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인정할 수도 없는 감정들이었다. 그를 강타한 것은 국가적인 비극에 대한 감정이었다. 거기서 느낀 경악과 비통함이 무엇에든 배어 있어서 개인적인 비극이나 불행은 다른 세상의 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들이 처해 있는 전체적인 상황의 무게가 워낙 거대했기 때문에 개인적인 일들에 관한 느낌도 한층 강렬해졌다. 사막에 홀로 솟아 있는 무덤이 바로 주위를 둘러싼 광활한 사막 때문에 더욱 외롭게 보이는 것과 같았다.- P343
그는 수치심과 자부심을 동시에 느끼면서 또한 자신과 이 시대, 그리고 자신같은 인간을 만들어낸 주변 상황에 쓰디쓴 실망을 느꼈다.
매주, 매달, 죽은 자들의 이름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개중에는먼 과거의 기억처럼 단순히 이름으로만 기억되는 사람도 있었고,
그 이름을 지닌 사람의 얼굴이 함께 떠오르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목소리, 그가 했던 말이 떠오를 때도 있었다.
그동안 내내 그는 강의와 연구를 계속했지만, 때로는 맹렬한폭풍 앞에서 등을 구부리는 것이나 질 나쁜 성냥의 흐릿한 불꽃을 양손으로 오목하게 감싸는 것처럼 소용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P347
상실감, 그가 너무나 오랫동안 속에 담아두었던 그 상실감이 쏟아져 나와 그를 집어삼켰다. 그는 의지를 넘어 그 흐름에 휩쓸리는자신을 내버려두었다. 자신을 구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는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기억을 향해 미소 짓는 것처럼. 이제자신은 예순 살이 다 되었으므로 그런 열정이나 사랑의 힘을 초월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초월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초월하지 못할 것이다. 무감각, 무심함, 초연함 밑에 그것이아직도 남아 있었다. 강렬하고 꾸준하게. 옛날부터 항상 그곳에 있었다. 젊었을 때는 잘 생각해보지도 않고 거리낌 없이 그 열정을주었다. 아처 슬론이 자신에게 보여준 지식의 세계에 열정을 주었다. 그게 몇 년 전이더라? 어리석고 맹목적이었던 연애시절과 신혼시절에는 이디스에게 그 열정을 주었다. 그리고 캐서린에게도 주었다. 그때까지 한 번도 열정을 주어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그는방식이 조금 기묘하기는 했어도, 인생의 모든 순간에 열정을 주었다. 하지만 자신이 열정을 주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을 때 가장온전히 열정을 바친 것 같았다. 그것은 정신의 열정도 마음의 열정도 아니었다. 그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힘이었다. 그 두 가지가사랑의 구체적인 알맹이인 것처럼. 상대가 여성이든 시(詩)든, 그열정이 하는 말은 간단했다. 봐! 나는 살아 있어.
그는 자신을 노인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가끔 아침에 면도를 하다가 거울을 보면 그 속에서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마주 바라보는 얼굴에 결코 동질감을 느낄 수 없었다. 기괴한 가면 속에서 눈빛만 선명했다. 마치 자신이 알 수 없는 이유로 터무니없는 변장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하얗게 세어버린 그 덥수룩한 눈썹, 헝클어진 백발, 앙상한 뼈 주위로 늘어진 살, 나이 든 척하는 깊은 주름살들을 모두 벗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P353
하지만 그는 늙은 척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세계대전이 끝난뒤 온 세상과 자기 조국의 병든 모습을 지켜보았다. 증오와 의심이일종의 광기가 되어 신속히 퍼지는 역병처럼 전국을 휩쓸었다. 젊은이들은 또다시 무의미한 파멸을 향해 열렬히 행진하며 전쟁터로향했다. 악몽이 메아리치는 것 같았다. 그가 느낀 연민과 슬픔은너무나 오래돼서 그의 나이의 일부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세상사가 자신에게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세월이 휙휙 흘러갔다. 그리고 그는 세월이 지나가는 것을 거의인식하지 못했다. 1954년 봄, 예순세 살 때 그는 자신이 교단에 설수 있는 기간이 기껏해야 4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그는 그 이후의 삶을 그려보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않았다. 굳이 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P354
세월이 정말이지, 날 듯이 흐르고 있어!- P355
이제는 한 가지 일에 계속 정신을 집중하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생각이 흘러가곤 했기 때문에, 가끔 정신울 차려보면 자신도 출처를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P381
두 사람 모듀 사랑했던 그 반항적인 청년의 유령은 ㅈ금까지 그 오랜 세월 동안 두 사람 자신도 결코 꺄닫지 못할 만큼 깊은 우정으로 그들을 묶어주고 있었다- P385
그는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남들 눈에 틀림없이 실패작으로 보일 자신의 삶을 관조했다. 그는 우정을 원했다. 자신을 인류의 일원으로 붙잡아줄 친밀한 우정. 그에게는 두 친구가 있었지만 한 명은 그 존재가 알려지기도 전에 무의미한 죽음을 맞았고, 다른 한명은 이제 저 멀리 산 자들의 세상으로 물러나서………. 그는 혼자있기를 원하면서도 결혼을 통해 다른 사람과 연결된 열정을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그 열정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열정이 죽어버렸다. 그는 사랑을 원했으며,
실제로 사랑을 했다. 하지만 그 사랑을 포기하고, 가능성이라는 혼돈 속으로 보내버렸다. 캐서린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캐서린."
