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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큼소다님의 서재
  • 행복을 주는 그림
  • 크리스토프 앙드레
  • 9,000원 (10%500)
  • 2007-08-20
  • : 393

저는 서평이라기보다는 이 책에 나오는 그림들을 가지고 전시회를 열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불행하다고 믿는 주인공이 '행복을 주는 그림들'을 통해 행복을 찾아가는 과정을 소설형식으로 스토리텔링을 해보았습니다.

(http://cafe.naver.com/gatheringplus 에 오시면 ‘독서스토리텔링’ 게시판에서 멋진 그림과 함께 더욱 생생하게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현재 네이버카페 '전투적인 책읽기'에서 체계적인 책읽기와 페이퍼작성, 토론 메이트 시스템을 구축하여 독서모임을 조직하고 있습니다.

독서모임 대원들은 같은 책을 읽고도 저처럼 스토리텔링을 하기도 하고,

요약을 하기도 하며 관계도, 마인드맵 등으로 도식화를 시키기도 합니다.

저희 카페에 오시면 임계량 도서목록뿐만 아니라 책에 관한 많은 정보 및 스토리텔링 자료를 얻으실 수 있습니다.

저희는 함께 할수록 플러스가 되는 gathering plus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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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부터 수면제를 구입했다. 하루에 한 알씩. 몇 달 째 이어지고 있는 오래된 연인과의 권태도 너무나 괴롭지만 함부로 끝내지도 못하고 있었다. 남친에게 자살 하겠다 으름장까지 놓아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나의 변덕스러움에 그도 점점 지쳐가는 듯하다. 하루에 한 알씩 사 모을수록 마음은 더욱 굳어졌고, 결국 한달 동안 나에겐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행복하지 않은 이런 삶은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 수면제 30알을 입 속에 털어 넣었다. 그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찾아올 사람은 없었지만 혹시나 남친일까 하는 마음에 현관으로 갔다.


“누구세요? 길도씨?”


“박은희씨 계시나요? gathering plus에서 주최한 『행복 전시회』에 초대되셨습니다.”


초대권을 받아 열어보니, 아무런 설명도 없고 장소만 적혀 있을 뿐이었다. 그림이 얼마나 아름답기에 ‘행복전시회’라고 지었을까 싶어, 나의 조용한 의식(儀式)은 하루 미루기로 하고 전시회장으로 이끌렸다.


전시회에 도착하니 전시장은 커다란 원형건물이었다. ‘행복의 일생’이라는 문으로 들어서자 왼쪽부터 빙 둘러 관람하도록 되어있었다. <아침-행복의 탄생관>으로 들어서려는 찰나, 뒤에서 어떤 여자목소리가 나를 불러 세웠다.


“박은희씨? 전 이 곳의 책임자 정진영이라고 해요. 저희 『행복 전시회』의 관람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저희 전시관은 크게 5개의 관으로 나누어져 있고, 원형 건물이라 왼쪽부터 쭉 한 바퀴 도시면 됩니다. 아, 각 전시관들은 어떤 특별한 방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 곳에서 행복을 좀 더 가까이 만나볼 수 있으실 거 에요.^^ 각 전시관의 바깥쪽 벽면으로 작품이 둘러져 있고 안쪽 벽면으로 그 방으로 통하는 문이 있답니다. 그럼 행복한 관람되세요.”


<아침-행복의 탄생館>


제1관인 <아침-행복의 탄생관>에 들어서니 고흐, 클림트 등 너무나 유명한 화가들의 유명한 작품이 걸려 있어서 반갑기는 했지만 절대 작품을 보면서 행복해지는 정도는 아니었다. ‘뭔가를 기대한 내가 바보지. 행복은 역시 나하고 어울리지 않아.’ 이처럼 급 실망함과 동시에 그냥 갈까 싶었는데 안쪽 벽면에 있는 방이 궁금해졌다. 안에 뭐가 있는 지만 보고 갈 요량으로 철재 손잡이를 슬그머니 돌렸다. 방은 어두웠지만 가운데 벽에 작품 하나가 낮게 걸려있었고 자그마한 조명 네 개가 작품의 모서리에서 작품을 향해 비추고 있었다. 그림 앞에는 의자 하나가 마련되어 있기에 살며시 가서 앉았다.


