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예 12년 >
스티브 맥퀸 감독
치에텔 에지오프 , 루피타 니옹, 마이클 패스벤더, 베네딕트 컴버배치,브레드 피트.
2014 아카데미 작품상, 여우 조연상, 각색상 수상.
충격적이었다.
정확히 언제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릴 적 tv에서 ‘ 뿌리 ’ 라는 미국(?) 드라마를 본 적이 있다. 그 드라마로 인해 피부색이 검은 아이들은 드라마의 주인공인 흑인 쿤타킨테의 이름을 따서 놀림을 받기도 했던 당시엔 꽤 인기있는 드라마였다.
접해보지 못한 외국 드라마인데다 미국 흑인 노예의 비극적 삶을 다룬 이야기의 흡인력이 상당히 강해 지금도 드라마의 잔영이 기억 속에 남아있다.
특히, 정확한 기억인진 알 수 없으나 도망치다 잡힌 쿤타킨테가 다시는 도망치지 못하도록 주인에 의해 나무에 묶인 채로 도끼로 양발가락을 잘리는 장면은 어린 나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던 거 같다. 그 장면만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니 말이다.
이 영화를 보려고 맘 먹은 것은 아카데미 수상작이란 후광에다 이런 내 어릴 적 기억이 호기심으로 작용했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지독히도 사실적이고 담담했다.
인간성은 말살되고 가축과 동일하게 취급되는 노예들의 모습을 불편할정도로 가감없이 낱낱이 보여주었다. 그리고, 또 하나, 노예들에게 말할 수 없이 참혹한 ‘ 악 ’을 행하는 백인들의 모습, 특히 하나님을 코 끝에 매달고 행하는 그들의 추악한 뒷모습, 그 이중성을 같은 비중으로 보여주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저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셨다던가.
‘ 악 ’을 ‘악’ 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인간의 행동은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걸까?
더욱이 자신의 악함을 선으로 포장하고 합리화 하려는 인간은 그 얼마나 추악한가
하는 것을 영화는 담담히 보여주고 있었다.
자신이 저지른 죄악을 애써 외면하고 그 책임마저 노예들에게 전가하려고 발버둥치는
백인 농장 주인, 그가 신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죄책감으로 인해 겪는 정서적 혼란은 어쩌면 우리네 인간 모두가 삶을 살아가며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겪을 법한 일일지도 모른다.
차라리 선악의 개념이 없는 인간은 행복하다. 악을 악으로 인식하지 못하므로 마음 속 갈등도 죄책감도 심판에 대한 두려움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보는 내내 충격과 불편함의 연속이었지만 정작 나를 불편하게 했던 장면은
주인공 솔로몬 노섭이 채찍을 맞는 장면도, 벌거벗은 채 마치 노새나 말처럼 백인 주인들에게 팔려가기 위해 서 있는 노예시장 장면도, 올가미에 목이 매인 채 누구의 도움도, 관심도 받지 못하고 하루 종일 매달려 있는 장면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자유인에서 하루아침에 자신의 이름도 말하지 못하고 ‘ 플랫 ’ 이란 이름의 노예로서의 삶을 강요당했던 그가 절망에 빠져 화면 밖에 있는 관객을 응시하는 장면이다.
꽤 길었던 그 장면은 겁에 질리고, 도저히 헤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절망 속에 갇힌 그가 마치 우리에게 제발 도와달라고 말없이 호소하는 듯 했다.
화면 안에 갇힌 그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자신의 고통을 그저 구경하고 있는 우리들
에게 보내는 구조요청이자 책망 같았다.
그래서, 그가 많은 이야기와 감정이 담긴 그 커다랗고 슬픈 눈으로 가만히 화면 밖 우리들을 응시할 때 나는 몹시 불편함을 느꼈다.
어쩌면 그를 저 참혹한 지옥 속에 가둔 사람은 우리 모두 인 것 만 같았다.
노예 12년 속 솔로몬 노섭의 이야기는 1800년대 미국의 노예제도에 대한 고발이 아니라 현재에도 세상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간이 인간에게 행하는 모든 ‘ 악 ’ 에 대한 보고서다. 그것이 이 영화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불편하지만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일 것이다.
2014. 3.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