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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기[타자기]는 그[니체]의 저술에 아주 미묘한 영향을 끼쳤다. 니체의 가까운 친구 중 한 사람으로 작가이자 작곡가인 하인리히 쾨젤리츠는 니체의 글에서 변화를 감지했다. 니체의 산문은 보다 축약되고 간결해졌다. 새로운 힘이 느껴졌다. 마치 일종의 불가사의하면서 초자연적인 힘을 통해 기계의힘이 종이에 찍히는 단어로 전이된 듯했다. 쾨젤리츠는 편지에 “아마도 이 기기를 이용하면서 새로운 언어를 갖게 될 것이네”라고 쓰면서 자신의 작업에 대해서는 “음악과 언어에 대한 나의 생각들은 펜과 종이의 질에 의해 종종 좌우되지”라고 말했다.

니체는 이에 대해 “자네의 말이 옳아. 우리의 글쓰기용 도구는 우리의 사고를 형성하는 데 한몫하지”라고 답했다.
P.39

우리 뇌 조직이 천재적이라 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많은 것을 내장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도리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철학자인 데이빗 불러(David Buller)는 진화심리학을 비판한 책 《Adapting Minds(적응하는 사고)》에서 자연 도태 과정은 “미리 만들어진 적응으로 이루어진 뇌를 설계한 것이 아니며 도리어 개개인의 일생을 통해 또는 며칠에 걸쳐, 요구를 담당하는 특별한 구조를 형성하면서 주변의 환경적 요구에 적응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고 적었다. 진화는 말 그대로 우리에게 여러 번 사고를 반복함으로써 변화할 수 있는 뇌를 안겨 주었다.
P.57

모든 기술은 인간 의지의 표현이다. 도구를 통해 우리는 힘을 키우고 자연, 시간, 거리는 물론 타인 등 주변 환경을 통제하기를 원한다. 기술은 크게 네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이는 우리의 자연적 능력을 보완하거나 극대화시키는 방식에 따른다. 쟁기, 바늘, 전투기 등을 아우르는 한 무리는 우리의 체력, 민첩성 또는 복원력을 키워 준다. 두 번째 무리는 현미경, 확대경, 가이거 계수기 등으로 우리 감각을 민감하게 만든다. 저수지, 피임약, 유전자 변형 옥수수 등의 기술을 아우르는 세 번째 무리는 우리가 필요나 욕망에 더 충실할 수 있도록 자연의 모습을 바꿔 놓는다.

지도와 시계는 네 번째 무리에 포함된다. 의미가 약간 다르지만 사회인류학자인 잭 구디와 사회학자 대니얼 벨이 쓴 ‘지적 기술’이라는 단어를 빌리면 그 특징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다. 이는 정신적 능력을 확장시키거나 또는 지원하는 대 사용되는 모든 도구들, 즉 정보를 찾고 분류하기 위해, 아이디어를 생각해내고 더욱 확실히 하기 위해, 노하우와 지식을 나누기 위해, 측정하고 계산하기 위해, 우리 기억력을 확장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기술들을 망라한다.
P.73 ~ 74

정치학자 랭던 위너는 “근대 사회에서의 경험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이 있다면 기술은 단순히 인간 활동의 보조적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과 의미를 재구성하는 강력한 힘이 된다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P.78

실험 결과 글을 익힌 이의 뇌는 문맹자의 뇌와 여러 측면에서 차별화됨이 밝혀졌다. 뇌가 언어를 이해하고 시각 신호를 처리하는 방식,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기억을 형성하는 방식 등에서 차이를 보인 것이다. 멕시코의 심리학자인 페기 오스트로스키 솔리스(Feggy Ostrosky-Solis)는 “읽는 방식을 배우는 것은 성인의 신경정신적 시스템을 강력하게 형성한다”고 말했다.
P.83

