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은밀한 생님의 서재
읽는 동안에는 내내 모르겠다가 평론가들의 재해석, 혹은 의미의 재부여로 인해 그 가치가 더해지는 책이 있다. 반대로 읽는 순간, 가슴 한 구석이 사금파리처럼 반짝거리는 책도 있다. 프랑스 작가 필립 들레름의 산문집 <첫 맥주 한 모금>은 후자에 속한다.

독자는 이 책을 읽고나서 문장의 의미나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릴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의 글은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려 하지도 않고, 굳이 독자가 이해해야 한다는 쓸데없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지도 않으며 특별히 교훈 따위를 주려고 안달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깊숙이 들여다보고 온 몸으로 느낄 뿐이다.

작가가 시선을 두는 곳은 삶의 사소한 부분들이다. 이를테면 아침식사를 하며 조간신문을 읽는 일, 밤길을 달리는 자전거의 발전기가 바람에 스치는 소리, 달리는 차 안에서 뉴스를 듣는 일, 옷 정리를 하며 미리 입어보는 겨울 스웨터, 그리고 맥주의 첫 한 모금 같은 것들. 평범하다 못해 하찮아 보이기까지 하는 일상 속에서 작가는 삶의 기쁨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것은 작가의 눈 속에서 가장 순수한 상태로 재생된다. 막 잡아 올린 갈치떼처럼 눈부시기까지 하다. 그 빛의 근원은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삶의 언저리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에서 비롯된다.

글의 배경이 프랑스이기 때문에 우리 정서와는 사뭇 다른, 낯선 소재들이 자주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매우 낯익은 낯설음으로 다가온다. 프랑스라는 이국적인 이미지와 작가의 농경사회에 대한 근원적 그리움, 자연친화적인 세계관이 절묘하게 맞물려 묘한 울림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또한 삶의 본질은 시간과 공간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가 붙잡고자 하는 것들은 모두 순간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 자칫 스쳐지나갈 수도 있는, 손을 대면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 것 같은 것이기에 더욱 아련하고 안타깝다. 들레름은 그러한 사물들에 '은유'라는 웃을 입힘으로써 구체성과 추상성을 동시에 부여한다. 그리고 이것은 삶의 입구를 서성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무수한 거대담론의 틈바구니 속에서 허덕이는 현대인들에게 <첫 맥주 한 모금>은 느리게 살아간다는 것의 아름다움과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발견하는 기쁨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번역을 맡은 김정란 시인의 말처럼 독자는 그의 이야기를 천천히, 꾸벅꾸벅 졸기도 하면서, 순서 없이 아무데나 펼쳐, 아무렇게나, 게으르게 읽어내면 되는 것이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