그 작품의 이름은 <티볼리의 작은 폭포>였다. 그림을 정면으로 마주하여 앉아서 보니 좀 더 여유가 생겨 천천히 감상하고 있었는데, 그림 밑에 한 줄의 질문이 눈에 띄었다. ‘숨은 행복이 보이는가?’ 숨은 행복이 보이냐고? 이곳에 행복이 있다고? 그냥 일상의 한 단면을 포착했을 뿐인 것 같은데. 그림을 조금 더 구석구석 뜯어보았다. 푸른 하늘과 무성하게 우거진 나무들, 저 뒤로 폭포가 보이고 오래된 성벽위로 빨래를 널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여자들과 아래에서 시커먼 동굴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아이들과 그 외 많은 사람들. 아무리 봐도 평범한 일상이었다. 그런데 왜 ‘숨은 행복’이라고 했을까? 그림 속의 주인공들은 행복한데 보기엔 너무 안 행복해 보여서? 그 행복이 너무 작아 눈에 잘 안 띄어서? 당장 눈에 띄지 않더라도 숨어 있다가 언제라도 나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하는 건가?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지만, 답은 내리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심-행복의 충만館>


들어왔던 문으로 다시 나가려고 보니, 바로 옆에 <점심-행복의 충만관>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었다. 문득 다음 관에는 어떤 그림이 있을지 궁금해져서 마저 다 보고 나가기로 마음을 바꿨다. 밖으로 나오자 아침관에서와 같이 바깥쪽 벽면으로 작품이 쭉 걸려있었다. 이번에는 작품 하나하나 조금씩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프랑스의 첫 국경일을 맞이한 <몽토르게이 거리>의 모습은 행복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강렬한 이미지였다. ‘이 안에 당신이 보이는가?’라는 질문을 읽고 내가 저 곳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하자 얼마 안가 몸에 소름이 돋았다. 수많은 사람들의 함성과 감격의 눈물, 그것은 또 하나의 행복이었고 세상을 바꾸는 힘이었다.


샤갈이 그린 <농부의 삶>이라는 그림은 몽환적이고 따뜻한 느낌이었다. ‘행복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읽고 그림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말에게 풀을 먹이면서 행복해하는 농부의 모습 위로 따뜻한 집 안에 모여 앉아 얘기하는 남자들, 흔들거리며 가는 4륜마차, 춤추는 부부의 모습이 농부와 말을 감싸고 있었다. 이런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인가? 나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고 따뜻한 집은 물론 차도 있고, 애인도 있는데?


<푸른 바탕 위의 인물>은 보자마자 기분이 이상했다. 얼굴은 활짝 웃고 있는데 팔 다리가 없었다. 질문을 보니 ‘당신도 충분히 행복의 지능을 계발하였는가?’였다. 행복의 지능? 너무나 어색한 단어였다. 행복이 지적 능력이란 말인가? 지적 능력은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계발할 수 있는 것인데, 행복이라 함은 관계된 감정이고 우연한 기회가 아니었던가? 팔 다리가 없어 나보다도 훨씬 불행해야 할 이 사람이 웃고 있다면, 나도 노력하여 행복의 지능을 계발한다면 얼마든지 웃을 수 있는 것인가?


이제 마지막 작품을 보러 방으로 들어갈 차례였다. 문득 궁금해졌다. 밖에 있는 작품들과 방 안에 있는 작품들은 뭐가 다른 거지? 더 비싸기라도 한가?