그는 또한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지만, 거의 평생 동안 무심한 교사였음을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언제나 알고 있었다. 그는 온전한 순수성, 성실성을 꿈꿨다. 하지만 타협하는 방법을 찾아냈으로, 몰려드는 시시한 일둘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는 지혜를 생각했지만, 오랜 세월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무지였다.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그는 생각했다. 또 뭐가 있지?- P387
그가 힘들게 눈을 떴다. 그가 느낀 것은 빛이었다. 오후의 밝은 햇빛, 그는 눈을 깜박이며 창문으로 보이는 파란 하늘과눈부신 태양 가장자리를 덤덤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것들이진짜라는 결론을 내렸다. 손을 움직여 보았더니 몸속에 묘한 힘이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공기 중에서 흘러들어온 것 같았다.
그는 심호흡을 했다. 통증이 없었다.
숨을 쉴 때마다 기운이 더 많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살갗이 찌릿찌릿했다. 얼굴에 닿는 빛과 그림자의 섬세한 무게가 느껴졌다.
그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침대 옆의 벽에 등을 기댄 채 반쯤 앉은 자세를 취했다. 이제 문 밖의 모습이 보였다.
긴 잠을 자고 일어나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늦봄 또는 초여름……… 풍경을 보니 아무래도 초여름이지 싶었다. 뒷마당의 커다란 느릅나무 이파리들이 풍요롭게 반짝였다. 그 느릅나무 그늘은그도 전에 경험한 적이 있는 깊이와 서늘함을 담고 있었다. 공기가진하게 느껴졌다. 풀과 이파리와 꽃의 향기로운 냄새에 묵직함이잔뜩 섞여서 그 향기들을 허공에 묶어두고 있었다. 그는 다시 숨을들이쉬었다. 깊숙이 긁히는 것 같은 자신의 숨소리가 들리고, 여름의 달콤함이 허파 속에 쌓이는 것이 느껴졌다.
또한 그 들숨과 함께 자신의 안쪽 깊숙한 곳 어딘가가 움직이는것이 느껴졌다. 그 움직임은 뭔가를 멈추게 하고, 그의 머리를 움직일 수 없게 고정해버렸다. 하지만 이내 그 느낌이 사라졌다. 그는 생각했다. 그래, 이런 느낌이구나.- P389
이디스를 불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이 그녀를 부르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죽음은 이기적이야. 그는 생각했다. 죽어가는 사람은 혼자만의 순간을 원하지. 아이들처럼.
그는 다시 숨을 쉬었지만, 그의 몸 안에서 뭐라고 꼭 집어 말할수 없는 차이가 느껴졌다. 자신이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지식 같은 것을. 세상 모든 시간이 자신의 것인 양 느긋해도 될 것 같았다.
멀리서 웃음소리가 들리자 그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학생들 몇 명이 뒷마당 잔디밭을 가로질렀다. 어딘가로 서둘러 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 모두 세 쌍이었다. 여학생들은 팔다리가 길었으며, 가벼운 여름옷을 입은 모습이 우아했다. 남학생들은 즐겁고 경이로운 표정으로 여학생들을 바라보고있었다. 그들은 잔디밭에 거의 발이 닿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걸었다. 그래서 그들이 있던 자리에는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았다. 그는 시야를 점점 벗어나는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들이 사라진 뒤에도 오랫동안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한 여름날 오후에 어딘가멀리서 아무것도 모른 채 터뜨리는 웃음소리.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다시 생각했다.
기쁨 같은 것이 몰려왔다. 여름의 산들바람에 실려온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실패에 대해 생각했던 것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런것이 무슨 문제가 된다고. 이제는 그런 생각이 하잘것없어 보였다.
그의 인생과 비교하면 가치 없는 생각이었다.- P390
선하고 참을성 많고 성실한 성격이었으나 현명하다고 하기는 힘들었다. 불굴의 용기와 지혜로 난관을 극복하기보다는 조용히 인내하며 기다리는 편이었다.- P393
나는 그가 진짜 영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소설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스토너의 삶을 슬프고 불행한 것으로 봅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의 삶은 아주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나은 삶을 살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자신이 허고 싶은 일을 하면서 그 일에 어느 정도 애정을 갖고 있었고, 그 일에 의미가 있다는 생각도 했으니까요.
작가 인터뷰- P3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