[《파이드로스》에서] 분명히 소크라테스는 티무스의 견해에 수긍하고 있다. 그는 파이드로스에게 말하기를 “단순한 사람만이 글로 쓰여진 것이 지식과 대상에 대한 기록 중 최고라고 생각할 것”이라고 핬다. 잉크 ‘액’으로 적힌 단어보다 더 나은 것은 입을 통해 나오는 “학습자의 영혼에 새겨진 지적인 말”이라고 했다. 소크라테스는 “망각하는 옛날과 달리 기억이 가능하다”며, 글로써 자신의 생각을 잡아내는 데 따른 실용적인 이익을 인정하지만 알파벳이라는 기술에 의존하는 것은 인간의 사고를 부정적으로 바꿀 것이라고 주장한다. 외부 기호가 내부의 기억력을 대체하면서 글쓰기는 우리를 피상적인 사고의 소유자로 만들며, 우리가 진정한 행복과 지혜로 향할 수 있는 지적인 깊이를 획득하는 데 방해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P.87 ~ 88

글로 쓰여진 말은 개인의 기억력이라는 속박에서 지식을 자유롭게 했고 기억과 암송을 위한 리드미컬하고 형식적인 구조에서 언어를 해방시켰다. 이는 사고를 생각과 표현의 새로운 개척자로 이끌었다. 맥루한은 “서구 사회의 성과물은 확실한데, 이는 글을 읽고 쓰는 놀라운 능력에 대한 증거다”라고 썼다.
P.90

그렇다면 책 그 자체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모든 대중 매체 중에서 아마도 인터넷의 영향을 가장 잘 버텨낸 것이 책일 것이다. 읽기 대상이 인쇄된 종이에서 스크린으로 넘어가면서 책 출판인들은 약간의 수익 감소는 겪었을 테지만 책의 형태 그 자체는 그리 크게 변하지 않았다. 두 장의 두꺼운 표지 사이에 가지런히 묶인 일련의 인쇄된 페이지들은 500년 넘게 대중적인 위치를 지켜온 놀랍도록 견고하고 유용한 기술로 인정받아왔다.
P.150

컴퓨터 스크린을 통해 보는 온라인 문서 페이지는 인쇄된 문서 페이지와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웹 문서를 스크롤하거나 클릭하는 것은 책이나 잡지 페이지를 넘길 때와는 다른 신체적인 동작과 감각적 자극을 수반한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독서라는 인지적 행동은 시각뿐만 아니라 촉각을 동원한다. 이는 시각적일 뿐 아니라 촉각적이다. 노르웨이에 문학 교수인 앤 만젠(Anne Mangen)은 “모든 독서는 멀티 감각적”이라고 했다. 글로 적힌 저작물이라는 “유형의 물질에 대한 감각적 운동 경험과 문자 콘텐츠에 대한 인지과정” 사이에는 “중요한 연관성”이 있다는 것이다. 종이에서 스크린으로의 변화는 단순히 글이 담긴 문서를 살펴보는 방식만 변화시킨 것은 아니다. 이 변화는 이 문서의 집중하는 정도와 빠져드는 깊이의 정도에 영향을 미친다.
P.137 ~ 138

<월 스트리트 저널>의 고든 크로비츠(L. Gordon Crovitz)는 킨들과 같은, 사용이 쉬우면서 인터넷과 연결된 리더기들은 “우리에게 집중의 시간을 되돌려주고 최고의 위대함을 결정하는 요소인 글과 그 의미를 확장시킬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라고 말했. 이는 지적인 사고가 가능한 이을 대부분이 공유하고자 하는 감정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희망일 뿐이다.

