거래제, CBAM(유럽판 IRA -탄소국경조정제도-), IRA(인플레이션 감축법)는 위기인 듯 보이나 장기적으로 기존 산업 구조를 재편할 '기회'다. 철강, 내연기관 자동차 등 법의 수혜를 받을 한국 대표 산업군의 현재 산업 품목이 향후의 기업 운영에 불리함을 인정하고, 모델을 고도화하거나 전환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아니면 전기차, 이차전지 소재 등 기존 자동차, 소부장 기업들이 그랬듯 다른 먹거리를 찾을 수밖에. 개인적으로는 철광석을 사용하지 않는 '철강'을 만들 수는 없나 궁금하다. 동물을 희생하지 않는 대체육이 만들어졌듯.


철광석 없는 철강은 철광석 수입 비용, 철광석을 제련하는 석탄 수입 비용을 모두 아낄 뿐 아니라, 제련 과정에서 배출하는 각종 오염물질과 폐수, 매캐한 매연도 지금보다 줄일 수 있을 것이다. 포항과 광양 주민들이 깨끗한 공기에서 숨 쉬고 살 권리도 보장될 것이다. (포스코 공장이 있는 포항과 광양의 대기 오염은 한 해 506명의 조기 사망을 유발한다고 한다.

출처 : '핀란드 에너지, 청정대기연구센터(CREA)와 기후솔루션의 '제철소와 숨겨진 진실' 보고서)


다행히도 이미 국내외 철강 업계가 화석연료 없이 '수소'를 통해 철강을 만드는 기술을 개발하는 움직임이 있다. 2050 탄소중립을 선언한 포스코는 CCUS (탄소포집 저장 활용 기술), 그린수소를 활용한 수소환원제철 공정을 통해 온실가스 배출과 화석연료 사용량을 감소하고자 한다. 나아가 지속가능한 제조 방식으로 넷제로와 탈탄소 규제에 대응하고, 향후 활성화될 친환경 고부가가치 철강 수요에 대비하려 한다.


그래, 하루가 멀다하고 복잡하고 슬프고 아프고 괴로운 일이 가득한 지구촌에서도 희망이 움틀 수 있는 것은 변화를 지향하는 이들의 용감한 행동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현재의 편리함이 온당치 않다고 줄기차게 주장하는 학자들과 Z세대, 기후 위기로 눈에 띄게 소실되는 동식물 생태계를 외면할 수 없는 농어민들, 기후위기를 겪는 당사자들을 취재하여 세상에 의미 있는 변화를 촉구하는 언론인들, 전기든 물이든 물건이든 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 쓰는 노고를 감수하는 시민들, 산과 바다에 방치된 쓰레기를 치우러 귀한 발걸음을 하는 봉사자들이 한국에도 여전히 있다.


그런 사람들이 모두 죽지 않고 살아있는 한 세상은 반드시 마냥 좋은 세상이 될 수는 없더라도 긍정적으로 변화하며, 이를 부인하거나 역행하는 목소리는 거센 파고로 밀려 오더라도 꺾이는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그렇게 믿을 수밖에.


이 책은 내게, 이상 기후와 재난 빈도가 높아지며 발생하는 불안을 없애기는 힘들어도 덜어낼 수는 있다고 말한다.


그러려면 거스를 수 없는 변화로 인한 스트레스와 분노, 절망과 우울이 공동체 성원에게 각인된 정서임을 인정해야 한다. 이를 2017년 미국 심리학회가 정의하고 WHO가 그 심각성을 경고하는 '기후 우울증/기후 염려증'으로 부른다.

사회적 우울장애의 일종으로서, 해수면과 기온 상승, 자연재해 급증 등 이상기후 진행 속도에 비례하여 확산되고 있다. 의학적으로 공인된 질병은 아니지만, 일부 국가에서는 외상 전후 스트레스 장애의 일종으로 보기도 한다. 특히 자연과 가까이 살아가는 사람들 - 눈앞에서 빙하가 녹는 참상을 목격한 알래스카 원주민이나 거대한 메뚜기 떼 출몰로 하루아침에 농사를 망친 농민들은 - 원인불명의 자가면역질환 발병 비율이 높고, 심각한 정신적 후유증에 시달린다. 그 뉴스를 미디어로 접하는 시민 또한 간접적인 피로감과 죄책감, 공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가 이상 기후를 목격하거나 지켜보며 느끼는 상실과 체념, 미래의 기후 변화를 상상할 때의 암울함과 생존의 불안은 특히 청년 세대에게 집단적인 고통임을 상기해야 한다. 출산 파업/거부 운동이 기후 위기 타파 해법으로 각광받는 현실은 청년 세대가 기후 위기를 일상을 위협하는 원인이자 결과로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는 반증이자 예측 불가능하고 안전이 담보되지 않은 미래를 후세에 물려주지 않으려는 집단 의지를 대변한다. 나도 얼마나 이상 기후와 재해가 심각해질지 알 수 없는 미래에 살아갈 아이들이 안쓰럽다. 어린이는 사회와 국가를 위해 꼭 필요한 존재지만, 지구는 이미 수용할 수 있는 적정 인구를 초과한 지 오래되었다. 바야흐로 자본도, 인구도 '과잉'된 시대다. 출산 파업을 지지한다. 어린이는 사회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존재다. 그러나 이 사회는 아이를 가질 자격이 없다는 게 내 지론이다.


여하튼, 기후 우울증은 도래할 기후 위기의 시대를 어떻게 이겨낼 것인지 생각해볼 수 있는 신호다. 모두가 환경 오염의 심각성은 알고 있다. 이제 특정 인간에게만 유리한 편리함과 물질 만능주의를 조금씩 덜어내고, 지속가능한 '발전'과 비인간, 비생물과의 슬기로운 '공존'를 꾀할 때다.

느리게, 조금씩. 내가 할 수 있는 일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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