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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자책] 쿼런틴
  • 그렉 이건
  • 12,250원 (610)
  • 2022-12-22
  • : 2,258

아이디어가 놀라워서 감탄을 금치 못한 소설이다.

양자역학의 기본 속성인 "관측에 의한 파동함수의 붕괴"를 소설의 주요 소재로 삼았는데 이야기의 핵심이 밝혀지는 중반부는 정말 기가 막혀서 매 페이지마다 눈을 떼지 못하고 읽었다. 어떻게 사람이 이런 생각을 다 했지? 그렉 이건 그는 신인가?

책의 주 소재인 '관측에 의한 파동함수의 붕괴'를 설명하자면 그 유명한 슈뢰딩거의 고양이 얘기를 하면 된다. 슈뢰딩거의 고양이에 대해 잘 안다면 아래 설명은 패스해도 된다.



특정 시간에 50% 확률로 독가스가 퍼지는 불투명하고 밀폐된 상자 안에 고양이를 넣는다. 그럼 특정 시간 이후에 상자 안의 고양이는 죽었거나 살아있을 것이다. 하지만 양자역학에선 관측되기 전엔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가 중첩된 상태로 존재한다고 한다. 즉 이 고양이는 관측되기 전까지는 죽어있으면서 동시에 살아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이후 고양이가 들어있는 상자 내부를 들여다보면 관측에 의해 고양이는 삶과 죽음이 중첩된 상태에서 벗어나(= 파동함수가 붕괴하여) 죽었거나 살아있는 상태로 확정된다는 것이 바로 슈뢰딩거의 고양이 역설이다. 즉 관측을 해야만 비로소 실체가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인간의 직관을 아득히 벗어난 이야기여서 믿기가 어렵다. 오죽하면 천재 아인슈타인조차도 터무니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았고, 양자역학의 확률 놀음에 반대하며 "신은 주사위 놀음을 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남겼다. 양자역학의 최고 권위자 중 한 명이었던 리처드 파인만도 양자역학의 난해함에 대해서 "이 세상에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오늘날 양자역학은 수많은 과학자들에 의해 철저히 검증되었고 아인슈타인의 두 상대성 이론과 더불어 가장 성공적인 과학 이론 중 하나로 남았다.


▶리처드 파인만 - "이 세상에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양자역학 권위자인 본인도 이해 못하시겠다는 뜻)


책은 이 파동함수의 붕괴라는 현실의 소재를 교묘하게 비틀어 이야기를 진행시키는데, 가히 소설 전체가 파동함수의 붕괴에 대한 사고실험을 위한 무대라고 부를 만하다.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저자가 파동함수의 붕괴에 대해 이러저러 생각하다가 떠오른 여러 사고실험을 한 데 묶고 이야기와 설정을 좀 덧붙여 아예 한 편의 소설로 낸 것 같다. 하지만 이야기의 진행을 위해 약간의 허구적 설정이 들어갔기에 양자역학을 잘 모르는 독자라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소설적 허구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다. 이 책을 읽으면 양자역학 마스터할 수 있느냐는 질문 글을 봤는데 도움 안되니 기대하지 말라.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책은 인간 직관에 반하는 이런 현상들이 과학적인 사실이자 진리라면 특정 상황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게 과연 실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질문하며 이 사고실험을 철학적인 측면으로도 확장하고자 시도한다. 책에선 자유의지라는 게 진짜 있다면 특정 상황 하에선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말문이 막히는 상황이 두어 번 나오는데 읽으면서 독자로 하여금 자유의지란 허상이 아닌가 고민하게 만든다.


이 책의 아이디어도 대단하지만 근미래 기술에 대한 사이버펑크적 배경 묘사도 즐거웠다. 생명공학을 정복한 인류가 살아있는 모기를 유전적으로 변이 시켜 소형 드론으로 써먹기도 하고 인간의 머릿속에 여러 사이버네틱 임플란트들을 이식해 사용자의 감정을 통제하거나 신체능력을 조절하는 데 사용한다. 저자의 이공계열 지식이 해박하고 설정과 묘사가 구체적이어서 본격 하드 SF 소설의 모범으로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고독한 전직 형사로 나오는 주인공 덕분에 얼핏 하드보일드 풍의 느낌도 난다.


다만 제목과 표지, 그리고 태양계 전체가 격리되었다는 설정만 봤을 땐 뭔가 우주급 스케일의 거대한 이야기를 기대했는데 막상 읽어보니 소설 속 배경과 그 스케일이 너무 작아 실망했다. 놀라움을 불러일으킨 중반부 이후부턴 뒷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빤히 보여서 약간 맥빠지기도 했다. 쿼런틴 읽은 사람들 말로는 결말이 아쉽다는 평이 대다수였는데 나 역시도 그렇게 느꼈다.



여담으로 이전에 읽은 과학책인 '바이오센트리즘'(로버트 란자 저)에서도 쿼런틴과 비슷한 내용을 주장한 바 있다. 파동함수의 붕괴를 초래하는 게 관측이라는 행위라면 이 관측을 행할 수 있는 존재는 의식을 지닌 생명체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파동함수의 붕괴를 초래하는 "관측할 수 있는 의식"은 우주의 기본 요소이고 우주는 이 의식을 가진 생명체가 반드시 존재하게끔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다.(=생물중심주의) ​

물론 생물중심주의는 일부 괴짜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이지 과학계 주류 이론이 아니니 이런 생각들도 있구나 하고 참고만 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현실이 오죽 기괴하면 이런 주장까지 나오게 되는걸까 싶다.


양자역학을 통해 바라본 세상은 왜 이렇게까지 기이하게 만들어져 있는 것인지 신기하다. 과연 인류가 양자역학을 완전히 이해하게 될 날이 올까?

오래오래 살아서 인류의 과학이 세상의 진리를 어디까지 밝혀낼 수 있을지 지켜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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