크로비츠는 맥루한이 경고했던 바로 그 무지의 희생자로서, 미디어 형태가 바뀌는 것이 어떻게 그 콘텐츠를 바꿀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거대 출판사 하퍼콜린스(HarperCollins)의 독립 출판 브랜드인 하퍼스튜디오(HarperStudio)의 부사장은 “전자책은 단지 전자 형태로 전달되는 종이책 이어선 안 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 매체를 이용하고 그 경험을 향상시키기 위해 뭔가 역동적인 것을 창조 할 필요가 있다. 링크와 이면의 이야기 그리고 내레이션, 동영상, 대화를 원한다”는 것이다. 책에 링크 기능을 투입하고 또 인터넷 연결하자마자, 즉 이를 확산하고 향상시켜 역동적으로 만들자마자 책을 읽는 경험은 물론이고 책 자체를 변화시키게 된다. 오라인 신문이 신문이 아닌 것처럼 전자책은 더 이상 책이 아니다.
P.155

최근 출판된 학술적 역사서건 200년 된 빅토리아 시대 소설이건, 종이책이 전자 기기로 옮겨져 인터넷과 연결될 때 이는 웹 사이트와 같은 존재로 변한다. 단어들은 인터넷에 연결된 컴퓨터의 산만함으로 포장된다. 링크 등 디지털 기능들은 독자들을 이곳 저곳으로 몰고 간다. 책은 존 업다이크(John Updike)가 말한 날카로움을 잃고 인터넷의 방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해체된다. 종이책의 선형성은 책이 독자들에게 권장하는 고요한 집중과 함께 파괴되었다[선형성, 고요한 집중 둘 다 파괴됐다는 말 - 형우]. 킨들과 애플의 신형 아이패드와 같은 기기의 최신 기능은 우리가 전자책을 선택할 가능성을 더 높여 주긴 하지만 이를 통한 읽기는 종이책을 읽는 방식과 매우 다를 것이다.
P.157

19세기에 씌어진 개인적인 서신은 오늘날 씌어지는 개인적인 이메일이나 문자 메시지와 닮은 점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우리는 무형식과 즉각성이 주는 즐거움에 빠져 표현력과 수사법을 잃었다.

[여기 달린 각주] 지금까지 디지털 미디어가 언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우려는 대부분 어린이들이 메신저나 문자 메시지를 보낼 때 사용하는 축약형이나 이모티콘과 관련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가장 최신식 속어에 불과한 별 문제 없는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성인은 자신들의 글쓰기 능력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자신들이 사용하는 단어 수가 줄어들고 있지는 않은지, 표현이 진부해지고 있지는 않은지, 통사는 덜 유연해지고 더욱 정형화될지 등. 이는 인터넷이 언어의 표현력과 다양성에 장기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판단하는 데 있어 관심을 기울여야 할 문제다.
P.163

구텐베르크의 발명으로 대중화된 고요함이 의미와 정신의 일부였던 깊이 읽기의 관행은 점차 사라지고, 계속 감소하는 소수의 엘리트만의 영역이 될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 우리는 역사적인 표준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P.163

19세기 초 신문이 대중적으로 퍼져나감에 따라(런던에서만 100개가 족히 넘는 신문이 발행되었다) 많은 관계자들은 책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고 여기기에 이르렀다. 책이 어떻게 매일 보도하는 매체의 신속함과 경쟁할 수 있겠는가? …

그 존재를 위협하는 새로운 대상이 등장했으니 이는 토머스 에디슨(Thomas Edison)의 축음기였다. …

책은 신문을 극복했듯 축음기를 극복해 냈다. 듣기는 읽기를 대체하지 못했다. 에디슨의 발명품은 시나 산문을 읽는 것보다는 음악을 연주 하는데 사용되었다. 20세기 동안 책읽기는 치명적으로 보이는 위협을 받았는데, 이 위협들이란 영화 관람, 라디오 청취, 텔레비전 시청 등이었다. 오늘날 책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인쇄된 작품이 향후 몇 년 동안 상당한 규모로 계속 생산되고 읽힐 것이라고 믿을 만한 이유는 충분하다. 물리적인 책이 소멸의 길에 있다 할지라도 그 길은 확실히 길고 구비구비 굴곡이 있는 길임이 분명하다.
P.164 ~ 167

