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요즘 과학 책 코너에 썩어 넘치는 흔한 뇌과학 교양서와는 좀 달랐다. 처음 집어 들 땐 뇌과학과 AI에 관한 얘기만 하는 책인 줄 알았는데 읽다 보니 AI와 인류의 미래에 대한 뇌과학자의 대담한 통찰을 담고 있어 놀랐다.
기존에 내가 읽었던 뇌과학 책 중 하나인 『커넥톰, 뇌의 지도』(승현준. 2012)에서는 뉴런과 시냅스의 전기신호를 통한 상호작용을 주로 다루며 뇌의 작동원리를 하드웨어적인 측면에서 설명했다면, 이 책 『천 개의 뇌』에서는 뇌 부피의 70%를 차지하는 신피질에서 어떻게 의식과 지능이 창발하는지에 대해 주로 소프트웨어적인 측면에서 접근한다.
ㅡ 천 개의 뇌 이론의 기본 개념
인간의 뇌는 오래된 뇌와 새로운 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오래된 뇌란 인간이 지능을 갖기 전인 먼 과거부터 인간의 생존을 위해 기본적인 욕구에 반응하던 원시적인 뇌다. 반면 인간은 진화를 거듭하면서 지능의 원천인 신피질을 크게 늘려왔는데, 이 신피질로만 이루어진 부분을 새로운 뇌라고 부른다. 신피질은 인간이 말하고 보고 듣고 생각하고 기억하는 의식적인 행동 전반을 담당하며, 지능도 이곳에서 생긴다. 인간은 신피질이 특히 커서 뇌 부피의 70%를 차지한다.
신피질을 이루는 기본 단위는 '피질 기둥'이다. 사람의 신피질에는 약 15만 개의 피질 기둥이 병렬적으로 촘촘하게 늘어서 있다. 각각의 피질 기둥들은 끊임없는 학습을 통해 세상 만물에 대한 모형을 만들어 저장하고, 뇌는 깨어있는 내내 그 모형을 바탕으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끊임없이 예측을 하는 예측 기계처럼 작동한다. 피질 기둥 하나하나는 사실상 작은 뇌라고 할 수 있으며, 뇌는 15만 코어 멀티프로세서인 셈이다.(물론 뇌와 컴퓨터 cpu의 성능을 1:1로 비교할 수는 없다.)
뇌의 기본 단위가 이렇게 작기 때문에 뇌에서 지식은 분산되어 저장된다. 우리가 아는 지식 중에서 한 세포나 한 피질 기둥처럼 한 장소에 저장된 것은 하나도 없다. 때문에 어떤 사람이 사고로 인해 신피질의 일부를 손실하더라도 그 사람의 기억은 대부분 유지된다.
15만 개에 달하는 피질 기둥들은 고유의 기준틀을 가지고 외부 세계를 제각기 조금씩 다르게 인식한다. 피질 기둥들은 무수히 쏟아져 입력되는 정보들에 대해 투표를 하고 합의를 이루어낸다. 즉 우리가 실제로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은 뇌 안에서 피질 기둥들 간의 ‘투표’를 통해 이룬 합의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여기까지가 저자가 고안해낸 천 개의 뇌 이론의 기본 개념이다. 저자는 천 개의 뇌 이론을 적용해 현대 뇌과학이 직면한 난제들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려 시도하며, 천 개의 뇌 이론을 적용한 AI의 발전 방향, AI와 인류의 먼 미래까지 그 논의를 확장한다. 고도로 발달한 AI가 과연 인류를 멸망시킬 것인지, 인류가 뇌를 사이버 공간에 업로드하여 영생할 수 있을지 같은 대중적인 관심 주제에 대해서도 최신 뇌과학 분야의 성과 및 저자 본인의 사견을 곁들여 이야기한다.
책 후반부에서는 인류가 지구를 벗어나 성간 문명이 될 가능성과 그 과정에서의 AI의 역할에 대해서도 고찰하는데, 저자가 풀어내는 이야기들이 너무 흥미로워서 넋 놓고 읽다 보니 이게 뇌과학 책이라는 사실마저 깜빡할 정도였다. 멸망의 위기에 직면한 인류가 지식의 보존을 위해 스스로 복제하는 지능 기계를 만들고 이들이 우리의 정신적 후손으로서 우주로 나아간다는 이야기는 어찌 보면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AI 연구자들은 이렇게 멀리까지 생각하고 있었구나 싶었다.
