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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커스김님의 서재

총 다섯 편의 중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소설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표제작인 중편 [녹천에는 똥이 많다]와 [하늘燈]이다. 앞에 실린 세 편의 단편에서는 영화에서도 잘 느낄 수 있는 이창동 특유의 서사감각이 빛나긴 어려운 듯 보인다. 그래서 중편 이상에서 유독 완성도가 높다고 느껴졌다.

이 소설들에서 작가가 외치고 싶었던 것은 결국 "삶의 이유"가 아닌가 싶다. 인간이란 존재가 왜 사는지,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으로 생의 전부를 바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에 이창동이란 사람은 소설로써 그 질문에 접근해가는 것이다.

<진짜 사나이>는 한 인물의 단선적 변화를 평면적으로 서술하고 있어 아쉬움이 남고, <용천뱅이>는 사람에게 지켜야할 신념에 대하여 간첩죄로 잡힌 아버지와 아들의 면회를 통해 삶에 충실함은 무엇인가에 대해 토로하고 있다. 한편, <운명에 관하여>는 작위적인 플롯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의 운명이란 것에 대하여 모호한 입장을 낭만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이제부터 괜찮게 봤던 중편소설 두편에 대해 얘기해보겠다. 먼저 [녹천에는 똥이 많다]는 약 20여년 만에 준식과 민우라는 이복형제가 다시 만난 것으로 이야기가 출발한다. 사랍학교 급사에서 서무과 직원으로, 그리고 야간대학을 다녀 교사가 된 준식과, 어렸을 때부터 다른사람들에게 유독 특별한 존재로 인식되었고 번번히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양보하지 않았던 기억으로 남아있는ㅡ서울대를 중퇴하고 수배자의 입장인ㅡ민우가 만남으로써 준식과 그의 아내의 가정생활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 균열이란 이른바 삶에의 자발적 자유라 일컬을 만한 것인데, 그것이 다른 사람도 아닌 언제나 똑똑하기만 하고 잘났기에 약간의 컴플렉스까지 느끼는 민우에게 현실적 균형을 잃었기에 준식의 입장에서는 쉽사리 용서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준식에게는 평생을 걸고 지켜오던 하나의 삶의 형태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더욱이나 말이다.

소설에서 가정뿐 아니라 아내와 자신의 가치관을통째로 흔들어 놓고 있는 존재에게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은 순응 혹은 복수뿐이다. 더구나 민우는 성숙함이 약간은 결여되어 있다고 느껴지기에 인간적으로 준식이 경찰에 신고하는 심정이 이해된다. 그러나 녹천역에 이르러 뒤늦게 뭔가를 자각해서 준식과 함께 도망치다가 민우가 형사들에게 잡혀가는 모습을 어딘가에 숨어 본 후에, 녹천역 주변에 널려있다는 어느 똥구덩이에 빠져 울고 있는 준식의 모습을 볼 때, 운명이란 애당초 존재하고 그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는 닫혀진 인간형을 그려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러나 인물의 행동이 내러티브에 맞게 자연스레 흘러가는 점이나, 인간들이 배설한 똥구덩이에 빠져 있는 모습이라든지, 어항을 어깨에 메고 한 손엔 다 찢어진 비닐봉지 안에 담겨있는 죽은 금붕어라든지 하는 메타포나 상징은 영화의 그것으로 충분히 구현될 수 있어 보여서 그가 이제껏 찍은 영화에도 신뢰를 더해준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하나 더, 이창동이란 사람은 본능적으로 결말의 카타르시스에 민감한 것 같다. 예상밖의 혹은 충격적인 반전으로 인한 결말을 보여주기란, 상황을 밀도있게 끌고 나가기엔 아주 효과적인 장치란 걸 여지없이 보여주니 말이다.

마지막에 실려있는 [하늘燈]은 어쩌면 진부할 수도 있는 80년대의 그늘이 씌워져있는 작품이지만, 작가는 운동권이나 대항적인 위치에 있는 인물이 아닌, 본격적으로 운동이나 시위를 하지도 않지만, 자신의 이익만을 쫓아 살지도 않는, 이도 저도 아닌 재적당한 여대생을 화자로 택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부분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다방 레지를 할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던 신혜가 경찰서에 갇혀 며칠간의 고문 끝에 풀려난 뒤(아마도 남형사가 술에 취해 신혜를능욕하려던 사건 때문이라 짐작가능함)의 변화ㅡ현실적이든, 상징적이든ㅡ를 보여주고 있는 이 소설은 마지막이 퍽이나 감동적이다. 어떠한 사건으로 인한 의식의 변화를 그려내는 소설이 전적으로 새로운 구성이 될 수 없는 게 당연하지만, 문제의 초점이 되는 한 인물의 변화를 새벽 하늘에 떠 있는 별을 보면서 포착한 부분은 오랫동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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