페더먼과 셜키는 책은 없어도 되는 케케묵은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사려 깊은 사람들이 온라인 생활의 특징인 지속적인 산만함의 상태에 마음 놓고 빠져들 수 있도록 지적인 보호막을 제공하고 있다.
P.169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컴퓨터를 어떻게 사용할지 선택함에 있어 우리는 책의 윤리가 우리에게 말해 주었던 홀로 고독하게 몰입하는 행위를 거부했다. 우리은 우리의 운명을 ‘곡예’에 내맡겼다.
P.172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 하나가 떠오른다. 인터넷 사용이 우리의 사고방식에 미치는 실질적인 영향에 대해 과학은 무엇을 말해 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이 질문은 향후 몇 년 동안 수많은 연구의 주제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렇긴 하지만 이미 우리가 알고 있고 추정할 수 있는 부분도 상당하다. 뉴스는 예상한 것보다 훨씬 불안한 상태다. 심리학자, 신경생물학자, 교육학자 그리고 웹디자이너들이 시행한 연구들은 같은 결론을 보여 주고 있다. 온라인 세상에 들어갈 때 우리는 겉핥기식 읽기, 허둥지둥하고 산만한 생각, 그리고 피상적인 학습을 종용하는 환경 속으로 입장하는 셈이다. 책을 읽으면서도 피상적인 사고가 가능한 것처럼 인터넷을 서핑하는 동안에도 깊은 사고가 가능하기도 하지만 이는 인터넷이라는 기술이 권장하고 또 가져다 주는 사고의 종류는 아니다.
P.172 ~ 173

인터넷은 또한 물리적·정신적 행동의 반복을 권장하고, 반응과 보상을 전달하는 초고속 시스템, 즉 심리학 용어로는 긍정적 강화(positive reinforcement)라는 시스템을 제공한다. 링크를 클릭할 때 우리는 새로운 볼거리와 평가 대상을 얻는다. 구글에서 키워그를 검색하면 눈 깜짝할 사이 흥미로운 정보 목록을 얻을 수 있다. 문자나 메신저 메시지 또는 이메일을 보내면 종종 수초 또는 수분 내로 답을 얻는다. 페이스북을 사용할 때 새로운 친구를 만들고, 오래된 친구들과는 더 친밀한 관계를 형성한다. 트위터를 통해 메시지를 보낼 때 우리는 새로운 팔로어들을 얻는다. 블로그에 글을 올리면 독자들의 댓글을 얻거나 또는 다른 블로거들이 내 글을 링크한다. 인터넷의 쌍방향성은 정보를 찾고 우리를 표현하고 또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는 강력하면서도 새로운 수단을 제공한다. 또한 이는 우리를 사회적 또는 지적 영양분이 담긴 작은 알갱이가 쏟아지도록 명령하는 손잡이를 끊임없이 누르는 실험실의 생쥐로 바꾸어놓았다.
P.176

인터넷 사용자들의 집중적인 뇌 활동 양상은 깊른 독서 들, 지속적인 집중을 요하는 행동글이 온라인에서는 왜 그렇게 어려운지를 설명해 준다. 온라인에서는 수많은 찰나의 감각적 자극을 처리하며 링크들을 평가하고, 또 관련 내용을 검색할지 말지를 선택해야 하는 필요성 때문에, 방해가 되는 문서나 다른 정보로부터 뇌를 분리시키는 동시에 지속적으로 정신적 조정과 의사 결정을 해야 한다. 독자로서 우리가 링크와 마주칠 때마다 적어도 몇 분의 몇 초라도 멈추고 우리의 전전두엽 피질이 그것을 클릭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토록 해야 한다. 글을 읽는 데서 판단하는 것으로 우리의 정신적 자원의 방향이 전환되는 것을 감지조차 못할 수도 있지만(우리의 뇌는 활동이 빠르다) 이는 특히 자주 반복되었을 때 이해력과 기억력을 저해한다.
P.183

