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인공은 17살인 인첸티드 존스이다. 형편이 넉넉지 않은 집에 살며, 세 명의 동생을 둔 장녀이자 노래와 수영을 사랑하는 흑인 여성이다. 할머니 집을 떠나 백인이 대다수인 지역에서 거주하며, 흑인이라곤 친구 한 명이 고작인 고등학교를 다닌다. 우연한 기회로 당대 최고의 밀레니얼 가수 코리 필즈를 오디션 심사위원으로 만나며 둘의 인연이 시작된다.
그들은 메신저를 통해 급속도로 가까워지며, 17살 인첸티드와 28살 코리 필즈는 연인이자 노래 파트너로서 발전한다. 문제는 그릇된 성욕에서 발생한다. 코리 필즈는 인첸티드가 곁에서 벗어나기를 원치 않았고, 잘못된 방식으로 소유하고자 했다. 휴대폰을 빼앗아 유일한 친구인 갭과의 연락을 차단하고, 부모님과 동생의 접견 요청과 타인과의 대화를 금지하여 그를 제외하곤 기댈 곳이 없게 만들었다. 은은한 가스라이팅과 그루밍 성폭력으로 인첸티드를 협박하고, 옭아매고, 고립시켰다. 인첸티드는 어딘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저항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하나 곧 무력해진다. 이 상황을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절망감과 그에 대한 혐오감을 느끼면서도, 사랑했던 상냥한 연인과의 호시절을 그리워하며 여전히 애정을 갈구한다. 이러한 양가적인 감정으로 괴로움에 빠지는 사이, 폭력으로 점철된 나날은 끊어질 듯 말 듯 이어진다.
우연한 계기로 코리에게서 구조되고 나서도 세상은 시끄럽다. 코리는 쉴 틈 없이 주변인을 통해 인첸티드에게 접근하고 스토킹함으로써 위협을 가한다. 그것도 모자라 당사자의 동의 없이 녹화한 섹스 비디오를 세간에 공개하여 인첸티드에게 성적 불쾌감과 흔히 딸려오는 낙인의 꼬리표를 안긴다. 인첸티드와 가족의 일상은 완전히 망가진다. 변호사와 소수의 구성원을 제외하면 세상은 인첸티드를 돈 많은 톱스타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더러운 여성으로 규정하고 비난한다. 인첸티드는 이 사태의 담판을 지으려 선택의 여지 없이 코리를 만나기로 한다.
언뜻 금방 사그라들 것으로 믿었던 각종 추문과 꼬리표는 코리의 죽음으로 격화된다. 경찰은 코리 사망의 유력한 제1용의자로 인첸티드를 체포한다. 가까운 가족조차 그를 의심하고 불신은 깊어진다. 사건의 열쇠를 풀 단서를 기억하고 탐색하면서도 2차 가해를 당하며 우여곡절을 겪는다. 그러나 친구인 갭과 다시 재회하고, 극적으로 경찰이 발견하지 않은 주요 증거를 찾아내어, 인첸티드의 혐의가 풀린다. 큰 전환점을 맞은 소설은 가해자 코리에게 성범죄와 가스라이팅을 당한 피해자들의 연대와 각성, 인첸티드의 일상 복귀로 마무리된다.
저자는 작가의 말에서 이 일은 완전한 허구라고 밝혔다. 하지만 2023년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20대 여성의 입장에서 이 이야기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여전히 어딘가에서 발생하고 있을 뼈아픈 진실이다. 우리는 이름 모를 수많은 인첸티드를 알지 못한다. 안다 해도 피해 고통의 신빙성을 평가하고, 피해자가 가해자의 인생을 얼마나 망쳐놓고 있는지에 집중하며 그들의 인생을 산산 조각낼 것이다. 이름난 가해자의 인생을 발목 잡았다며 오징어 땅콩 먹듯 대놓고 분풀이할 것이다. 성범죄 피해자가 가해자의 욕구를 자극하여 범죄 당할 구실을 만들었다고 여전히 손가락질 하는 나라다. 짧은 의복을 착용하고, 밤늦게 다녔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들이 남성의 권력형 성범죄를 남용하고 용인하는 세상이다. 성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 스토킹범죄 처벌법이 제정되었지만 성폭력 피해자를 대하는 시선은 백래시를 맞으며 심각하게 퇴행했다.