번역도 잘돼있고 저자도 글을 워낙 명료하게 잘 써서인지 매우 잘 읽힌다. 또 저자는 책에서 설명이 필요할 때마다 한 페이지 정도 분량의 짧고 굵은 예시를 들어 설명하는데, 대부분의 예시들이 짧은데도 불구하고 복잡한 사항들을 쉽게 이해시켜주고 그 논거가 탄탄해서 감탄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부분이 있는데, 저자는 의식이라는 개념이 사실 복잡할 것이 없다면서 어떤 사례를 들며 간단히 설명한다. 읽고 나니 '내가 방금 뭘 읽은 거지?' 싶어 다시 한번 읽어봤다.
의식의 기원과 작동원리는 인류에게 늘 수수께끼였으며 일부 학자들은 인류가 의식의 원리를 결코 알아낼 수 없을 거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저자가 '기억'과 연관 지어 간략히 설명한 의식의 정체는 너무 명확하면서 논거가 타당해서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의식을 논리적으로 이렇게 간단히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마치 강철 쟁반으로 머릴 내려치는 듯한 강렬한 충격을 받았다.
물론 현대 과학이 의식의 비밀을 100% 완벽히 파악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저자는 의식이라는 것이 영혼이나 천국과 같은 비과학적인 영역이 아닌 물리학의 영역 내에 있는 개념이며, 곧 인간은 뇌와 의식을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또한 천 개의 뇌 이론에 기반해 만들어질 미래의 지능 기계는 의식을 가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전에 『벌레의 마음』(김천아 외 4인. 2017)이라는 책에서 읽었던 한 연구가 생각난다. 예쁜꼬마선충이라는 작은 벌레의 뉴런과 근육 및 감각 신경의 모든 연결망, 즉 커넥톰을 소프트웨어로 구현하고 다리(바퀴로 대체)와 눈(시각 센서로 대체)이 달린 로봇과 연결했다. 이 로봇은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라고 프로그래밍 해 둔 것이 아닌데도 스스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인다. 로봇이지만 속은 사실상 온전한 한 마리의 예쁜꼬마선충인 것이다.
만약 예쁜꼬마선충에게도 자아와 의식이 있다면 위 영상의 로봇도 자아와 의식이 있을 것이다. 최근 과학 기사에서는 초파리의 모든 커넥톰을 구현했다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기계가 의식을 가질 것이라는 저자의 확신이 터무니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 인공신경망을 기반으로 하는 알파고나 챗 GPT 같은 AI가 등장했지만 저자는 이들에겐 진정한 의미의 지능은 없으며 당연히 의식도 없을 거라 말한다. 이들은 그저 인간보다 바둑을 잘 두거나 특정 질문에 대답해 주는 수준에 그친다. 특히 챗 GPT는 인간이 프롬프트를 입력해 주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진정한 지능을 가진 AI는 특정 행위만 잘 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수행 가능한 거의 모든 일에 투입이 가능한 수준이어야 한다. 이러한 인공지능을 범용 인공지능, 즉 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라고 부른다. 이들은 인간처럼 보고 들으며 세상을 끊임없이 학습하고, 경험의 축적을 통해 돌발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가 가능하며 인간처럼 자아와 의식을 지니고 스스로 행동할 것이다. 저자는 AGI가 2~30년쯤 후에 등장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의식을 가진 진짜 인공지능이 만들어진다면 인간은 좀 더 겸손해지지 않을까? 사회적으로는 윤리적 논의와 찬반이 들끓으며 일시적인 혼란을 겪겠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인류의 진보에 큰 도약을 이뤄낼 것이다. AGI는 아마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탄생할 것 같은데 최대한 건강하게 오래 살아서 인간이 아닌 새로운 지성체의 탄생을 지켜보고 그들의 탄생을 축하해 주고 싶다.
눈이 확 뜨이는 흥미로운 내용들이 가득 담겨있어 아주 재미있게 읽은 책이다. 뇌과학과 AI, 그리고 인류와 기계 지능의 미래에 흥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필독서로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