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은 유난히 죽음과 관련한 사건이 많았다. 용산참사로 사람‘들’이 죽었고 세 명의 지도자들(김수환, 노무현, 김대중)이 연달아 타계했다. 나 역시 올 한해는 혹독했다. 개인적인 건강문제로 거의 죽을 뻔하다 살아났고 비슷한 시기에 가까이 사시던 작은 아버지는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셨다. 나는 어떤 사람의 죽음에도 찾아가서 애도하지 못했지만 이 모든 경험은 내가 생각보다 죽음과 가깝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 책은 최근 내가 관심을 가지게 된 삶과 죽음, 생명에 대한 문제를 사회적 의미로 설명한다. 그들의 죽음과 그를 둘러싼 대중들의 이상하도록 조용하거나 열광적인 반응에는 어떤 사회적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
이 책을 산 것은 인권운동의 대안을 모색하는 논문을 계획하기 위해 한국사회에 대한 총체적 이해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 역시 이 책의 저자들처럼 많은 사람들이 죽는 가운데 대중이 보였던 기이한 외면과 열광적 애도가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꼈기 때문이기도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왜 외면했는지, 왜 열광했는지는 알 수 있었다. 사실 그것만 해도 큰 소득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대중이 현실을 직시하도록 할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건 독자에게 맡겨진 몫이다.
이 책은 크게 ‘애도’에 대한 질문과 ‘기억’에 대한 성찰로 나뉜다.
‘정치’적 죽음, ‘역사’적 죽음, 정치의 죽음(엄기호)에서 그 죽음들의 의미는 순서대로 노무현, 김대중, 용산참사를 의미한다. ‘노무현의 죽음이 소요로 이어져서는 안되는 것이었다면 김대중의 죽음은 결코 논쟁으로 이어져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p.32) 용산은 전혀 다르다. 사실 모든 죽음들 중 가장 이상한 것이 용산에 대한 대중의 기이한 침묵인데 엄기호는 이를 ‘삶에 앞선 개발’에서 찾는다. 그것은 가장 신성한 질서이다. 이 사회 질서가 가진 도착의 핵심은 삶이 개발에 종속되지 않는다면 삶조차 지킬 수 없다는 데 있다. (p.38)
나 역시 용산의 침묵은 한국사회 구성원들의 생존본능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나는 개발논리에 도착된 사람들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타인의 죽음을 돌아보지 않았다고 생각한데 반해 엄기호는 정치적 질서에 대해서는 마음껏 떠들어도 되지만 (개발 욕구가 삶의 터전을 압도하는) 재산에 대한 질서는 결코 건드릴 수 없다는 불문율에서 원인을 찾았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진 않다. 우리 삶은 진정 누군가를 파괴하지 않고는 지킬 수 없는 것인가.
‘더 이상 아름다운 순교자는 없다: 우리는 노무현을 지키지 못해 미안해야 하나?’(김원)에서는 노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대중의 담론 분석을 시도한다. 노무현을 희생양, 타살, 순교자 등으로 생각하는 개인/집단이 어느 정도인지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비극적인 죽음으로 인해 지속가능한 승자독식 사회를 상상하던 이들이 만든 ’잃어버린 10년‘이라는 기획’(p.49)은 실패했다는 평가에는 나 역시 동감한다.
그는 ‘노무현 개인과 노무현의 정책을 분리하는 것이 대중 정서 속에서 매우 어렵다는 점을 발견’(p54)했다고 고백하지만 그의 죽음에 얽힌 대중의 이상한 정서를 읽어나간 것은 나로서는 매우 속 시원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노동자의 친구가 되고자 했고 탈권위적 모습을 가졌던 노무현은 기억하면서, 그의 집권 5년은 또 ‘기묘하게’ 잊었다.‘(p.48)
이 현상을 어찌 보아야 하나. 대중을 힐난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답이 아니다. 그것은 대안 없이 주어진 조건에서 가능한 선택지였다. 대안은 무엇인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구원자가 아닌, 새로운 정치를 구성하기 위한 자기 조직화이다.’(p.67) 아름다운 순교자는 결코 대안이 될 수 없다.
‘죽음과 생존을 묻다-애도, 우정, 공동체’(권명아)는 2009년 베스트셀러인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와 윤제균 감독의 영화 ‘해운대’의 이례적인 성공은 부당한 죽음을 애도하는 정치적 공간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죽음의 책임이라는 모티프는 촛불과 광장과 조문행렬에서 극장과 서점가로 이동하였다. 왜 우리는 용산참사와 노무현의 죽음에서는 제대로 애도하지 못하고 다른 자리에서 애도에 열중하는가. 권명아는 그 답을 찾기보다 애도하지 못하는 개인의 심리를 이야기하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정치가 아닌 문학비평가라서 그런 것 같다.
‘지금 한국사회의 구성원들이 매우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슬픔의 양식이 실은 열전과 냉전의 도가니에서 구성된 폭력적인 것이라는 점을 환기하고자’(p.80) 박완서의 ‘부처님 근처’(1973)를 통해 애도가 금지된 자들의 심리분석을 시도한다. 소설 속에서 두 모녀는 반동, 욕된 죽음으로 간주된 아들과 남편, 오빠와 아비의 죽음에 공적인 애도를 표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죽음들을 ‘꼴깍 삼켜버렸다.’
삼켜버린 죽음은 그들을 부들부들 떨게 만드는 삶의 불안감을 낳고, 그녀(주인공)의 삶은 집요할 정도로 생존과 자기보존에만 몰두하는 방향으로 이끌려 간다.(p.82) 사람의 죽음에 마음껏 슬퍼하고 죽은 자가 떠난 후 남아있는 사람들끼리의 삶의 관계가 제대로 재구성되어야 온전히 삶이 지속될 수 있을 터인데 용산에선 지금 그러질 못하고 있다.
‘무덤은 언제나 핑계였다: 원한과 연민의 정치에 대한 명상’(김성태) 의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인식은 앞의 엄기호, 김원과 비슷하다. 노무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은 ‘87년 이래의 민주화’기획이 실패했음에 대한 (재)확인이자,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민주화 이후 ‘20년’ 역사의 과정이 누구도 원치 않았던 방식으로 종막‘(p.131)을 맞은 것이라고 말한다.
용산참사와 쌍용차의 경과와 의미를 뒤늦게나마 짚어보려 한다면 ‘무수한 죽음들의 동일함에 대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죽음을 기억하기 위해’(송경동)를 보는 것이 좋다. 그가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을 ‘자본’이라고 하며 김대중과 노무현의 죽음에 국화꽃을 놓아줄 수 없었던 것은 그 대통령들이 신자유주의 노선을 추구하며 많은 이들이 학살되었기 때문이다. 두 대통령을 모두 비판하나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비판이 더 크다. 송경동에 따르면, 그(노무현)의 패배 때문에 이명박이 등장한 것이 아니라 그가 깔아준 탄탄대로를 따라 이명박이 손쉽게 입성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p.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