그 백래시에는 이준석을 위시한 2030 남성들과 라떼를 좋아하는 장노년층이 있다. 여성혐오를 줄기차게 외치는 늙다리 정치권 관료들의 권력과 구시대 담론에 합세한 이십남들이 있다. 해일 시위 등 백래시를 막고자 하는 시도는 계속 되었으나 혐오의 스피커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여성가족부 폐지와 무고죄 처벌 강화를 공약으로 낸 사람을 국가 대표로 선출한 선례를 냈다. 요즘 시국을 보면, 백래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도대체 어디까지 사회 안전망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죽어야 대대적인 각성이 일어날지 생각한다. 여성이 견디기 힘들 참혹한 시간이 언제 끝날까 두렵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세에 영웅이 등장하듯, 성범죄 피해자를 전적으로 믿고 연대하는 여성들이 있다. 알려지지 않은 사건을 공론화하고, 미진한 초동 수사를 비판하며, 엄벌 탄원서를 받고 방청 연대를 다니는 등 사법부에 강력 처벌을 요구함과 동시에 피해자에 가중된 경제적 곤궁과 정서 불안정을 해소할 방도를 적극 마련하여, 일상 복귀를 지원하는 멋진 여성들이 있다. 성범죄 피해자가 법정에서 고립되거나 외롭지 않도록 방청 연대(=재판 모니터링) 문화를 만들어낸 '연대자 D'('그림자를 읽으면 길이 된다' 저). 텔레그램 성착취물 유포 사건(N번방 사건)을 추적하여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추적단 불꽃('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 저자 박지현과 원은지.)과 N번방 가해자들의 재판을 쫓아다니고 엄벌 탄원을 촉구한 팀 eNd('그래서 우리는 법원으로 갔다' 저), 텔레그램 등 SNS 모니터링을 통해 디지털 성폭력 근절에 앞장선 팀 ReSET, 한국 최대의 포르노 사이트 소라넷 폐지를 시작으로 유명해진 팀 DSO('디지털 성폭력 아웃'이라는 뜻), 김주희 간호사가 대표적인 해일 팀, 윤지선 교수, 이외에도 핫펠트, 변영주 등 수많은 문화예술인과 페미니스트 창작자, 익명의 여성들이 있다.
Grown에서도 인첸티드를 물심양면 돕는 사람이 있다. 부모님과 변호사 루이와 풀리, 친구 갭, 할머니, 승무원 니콜, 여성 경찰관, 윌앤드윌로우 웨스트체스터 지부 회원과 학부모, 가해자에게 학대당한 피해 여성들의 모임인 코리 어나니머스가 있다. 물론 그들 모두가 처음부터 인첸티드를 믿은 것은 아니지만, 결국에 피해자의 편에 섰다는 것이 중요하다. 인첸티드에 가해진 스토킹과 집 협박, 2차 가해를 비난하고, 그가 정서적으로 안정을 취할 풍토를 만들며, 코리 필즈에게 학대당한 여자들을 수소문하여 모음으로써, 피해자가 겪은 고통의 신빙성을 의심하지 않도록 한다.
그런 사람들과 별개로, 가해의 원인을 미성년 흑인 여성에게 전가하는 사람들도 등장한다. 현실에도 이렇듯 수많은 2차 가해자들. 그들이 피해자와 가족을 가스라이팅하고 비난하는 적나라한 묘사가 등장하여 읽는 내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코리와 인첸티드는 같은 흑인이지만, 가부장제 사회의 남성중심 사고는 변하지 않아 미성년 흑인 여성의 말은 쉽게 무시되고 거절되며 끝없는 의심을 받는다. 피해자는 인종 차별과 성차별과 가스라이팅의 삼중 억압 속에서 자신의 고통을 인지하면서도 온전히 믿지 못하며, 학대의 신빙성을 의심하다 끝끝내 체념하여 사랑의 행위로 포장하는 무력함을 보인다. 피해자는 무감각한 태엽 인형이 된다. 살아 있는 인간이지만, 가해자와 주변인들의 세뇌 속에 그들의 요구대로만 행동하고 움직이는 바비 인형이 된다. 여기에 능동적인 주체로서의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정폭력 피해자가 사랑으로 둔갑한 가해자의 억압에 벗어나지 못하고 길들여진 동물처럼 순종하듯.
오랜 시간 가해자의 폭언과 집착을 감내하고 생활의 제약을 겪은 피해자의 삶은 환경이 변해도 한순간에 나아질 수 없다. 자극적인 가십의 소용돌이와 감정의 혼란에서 본인을 보호하고, 진실을 바로잡아, 망가진 일상을 회복하고 피해자가 아닌 본인의 이름으로 살기까지는 오랜 시간과 인내와 지지가 필요하다. 결코 서두르면 안 된다. 천천히 집 밖을 나오고, 사회에 진입하기를 기꺼이 기다려 주어야 한다. 혼자서는 힘들테니 적절한 심리/정신치료와 해바라기 센터 등 공공 보호 기관과의 연계도 중요할 것이다.
