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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도 우리를 둘러싼 소문을 알게 되었다. 선생님과구의 부모님은 구와 내가 어떤 사이인지 잘 알면서도, 우리가더럽지 않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구와 나를 추궁했다.- P40
구에 대한 생각이 옅어지고 그 자리에 다른 생각이 들어오자,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구는 엄청나구나. 구 대신 들어온 다른 것들이 터무니없이 옅고 가벼워서 구의 밀도를 대신하지 못했다.- P50
빛과 그림자처럼, 현실도 상상도 적당하지 않았다. 현실에서는 담이 눈조차 바로 보지 못하면서 상상에서는 담이 살 어느곳이든 맛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마음 속 욕망과 금기의 주머니는 공평하게 커져갔다. 담을 보는 것도 괴로웠고, 보지 않는것도 괴로웠다. 더 가까워지고 싶었고 행여 더 가까워질까 겁이 났다. 담이 앞에서만큼은, 나는 나를 최고로 경계해야 했다.
담은 나와 달랐다. 평온한 들판에 산책이라도 나온 듯 나를만나는 것 같았다.
그 점이 서운하기도 다행스럽기도 했다.- P58
하지만 기다림은 공장 문 앞이 아니라 구와 헤어질 때부터시작되었다.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학교에 있을 때도 내내 구를기다렸다. 만날 시간은 분명 정해져 있고, 그때가 아니면 만날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내 마음은 항상 대기 중이었다. 오분, 삼십 분, 한 시간이 아니라 하루 종일 기다리는 심정이었다.
심지어 구와 함께 있을 때에도 구를 기다리는 기분이었고, 구가나를 기다리고 있을 때에도 내가 구를 기다리는 기분이었다.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상대를 끝없이 기다린다는 뜻일까.- P65
힘든 일할 때 시간이 빨리 가면 좋잖아.
주저하다가 물었다. 그 속도로 내 삶이 지나가는 중이라고 생각하면 좀……… 무서워.- P67
걔들 사귀는 거 보면 좀 유치해 자전거가 이번에는 왼쪽으로 휘청 쏠렸다. 넘어지려는 자전거 핸들을 구가 잡았다. 그래서 너는 누구랑 유치해지고 싶은데? 구가 놀리듯 물었다. 노마의 표정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나한테 친절하면 좋겠어.- P77
나의 미래는 오래전에 개봉한 맥주였다. 향과 알코올과 탄산이 다 날아간 미적지근한 그 병에 뚜껑만 다시 닫아놓고서 남에게나 나에게나 새것이라고 우겨대는 것 같았다. 영영 이렇게 살게 될까봐 겁이 난다고, 담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P90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말과 부모님을 이해한다는 말이 같은 뜻은아니었기에, 아버지와 악수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주는 술을 넙죽넙죽 받아 마시며 아버지 힘드시죠, 라는 눈빛을건네고 싶진 않았다. 원망하지도 않지만 이해하지도 않는 선.
그 선을 지키는 것이 내가 부모님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P99
뜨거운 하루였다. 세상이 보온밥솥에 담긴 밥 한 그릇 같던날씨, 사람들은 찐득하게 엉긴 밥알처럼 서로를 못 견뎌했다.
무자비한 태양이 산 너머로 사라진 후에도 열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밤늦어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교복도 벗지 않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몸에 간신히 남아 있던 영양분이 모두바닥난 느낌이었다. 여름도 겨울도 잔인하다. 잔인하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잠들었다가 빗소리에 눈을 떴다. 깜깜한 바깥에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비가 내릴 낌새라곤 전혀 보이지않았는데, 벽시계를 올려다봤다. 그 시계의 건전지를 구가 두어번 갈아줬었다. 이모도 나도 시계가 멈추는 걸 신경쓰지 않았다. 건전지를 갈아야지, 생각만 하고 아직 멈추지 않은 다른 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곤 했다. 집 안의 모든 시계가 멈춰버렸을때는 그저 느낌만으로 시간을 점쳤다. 그 시계를 구가 다시 움직이게 했었다.- P109
그새 겨울이 다 지나고, 봄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고, 이미 여름도 절반이니까- P110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말과 니가 알아서 하라는 말을 많이 했다. 예전에는 나를 보면 안쓰럽고 신경쓰여 절로 눈물이 나면서도 그게내 처지 때문인지 자기인생 때문인지 헷갈렸는데, 헷갈려서자꾸 잔소리를 하고 간섭했는데, 더는 헷갈리지 않게 된 거다.
