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에서 수학의 엄청난 유용성은 신비로울 정도이다. 이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은 없다. - 유진 위그너
유명한 e=mc^2부터 시작해 뉴턴의 중력방정식, 전자기 현상을 기술하는 맥스웰방정식 등 자연을 서술하는 과학 이론들은 대부분 수학 방정식으로 기술되곤 한다. 노벨상 수상자 유진 위그너가 말했듯, 이처럼 자연이 수학으로 딱 들어맞게 서술되는 이유는 갈릴레오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수수께끼이다.
유명한 괴짜 과학자이자 MIT 교수인 저자 맥스 테그마크는 이 수수께끼에 대한 급진적이다 못해 미친 소리처럼 들리는 해답을 내놓는다. 모든 물질 및 우주와 자연의 실체가 그냥 추상적인 수학 그 자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연 이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고대부터 인류가 의문을 품어왔던 주제이고 오늘날까지도 속시원히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이다. 작게는 물질을 한없이 잘게 쪼개면 나타나는 원자와 전자, 중성자와 양성자, 쿼크와 렙톤 등의 입자부터 크게는 은하와 은하군, 우리 우주 전체까지, 우주와 만물의 궁극적인 실체는 무엇일까?
저자는 미시세계의 극단과 거시세계의 극단 모두가 제각각 하나의 수학적 구조라고 말한다.
이 터무니없는 주장이 그냥 나온 것은 아닐 테니 도대체 어떤 근거로 이런 결론이 나오는 것인지 궁금해 계속해서 책을 읽게 된다. 익살스러운 저자의 성격이 책에 고스란히 녹아있어 책은 굉장히 유쾌하며 이 점이 자칫 딱딱해지기 쉬운 과학책을 쉽고 재미있게 읽도록 해준다.
책의 전반부는 현대 우주론의 발전과정과 근황, 저자 본인의 연구활동 등을 재미있게 다룬다. 과거 사변적인 분야에 불과했던 우주론이 관측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그 어떤 분야보다 정밀한 과학분야로 넘어오는 과정이 흥미롭다. 오늘날 암흑에너지의 밀도를 소수점 이하 120자리까지의 정밀도로 측정할 정도의 정확도에 저자는 상당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으며 이런 정밀 측정 결과를 토대로 책 중반부 이후에선 현대 우주 이론들이 예측하는 다중우주론을 소개한다.
다중우주 혹은 평행우주라는 개념은 더 이상 미친 소리가 아니라 주류 과학계에서 진지하게 논의되는 주제가 되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평행우주 개념을 싫어하는 과학자들의 반응조차도 과거 '그것은 말도 안 되고 나는 그것이 싫다.' 에서 '나는 그것이 싫다.'로 바뀌었다고 한다.
저자는 책 속에서 평행우주의 개념을 4단계로 구분한다.
1. 너무 멀어 아직 빛이 지구에 도달하지 않아 우리가 영영 관측할 수 없는 약 140억 광년 범위의 우리우주 너머의 구역이 1단계,
2. 급팽창이론에 따라 공간과 공간 사이에 생겨난 무한한 공간 속의 새로운 우주이자 물리법칙이 우리우주와는 다를 가능성이 있는 우주가 2단계,
3. 양자론에서 말하는 확률 문제를 제거하고 사실은 모든 사건의 모든 경우의 수가 무한한 평행우주에서 일어난다는 양자평행우주가 3단계,
4.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자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우주 만물이 수학적 구조라는 수학적 우주가 4단계이다.
우리의 우주 말고도 무한히 많은 우주가 존재하며, 그 무한대의 우주에는 우리의 복제본도 무한히 존재할 것이라는 평행우주론은 아무리 읽어도 워낙 터무니없이 느껴진다.
평행우주에 대한 근거 중 하나로 저자는 미세조정된 우리우주를 설명한다. 생명이 발생할 수 있는 조건은 극도로 까다로운데 만일 앞에서 언급한 암흑에너지의 밀도가 소수점 아래 120번째 자리에서 한 자리만 어긋나도 생명은 존재할 수 없었을 거라고 한다. 이처럼 극도로 미세조정돼 생명이 존재하는 우리 우주를 설명하려면 세 가지의 경우밖에 없다.
1. 그저 우연의 일치
2. 신이나 절대적 존재가 우주를 창조함
3. 무한히 많은 다중우주가 존재하여 무한히 많은 미세조정의 경우의 수가 있을 수 있음
과학자는 우연을 싫어하며 합당한 설명을 필요로 한다. 분명히 우연으로 소수점 이하 120자리까지 일치하고 그 외에 자연계에 존재하는 32개의 근본상수가 생명 탄생을 뒷받침하도록 조절될 가능성도 있으나 이는 천문학적으로 낮은 확률이며 이 우연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 없기에 1번 설명은 배제된다. 2번 설명은 비과학적이기에 논외로 한다. 따라서 현대 우주론의 주 이론인 급팽창이론과 양자론이 예측하는 무한대의 다중우주 설명이 가장 합리적인 설명인 것이다.
이러한 논리적 추론과 과학이론의 예측을 통해 저자는 자신의 궁극적 주장인 4레벨 평행우주인 수학적 우주론을 도출한다.
물질을 한없이 쪼개다보면 그 물질을 묘사하는 속성(색깔, 무게, 크기 등)이 하나둘 사라지게 되며 결국엔 어떤 물리적 속성도 남지 않는 추상적 개념인 수학만이 남는다는 것이다.
반대로 정육면체나 십이각형 또한 하나의 단순한 수학적 구조이며 우리 우주를 포함한 4레벨의 수학적 평행우주 역시 우리 우주를 아우르는 거대하며 무한히 복잡한 수학적 구조의 일부라는 것이다.
4레벨 수학적 우주의 관측을 통한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저자는 여러 논리적 추론과 철학적 접근을 동원해 4레벨 수학적 우주 주장을 펼친다. 4레벨 수학적 우주를 탐사하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상상력 뿐이라고 한다.
워낙 급진적인 주장이라 받아들이기 힘든 게 사실이지만 우주 만물의 실체에 대한 근본적 미스터리에 대한 또 하나의 접근방법으로서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준다는 점에서 저자의 수학적 우주 가설은 읽어볼 가치가 있었다. 읽기 쉬운 책은 아니었으나 읽는 내내 흥미진진했다.
현대 물리학은 점점 더 인간의 직관에서 동떨어진 자연의 기괴한 속성을 하나 둘 밝혀내는 중이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되는 자연 앞에서 우주와 만물의 실체는 도대체 무엇일지 정말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