흑인 여성은 미국에서 가장 취약한 존재라고들 한다. 흑인과 여성은 각 집단에서 가장 천대받은 종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흑인과, 여성, 흑인 여성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한국이 여성 피해자를 '꽃뱀'으로 비난하듯.
그나마 미국은 범죄의 강력 처벌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한국과는 분명 다르다. 저자가 '에필로그'에서 언급한 R 캘리의 경우, 미성년자 상습 성폭행으로 징역 20년을 받았다. 그가 한국인이었다면 나이를 고려하여 적은 형량을 받거나 무혐의가 떴을 것이다. 무혐의나 무죄 판결이 심심찮다. 거짓말 안 하고 2~3일에 한 번은 본다. 5060 남성 판사들의 증거 불충분과 젊은 남성의 창창한 미래를 염려하는 전형적인 가해자 우위 판결은 피해자의 고통을 부정하고, 그들의 입지를 좁혀 제2, 3차 범죄가 일어날 여지를 둔다. 대부분 여성이 피해자인 성범죄 사건 특성상, 사법부가 성적 학대와 그로 인한 고통, 심적/경제적 어려움을 가볍게 여긴다고밖에 해석할 수 없다. 어쩌면 성욕을 가진 남성이 여성에게 당연히 할 수 있는 행위라는 추악한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신상 공개 횟수도 많지 않기에 우리 근방에 있을지도 모르는 여성을 괴롭힌 가해자들의 얼굴과 주소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불법 약물이 든 보라색 음료를 먹지는 말자. 누가 주거든 매몰차게 거절하자. 당신들이 술기운에 몽롱해지지 않고, 또렷하고 명징하게 순간을 느끼며 살아가길 바란다. 경찰과 법원과 세상 사람들이 한통속이어도, 매일이 괴로워도 부디 '나는 나를 지킬 수 있다는 마음으로' 살아주셨으면 한다. 당신을 돕고자 기꺼이 손 내밀어줄 사람이 분명 있음을 안다. 과거의 족쇄를 풀어낼 수 있다. 책 속 인첸티드의 용기가 성범죄를 겪은 여성에게 한 줌의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어젯밤에 나는 또 다른 코리를 만났다. 그렇게밖엔 설명할 수 없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술을 마시면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게 틀림없다. 술을 마시면 필름이 끊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잠에서 깨어나면 그는 어젯밤에 벌어진 일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간절히 사과하며 나의 용서를 구할 것이다. 아니면 그에게 일리가 있었을 수도 있다. 어쩌면 내가 데릭과 대화를 해서는 안 됐는지도 모른다. 여자친구는 자기 남자친구가 질투하게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남자친구는 자기 여자친구를 죄수처럼 가둬선 안 된다.- P176
하지만 지금까지 들은 정보에 따르면 스무 살의 가수 지망생인 cc는 거짓말쟁이다. 그래야만 한다. 그 여자가 말하는 코리는, 그가 그 여자에게 한 짓은, 현실에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코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여자를 때리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여자를 방에 가두거나 자기 스튜디오에서 섹스를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코리는 신사 중의 신사다. 문을 열어주고, 공연 전에 꽃을 사 주고, 내게 달콤한 가사와 노래를 보낸다.
그때 하이드와 얼음통, 플라운더가 떠오른다. 그리고 목덜미의 머리카락이 곤두선다.- P202
해파리는 뇌가 없다. "아니, 난 앨범 녹음 얘기는 한 적이 없어. 네 망상이야. 그래서 뭐, 이제 날 못 믹어? 네 방으로 들어가!" 해파리는 심장이 없다. "그게 무슨 말이야? 당연히 널 사랑하지. 왜 계속 그런 멍청한 질문을 해?" 해파리는 눈이 없다. … 해파리는 줏대가 없다. …
해파리는 사람이 약을 올리거나 만지지 않으면 먼저 사람을 쏘지 않는다. "왜 이렇게 화를 내게 만들어? 그냥 하라는 대로 할 순 없어? 집에 가고 싶어? 그게 네가 원하는 거야? 그럼 맹세코 집에 보내줄게." 밤에 되면 아빠가 다시 나타나 날 구해줄지 궁금해하며 보라색 음료를 마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