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 있지 않아도, 정말 괜찮았다. 이쪽에서 바라볼 수만 있다면, 빙글빙글, 그를 가운데두고 궤도를 돌 수 있다면.- P29
‘누구나 하나의 세계를 이룰 수 있다’는 역사상 가장 오래 되풀이된 거짓말 중 하나일 거라고 주영은 생각했다. 세계를 만들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탁월하고 독창적인 사람들이 만든 세계에 기생할 수밖에 없다. 한 사람 한사람이 똑같이 기여하는 것이아니다. 거인이 휘저어 만든 큰 흐름에 멍한 얼굴로 휩쓸리다가 길지 않은 수명을 다 보내는 게 대개의 인생이란 걸 주영은 어째선지 아주 어린 나이에 깨달았다. 끊임없이 공자와 소크라테스의 세계에 예수와 부처의 세계에,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의 세계에, 테슬라와 에디슨의 세계에, 애덤 스미스와 마르크스의 세계에, 비틀스와 퀸의 세계에, 빌게이츠와 스티브 잡스의 세계에 포함되고 포함되고 또 포함되어 처절히 벤다이어그램의 중심이 되어가면서 말이다.- P37
캐나다에서 주영은 다시 한번 깨달았다. 자신은 아폴로의 부속 위성이라고, 감자처럼 울퉁불퉁한 작은 위성이라서, 아폴로를 잃는 순간 궤도에서 떨어져나가 빙글뱅글 어둠 속을 떠돌 수밖에없다고…………- P50
오늘은 유리의 목소리에서 칼칼함을 찾을 수 없었다. 이런 갑각류같은 사람, 겉껍질 안쪽엔 부드럽기가 그지없었다- P76
한아가 기억하는 경민은 언제나 공기를 자기만의 색으로 채색하는 사람이었다. 이국적인 음식 냄새 한줄기에 한아의 손을 이끌고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맨 다음 끝내 새로운 식당을 찾아냈고, 사진한 장을 보고 이름도 낯선 나라에 반해 그 나라의 모든 자료를 흡수하며 마치 전생에 거기서 태어났던 사람처럼 1년 내내 그곳 이야기를 해댔다. 경민의 여행 준비는 그렇게나 대대적이었다. 한아도 경민의 세상에 대한 관심과 쉽게 전이되는 흥분을 싫어하지 않았다. 매일 경이를 느끼는 사람, 바깥에 대해 늘 궁금해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건 즐거웠다. 경민에게 반할 수밖에 없었던 그 마음을 재생시켜야 한다고 다짐한다. 어딘가 한아 안에 4K 화질로 저장되어 있을 거라고.- P90
"그리고 반해버린 거지. 그거 알아? 내가 너한테 반하는바람에, 우리별 전체가 네 꿈을 꿨던거? 하지만 첫번째로널 보고 널 생각한 건 나였기 때문에 내가 온 거야.".
"망원경은 몸의 일부로 만든 것이라서, 본체가 꿈을 꾸고있을 때는 스스로 움직여. 대개는 어떤 일관성 없이 그저 산발적으로 우주의 곳곳을 비추고 있지. 그런데 내 망원경은달랐어. 깨어나서 내가 잠든 동안 어디를 비췄는지 체크해보면 꼭 비슷한 지점을 스쳐갔더라고. 지구에서도 아주 좁은 면적을 우주가 얼마나 넓은데 그건 너무 이상한 일이었어. 그래서 한동안 잠들지 않고 계속 그 근처를 살폈지. 곧 망원경이 뭘 보고 있었는지 알았어. 그러니까, 웃기지? 나보다 내 망원경이 더 먼저 널 사랑한거야."- P101
"어떤 특별한 사람은 행성 하나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질 때가 있어요. 그걸 이해하는 사람이 있고 못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저한텐 엄청분명한 문제예요. 난 따라갈 거야 내 아티스트"- P118
"말 그대로 스타라니까. 중력이 없으면 스타겠어요? 벗어날 수 있었으면 나도 다르게 살았지.- P119
정규가 손을 내밀었으나 주영은 좀 꺼림칙했다.
"엥, 악수는 좀 그렇다. 티켓이 가버리면 어떡해."
"그런 원리는 아닐 거 같긴 한데."
14그래도 모르니까 두 사람은 어깨를 서로 살짝 부딪쳤다.
"조심하세요."
"가서 구할 수 있으면, 나도 티켓 보내줄게요. 휴가 와요."
"올해 휴가 일수 안 남았기 때문에."