이번에도 천천히 의자로 가서 앉았다. <갑판 위에서>라는 제목의 프리드리히 작품이었다. 황혼의 따뜻한 빛에 젖어 젊은 두 남녀는 갑판 위에 앉아 멀리 보이는 도시를 함께 응시하고 있었다. 얼굴 표정이 보이는 것도 아닌데 두 손 꼭 잡은 뒷모습만 보아도 그림 속의 커플은 아름다운 사랑으로 충분히 행복해 보였다. 너무나 부러웠다. 예전엔 나도 충만한 사랑을 느끼며 행복했었는데.. 아, 나에게도 행복했던 순간이 있었구나. 그렇다면 지금은? 길도씨와 헤어진 것도 아닌데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눈물이 날 것 같아 더 이상 그 그림을 보고 싶지가 않았다. 질문도 보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나와 버렸다.




<저녁-행복의 황혼館>


<저녁-행복의 황혼관>으로 들어섰다. 처음 마주한 그림은 <시테라 섬으로의 여행>이었다. 나란히 있는 세 커플 각기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지만 무슨 상황인지 쉽게 보이지가 않았다. ‘행복이 사라져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보고, 즐거웠던 시테라 섬으로의 여행의 끝나갈 무렵이라는 것을 유추했다. 첫 번째 커플의 여자는 아쉬움에 발을 못 떼고, 두 번째 커플은 그들의 짧은 행복이 끝나감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세 번째 커플의 남자는 그 사실을 외면, 거부하는 듯 보인다. 꺼져가는 행복 앞에서 내가 생각한 자살이라는 방법은 가장 우스워 보이는 세 번째 남자의 태도가 아닌가?


<에나와 베르트하이머>라는 두 자매를 그린 작품은 나의 눈길을 끌었다. 두 자매의 아름다운 자태와 평온한 미소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볼수록 어딘가 모르게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행복이 주는 미묘한 고통이 두려운가?’ 난 이해할 수 없었다. 왜 행복이 고통을 주는가? 그러다 문득 과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한창 사랑에 빠져 이 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에 오히려 행복이 두렵고 슬펐던 적이 있었다. 그 행복이 주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행복조차 외면하려 했던 내가 생각났다. 두 자매는 내게, 행복이 사라지는 고통을 외면한다면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갔다. 종 전까지와는 달리 너무나 어두운 분위기에 흠칫했다. 조명이 어두워졌나 싶었지만 그 것은 순전히 작품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였다. 다가가 의자에 앉으니, 내 앞에 <붉은 치마를 입은 여자>가 흔들의자에 마주 앉아 있었다.


너무나 이상했다. ‘행복’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었다. 고통이라기 보단 우울에 가깝고, 절망이라기보단 허무에 가까운 눈빛. 슬픔의 오랜 지속으로 아예 무감각 해져버린 그런 표정. 다가가 손을 잡아주고 싶었다. ‘당신도 슬픔의 유혹에 굴복했는가?’ 그림 속의 여자가 나에게 묻는 것만 같았다. 아니 이 여자는 나의 모습 같았다. 나는 슬픔에 굴복한 것인가? 슬픔의 유혹에 넘어간 것인가? 이에 저항하기 위해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밤-사라진 행복館>


<밤-사라진 행복관>으로 들어섰다. 다음 그림은 좀처럼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온몸이 <붉은 인물>이 정신 없는 배경을 두고 가만히 서있었다. 스탈린 정권의 억압 아래 괴로움 속에서 살아온 작가에 대한 설명을 읽고 나니 조금씩 이해가 됐다. 피투성이가 된 듯한 여인의 모습은 강력한 고통의 느낌을 주지만 그와 동시에 그에 맞서려는 굳건한 의지 또한 느껴진다. 주변의 일그러지고 왜곡된 이미지는 절망적 상황을 한층 강화시켜준다. ‘불행 속에서 주저앉을 것인가?’ 이 붉은 여인이, 앞서 붉은 치마를 입고 흔들의자에 앉아 울고 있던 여인이 우뚝 선 모습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코에센의 눈 내리는 거리>에서 두 여인이 걸어가고 있다. 표정 없는 여인들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차갑고 암울하다. ‘괴로움에 길 잃어 방황하고 있진 않은가?’ 이 여인들이 혹한 속에서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는지, 길 잃고 방황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 추위와 어둠 속에서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방에는 그 유명한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이 있다. 그는 시련 앞에 마주 서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넘어, 그것과 맞서 싸운다. ‘행복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하였는가?’ 야곱은 자신의 가족들을 강 너머로 건너게 도와주고 혼자 남아 천사(불행)에 맞서 싸운다. 엉덩이뼈가 부러졌는데도 굴하지 않고 천사에게 복을 요구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이름까지 얻는다. 나는 행복을 얻기 위해 무엇을 했지? 조금이라도 상처 입을까 잔뜩 몸 사려가며 수많은 기회들을 지나쳐버린 것은 아닐까? 그래, 그랬다. 엉덩이 뼈 부러지는 것이 두려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포기했던 거다. 내 스스로가 항상 행복을 흘려보냈던 거였다. 평소 잘 울지 않는 나인데 자꾸만 울컥하여 눈물이 핑 돈다. 마지막 <새벽-행복의 귀환관>으로 들어섰다.



