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가슴뭉클한 여성연대 속에서 삶을 살아내었던 버들은 고단하게 살았지만 한편으로는 복을 받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에 있었다면, 꼼짝없이 삯바느질로 생계를 연명하며 더 나은 삶을 갈망만 하다 죽었을 것이다.
포와행은 한번쯤은 자신을 위해 살고 싶었을 조선의 여성들이 마다할 이유가 없는 선택이었다. 버들도 그들 중 한명이었다. 공부를 하고 싶어 미국으로 온 버들은 비록 자신이 공부를 하진 못했지만, 자식들은 두 명이나 대학을 입학시켰다. 자식은 공부시키고자 하는 꿈을 이룬 셈이다. (이 시기 한국이었다면, 왜 여성이 대학교육까지 필요하다며 주변에서 뜯어말렸겠지.) 이 책이 독특한 것은, 조선 여성에게 포와행이라는 서사를 부여하여 새로운 삶을 열어주었다는 것도 있지만, 여성이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가정을 일구어내고 자식들을 공부시켰다는 점이다. 조선은 남성이 바깥일을 하여 돈을 벌고, 여성이 그 돈으로 가사를 도맡아하고, 자식을 공부시키는 가족 구조가 일방적이었다. 이 구조는 최근까지 한국 가족의 대표 유형이었다. (전업주부라는 말이 여성에게 만연하게 쓰인 현실을 생각해보라.) 부부 중 한 사람만 경제권을 가진다면 남자가 경제권을 갖는 것이 당연했던 한국 사회에서 여성 홀로 바깥일과 가사를 도맡아하며 경제권을 쥐고, 집안을 일군 서사는 신기할 수밖에 없다. 가사와 세탁소 일을 모두 하며 지쳐간 버들에게 힘이 된 것은 태완이 아니라, 곁에 있어준 홍주와 송화였다. 그들이 버들과 말동무하고, 버들이 힘들 때 극진히 보살폈기에 버들이 살 수 있었다. 이후 태완이 돌아왔을 때, 자녀들이 처음 태완을 달갑게 생각지 않은 것도 독립이라는 대의를 위해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 태완에게 원망을 느끼며, 가정의 존립에 헌신했던 버들에게 연민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세대보다 높은 세대들에게 대의란 가정과 개인의 사사로운 일보다 우선시되어야 하는 것이었고, 나 또한 예전에는 그 영향을 짙게 받아 그것이 무조건 옳은 줄로만 알았다. 허나 내가 잘 살아야 남도 도울 수 있다는 인식이 생기면서, 무조건적으로 나라를 위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는 의문이 들었다. 하물며 독립운동만 하더라도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가정을 등지고 독립을 위해 삶을 바쳤지만, 정작 그들의 가족은 대대손손 가난하게 살고 있다는 통계가 줄을 잇는다. 나라를 위해 살았지만, 나라에서 버림받는 그들의 기사를 읽다보면 버들의 "나라도 가족이 살아야 존재한다"는 대사가 결코 이상하지 않다.
허나 태완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게 독립은 연락이 끊긴 누부들을 위해서라도, 핍박받는 조선을 독립시켜 훌륭한 조국을 가지고 싶다는 소망을 위해서라도, 중국에서 10년 간 독립군 생활을 한 것이 (가정을 팽개친 행위긴 해도) 이상하다고 여길 수 없다. 그의 선택이 그를, 남은 가족을 떳떳하게 살 수 있는 요인이 될 수 있었다고 믿는다. 나라면, 빈말로라도 조국을 위해 희생할 수 있다고 말 못할 테니까.
그러나 10년이 지나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태완이 설 곳은 없었다. 아버지였지만, 실질적으로 자식들에게 해준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단지 독립군으로 활동했다는 윤리적인 명분만 제공해줄 뿐. 그런 태완을 포용한 것은, 펄이었다. 봉합되지 않을 것 같던 가족을 봉합해 준 접착제 역할을 해냈다. 아버지를 미워하는 것 같은 정호와 달리 펄은 나라를 위해 희생한 아버지를 이해하고 연민한다. 나아가 버들, 홍주, 송화에게도 같은 감정을 느끼며 그들과 자신이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그들이 세차게 몰아챈 파도를 극복했듯, 자신도 삶에 부딪히며 나아갈 것이라 다짐한다. 펄의 다짐은 부모님의 삶과 홍주, 송화의 삶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이해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부모님과 거리를 두었지만, 이제는 그들의 진심을 알았으니 그 점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펄은 결국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아프게 기쁘게 뜨겁게 인생의 파도를 넘어서며 살아갈 것이다.파도가 일으키는 물보라마다 무지개가 섰다. (p.324)
해안에 부딪힌 파도는 사정없이 부서졌다. 파도는 그럴 걸 알면서도 멈추지 않는다. 나도 그렇게 살 것이다. 파도처럼 온몸으로 세상과 부딪히며 살아갈 것이다. (p.3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