주영과 정규가 다른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둘은 다시는 서로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더욱 그 만남은 기억에 남을 만한 것이었고 훗날 종종 서로를 생각하며 웃게 되었다. 그렇게 이상한 경험을 함께한 사람, 기억나지 않을 리가.
동시에 웃었던 적도 있다. 한 사람은 서울에서, 한 사람은 우주 투어 길에서.- P124
문득 생각했다. 역시 보고 싶네. 보고 싶잖아.
그렇지만 뭔가 달랐다. 원래의 경민을 보냈을 때의 그런 몸이 간질간질하고 신경이 쏠리고 불안해지는 보고 싶음이아니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심해를 헤매고 있어도 이어져 있는 보고 싶음이었다.
기다리는 게 즐거울 수도 있구나. 이건 또 새로운데? 한아는 계단에 앉아 생각했다.- P151
나와 똑같은 누군가는 외로움에 전혀 도움이 안 돼- P156
"우주의 광막함을 견디고 싶지 않고, 긴 여행에 필요한한정된 자원을 미래 세대에게 양보하고 싶대."
그래서 한아와 경민은 어쩔 도리 없이, 먼 곳의 문명이 그대로 녹아내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투명하고 둥근, 조금씩 무늬가 다른 한 장 한 장의 날개들이 사라져가는 것을. 끝의 끝까지 눈부신 형상이었지만, 다시는 목격하고 싶지않은 장면이기도 했다.
한아는 이후 채 겪어보지 않은 광막함에 대해 계속 떠올렸고, 우주가 언제나 광막한 곳이어서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마음속에도 그것이 일부 녹아들지 않았을까 여기게 되었다. 누군가는 어렴풋하게, 누군가는 살을 찔러오는 강렬함으로 안쪽의 춥고 비어 있는 공간을 더듬는 것이다. 얼음 무당벌레들이 지독하게 느끼는 편이었을 뿐, 우리는 모두 이어둡고 넓고 차가운 곳에 점점이 던져져 있지 않은가? 부디 탈출한 자들이, 더 오래 변하지 않을 보금자리에 잘 도착하기를 여행이 그들을 너무 바꾸어놓지는 않기를.- P161
"그야 그렇지만 거대한 산업용 컨베이어벨트 위에 실린느낌이었다고. 아주 개인적인 행사인데 전혀 개인적이지 않았어."
웨딩이야기- P177
"너무 쪽팔려하지 마. 지구는 아직 평화롭지 않지만, 그래도 위대한 정신들이 자주 태어나는 멋진 별이야. 넌 어슐러 르 귄이랑 몇 년이나 같은 별에 살았잖아. 그건 자랑스러워해도 되는 일이야. 끝까지 노벨문학상을 안 주다니, 멍청이들."- P183
한아는 돌아온 경민을 엑스라고 불렀다. 대놓고 부를 일은 없었으므로 3인칭으로만 부르며, 그렇게 짧게 흔히들 쓰는 말로 함께한 시간을 깎아버렸다. 차마 경민이라고 부를수는 없었다.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경민은 언제나, 단절 없이, 연속적으로 한아가 사랑하는 존재를 부르는 이름이었다. 그 이름을 돌려줄 수는 없었다.- P193
한아는 경민에게 온 체중을 실어 안겼다. 경민의 오래된 스웨터에서 먼지 냄새, 바람 냄새, 시간 냄새가 났다. 한아는 그 순간의 두 사람이 얼마나 완벽하게 꼭 들어맞는가를가만 느끼고 있었다. 우주가 그들을 디자인했다. 재단하고 완벽한 스티치로 기웠다. 한아는 그 솜씨를 죽었다 깨도 못따라 하리라는 기이한 감탄에 빠져들었다.- P216
그것은 매듭 이후, 끊임없이 이어질 달콤한 하루의 첫날. 셀 수 없을 키스 중의 첫 키스였다. 흔하지 않지만 어떤 사랑은 항상성을 가지고, 요동치지 않고, 요철도 없이 랄랄라하고 계속되기도 한다.
우주 가장자리에서 일어나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러브 스토리의 시작이면서, 끝이었다.- P217
주영과 유리는 아껴 마지않는 친구들의 이름입니다. 그친구들의 빛나는 부분을 채 담지 못한 것 같아 아쉽습니다. 10년 동안 이름을 빌려줘서 고맙고, 10년 더 빌려주면 좋겠습니다.
아마 다시는 이렇게 다디단 이야기를 쓸 수 없겠지만, 이 한 권이 있으니 더 먼 곳으로 가보아도 될 것 같습니다.
2019년 여름
정세랑- P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