<새벽-행복의 귀환館>


<팔라바 바닷가>에 한 남자가 서있다. 그의 뒷모습은 왠지 모르게 힘이 넘친다. ‘왜 되찾은 행복은 막 탄생하는 행복보다 더 강하고 매혹적인가?’ 아, 이 남자는 한동안 절망과 불행 속에 있다가 행복을 되찾았구나. 나도 행복을 되찾을 수 있을까? 내가 너무 감사한 줄 모르고 사니까 행복이 일부러 멀어졌던 것은 아닐까? 되돌아 왔을 때 보다 환영 받고 싶어서.


<은으로 만든 물컵>과 사과 세 개가 놓여져 있다. 이건 평범한 정물화잖아? 사과 세 개로도 행복 하라고 말하고 있는 건가? 질문을 보았다. ‘명상과 행복, 둘은 서로 어떤 관계인가?’ 처음엔 질문이 잘못 붙은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그림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꼭 명상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명상과 행복은 어떤 관계지? 명상을 하면 행복해지는 건가? 아니, 이 두 관계는 수단과 목적의 관계가 아닌 것 같다. 명상은 과거를 돌아보는 반성도 아니고,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도 아니다. 현재를 사는 방법을 알려주고 현재에 있기 때문에 명상은 행복 그 자체가 아닐까?


드디어 마지막 방이다. <돌아온 탕아>가 무릎 꿇고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있는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 이야기 또한 유명하여 잘 알고 있었지만 그림으로 보는 것은 처음이다. 상속받은 재산을 챙겨 멀리 도망갔다 모두 탕진하고 돌아왔으나, 그의 아버지는 벌을 내리고 비난하기는커녕 반가움에 제일 먼저 달려 나간다. 어쩜 저렇게 너그러운 얼굴을 할 수 있을까. 아들의 죄를 어떻게 저리도 쉽게 용서할 수 있을까. ‘이 순간, 두 사람 중 누가 더 행복할까?’ 난 누군가를 용서해본 적이 없다. 용서를 구해본 적도 없다. 하지만 분명 아버지가 더 행복해 보이는 것만은 분명하다. 탕아가 부럽다. 나도 용서받을 수 있을까? 딱히 무엇을 용서받고 싶은 지, 누구에게 용서받고 싶은 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을 회개하고 싶다. 모든 것을 용서받고 다시 태어나고 싶다. 그 동안 참았던 눈물이 마구 쏟아져서 제어할 수가 없다. 내가 왜 이러지.. 어느새 나도 모르게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갑자기 문자가 왔다. 매너모드를 해놓지 않아 문자소리가 텅 빈 방에서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은희씨, 전시회 잘 보고 있어? 오늘 하루 은희씨를 위해 빌렸어. 작품 선정도 내가 했고 말야. 어때? 근사하지? 천천히 보고 나와.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행복이 돌아왔다. 아니, 투명망토를 뒤집어쓰고 내 곁에 항상 숨어있던 놈이 드디어 망토를 벗어 던지고 내 앞에 자신을 다시 드러냈다. 다시는 널 모른 채 하지 않을게. 고마워 곁에 있어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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