욕조를 골무[로 물을 퍼서] 가득 채운다고 상상해 보라. 이는 작업 기억에서 장기 기억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것과 같은 도전이다. 미디어는 정보 흐름의 속도와 강도를 조절함으로써 이 과정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우리가 책을 읽을 때 이 정보의 수도꼭지는 지속적으로 방울을 똑똑 흘려 내보내 우리는 독서 속도를 통해 이를 통제할 수 있다. 오로지 문자에만 집중함으로써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모든 혹은 대부분의 정보를 장기 기억으로 전달하고 스키마[구조 - 형우] 형성에 필수적인 풍부한 연관 관계를 구축해 나간다.

인터넷에서는 각각 콸콸 쏟아지는 여러 가지 정보의 수도꼭지와 마주친가. 우리가 한 꼭지에서 다른 꼭디로 서둘러 이동할 때 우리의 작은 골무에는 물이 넘쳐 흐른다. 이 때 극히 적은 양의 정보만 장기 기억으로 전달할 수 있는데, 이 때 전달하는 것은 다른 수도꼭지에서 나온 물방울들과 뒤죽박죽 섞인 것이다. 이는 하나의 수원에서 나온 지속적이거나 일관성 있는 흐름이 아니다.

어느 시점에서 우히의 작업 기억으로 흘러드는 정보를 ‘인지 부하(cognitive load)’라고 부른다. 이 부하가 정보흘 저장하고 처리하는 우리 사고의 능력을 초월할 때, 즉 골무에서 물이 넘쳐흐를 때 우리는 이 정보를 간직하거나 이미 장기 기억에 저장되어 있는 정보와의 관계를 형성할 수 없으며, 이 새로운 정보를 스키마로 해석할 수 없다. 우리의 능력은 한계에 부딪히고 우리의 이해는 피상적인 수준에 머문다. 계속해서 집중할 수 있는 능력 역시 우리의 작업 기억에 달려 있기 때문에 토르텔 클링베르트가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점은 우리가 무엇에 집중해야만 하는지이다”라고 말했듯 높은 인지적 부하는 우리가 경험하는 산만함을 확대시킨다. 뇌가 혹사당할 때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산만함을 확대시킨다. 뇌가 혹사당할 때 우리는 산만함이 더 산만해짐을 깨닫게 된다. (어떤 연구는 ADD, 즉 주의력 결핍증(attention deficit disorder)을 작업 기억의 과부하와 관련이 있다고 보기도 한다.) 실험 결과들은 작업 기억이 한계에 도달할수록 불필요한 정보와 필요한 정보, 소음에서 신호를 구분하는 것이 더 힘들어짐을 보여준다. 결국 정보에 대해 분별없는 소비자가 되는 것이다.

어떤 대상이나 개념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는 데 있어서의 어려움은 “작업 기억 부하에 의해 엄청난 영향을 받는 것”으로 보인다고 스웰러는 적었고, 우리가 연구하려는 자료가 더 복잡할수록 과부하 걸린 사고는 더 많은 불이익을 가한다.

인지 과부하의 잠재적 요인은 많지만 스웰러에 따르면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관련 없는 문제의 해결’과 ‘주의력 분산’이다. 이는 정보 전달 도구로서 인터넷의 두 가지 핵심 특성이기도 하다. 개리 스몰이 시사했듯이 인터넷을 사용하는 것은 십자말풀이를 하는 것 같은 방식으로 뇌를 ‘훈련’시킬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집중적인 훈련이 우리 사고의 주된 방식이 될 경우 깊이 있는 배움과 사고가 방해받을 수 있다. 십자말풀이를 하면서 책읽기를 시도해 보라.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인터넷에서 지적 활동을 할 때의 환경이다.
P.186 ~ 188