헷갈리지 않는 이유는, 마음이 다해서.
내게 줄 마음을 다 줘버려서.
더는 내가 생생한 생물 같지 않아서.- P120
발소리는 멈추고 애꿎은 봉지 소리만 골목을 메웠다.
·····왔어?
한참을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다가, 담이 먼저 말했다.
밥은 먹었어?
어제 본 사람처럼 내게 말을 걸었다.
그건 뭐야?
내 손에서 이리저리 헤매고 있는 검은 봉지를응, 소고기.
거의 삼 년 만에 만나, 내가 담에게 한 첫 말이었다.
"그래, 들어가자 국 끓여 먹자.
담이 문을 열며 말했다.
이거 등심인데, 꽃등심인데.
거의 삼 년 만에 만나, 내가 담에게 건넨 두 번째 말.
fogn물었다.
그래, 구워 먹자, 그럼.
나는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담이 얼굴만 멍청히 쳐다봤다. 담이 내 손을 잡았다. 손목에 걸린 비닐봉지가 멀미하듯 덜렁덜렁 흔들렸다. 잡힌 손이 아프고 부끄러웠다.- P139
아이는 물건에도 인격을 부여하지만 어른은 인간도 물건 취급한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무럭무럭 자라면서 우리는 이 세계를 유지시키고 있다. 사람은 돈으로 사고팔 수 있다.
사람은 뭐든 죽일 수 있고 먹을 수 있다.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사기를 친다. 누군가의 인생을 망치고 작살낼 수 있다. 그리고구원할 수도 있다. 사람은 신을 믿는다. 그리고 신을 이용한다.- P163
판도라가 항아리를 열었을 때 그 안에서 온갖 나쁜 것들이빠져나왔대. 근데 거기 희망은 왜 있었을까. 희망은 왜 나쁜 것을 모아두는 그 항아리 안에 있었을까. 이 얘기를 담에게 꼭 해주고 싶었는데 해주지도 못하고 나는 죽었다. 희망은 해롭다.
그것은 미래니까. 잡을 수 없으니까. 기대와 실망을 동시에 끌어들이니까. 욕심을 만드니까 신기루 같은 거니까. 이 말을 왜해주고 싶었냐면, 나는 아무 희망 없이 살면서도 끝까지, 죽는순간에도 어떻게든 살고 싶었는데, 그건 바로 담이 너 때문에.희망 없는 세상에선 살 수 있었지만, 너 없는 세상에선 살고 싶지가 않아서. 죽음은 너 없는 세상이고 그래서 나는 정말 죽고 싶지 않았어.- P166
그때는 네 옆에 잠시라도 있으려면 널 괴롭혀야 했다. 너와 눈을 맞추려면,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네게 알리려면, 너에게 나란 존재를 새겨넣으려면, 다정하게 말을 걸 수도 있었지만, 혹시라도 너의 무표정을 보게될까봐 겁이 났다. ‘안녕‘ 하고 말했는데 ‘안녕‘으로만 끝날까봐.
아니, 그 인사조차 돌려받지 못할까봐. 누구에게나 보여주는 겉치레 인사 말고, 너의 고유한 표정과 감정을 갖고 싶었다. 네 머리채를 잡아당기면 분명 네가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다. 화를내면서 하지 말라고, 아프다고 말할 줄 알았다. 그러면 나는 깐죽거리고 싶었다. 왜? 왜 하면 안 되는데? 시비 걸 듯 놀리면서우리만의 특별한 시간을 고무줄처럼 쭉쭉 늘이고 싶었다. 그런데 너는 화를 내지 않고 조용히 울었지. 내가 어쩌지도 못하게. 다정한 말을 건네는 게 겁이 나서 신발이나 내던지는 내 앞에서. 정작 화를 내야 할 사람은 너였는데, 내가 화를 내고 말았다- P169
사랑하고 쓴다는 것은 지금 내게 ‘가장 좋은 것‘이다. 살다보면 그보다 좋은것을 알게 될지도 모르지만, 더 좋은 것 따위, 되도록 오랫동안모른 채 살고 싶다.
2015년 3월, 일인용 의자에 앉아
최진영-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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