연구자들은 링크가 학습을 방해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

그녀는 링크의 개수가 늘어날수록 이해 정도가 떨어짐을 발견했다. 독자들은 링크를 평가하고, 클릭을 할지 말지를 결정하기 위해 높은 집중력과 함께 뇌의 역량을 쏟아부어야 했다. 이 때문에 읽고 있는 문서를 이해하는 데 사용할 인지적 자원이나 집중력은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

… 많은 연구 결과에서 하이퍼텍스트 내에서 부가적으로 의사 결정과 시각적 처리까지 신경 써야 하는 탓에 읽는 행위에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특히 이는 전통적인 선형적인 형태와 비교했을 때 더욱 그렇다.
P.192 ~ 193

인터넷상에서 너무도 보편화되어 있는 멀티미디어 기술은 “정보 획득을 증진하기보다는 도리어 제약할 것으로 보인다”고 연구자들은 결론 내렸다.
P.194

[인터넷 항해는] 뇌과학자들이 우리의 인지력에 ‘전환 비용(switching costs)’이라고 부르는 것을 부과한다. 우리가 관심을 전환할 때마다 뇌는 스스로 다시 방향을 잡아야 하고, 우리의 정신세계에 더 많은 고통을 가한다. 메기 잭슨(Megge Jackson)이 멀티태스킹에 관한 책 《집중력의 탄생(Distracted)》에서 설명했듯이 “뇌가 목표를 바꾸고 새로운 업무를 위해 필요한 규칙을 기억하고, 이미 지나갔지만 여전히 생생한 활동에서 오는 인지적인 훼방을 막아내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P.198

미국 국립신경질환뇌졸증연구소 소장인 조던 그래프먼(Jordan Grafman)은 온라인상에서 끊임없이 주의력을 분산시키는 것은 우리 뇌를 멀티태스킹에 맞도록 더욱 민첩하게 만들지만 멀티태스킹을 가능케 하는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은 깊이, 창조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사실상 저해하고 있다고 한다. “멀티태스킹을 위해 최적화하는 것이 더 나은 기능, 즉 창의성, 독창성, 생산성을 가져올까? 대답은 대부분의 경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라고 그래프먼은 말한다. 멀티태스킹을 더 많이 할 수록 덜 신중해지고 문제에 대해 덜 생각하고, 덜 판단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독창적인 사고로 도전하기보다는 관습적인 생각과 해결책에 의존할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
P.209

《사이언스(Science》 지에 2009년 초 발표된 논문에서 UCLA의 저명한 발달심리학자린 페트리샤 그린필드(Patricia Greenfield)는 여러 종류의 미디어가 인간의 지능과 학습 능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50건 이상의 연구를 종합 분석했다. 그녀의 결론은 “모든 미디어는 특정 기술을 희생하는 대상 다른 특정한 인지적 기술을 발달시킨다”는 것이었다.
P.210

이 회사[구글]가 가장 원치 않는 것은 여유롭게 읽는 행위나 깊이 생각하는 것을 독려하는 것이다. 구글은 말 그대로 산만함을 업으로 삼는 기업이라 할 수 있다.
P.231

한때는 편지, 전화, 밀담의 영역에 있던 사적인 메시지를 새로운 형태의 매스미디어의 소재로 바꿔놓음으로써 이 소셜네트워크 서비스들은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고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매력적이고 신선한 방식을 사람들에게 제공했다. 이 모든 것의 주안점은 신속함에 있다.
P.233

구글이 서둘러 건립하려는 이 거대한 도서관[구글 북서치]을 지금껏 우리가 알고 있던 도서관과 혼돈하면 안 될 것이다. 이는 짧은 발췌문만 가득한 도서관이다.

독서에 더 많은 효율을 부여하려는 구글이 노력에 숨겨진 역설은 우선 이 같은 노력이 책의 기술이 독서 그리고 우리의 사고의 가져다준 다른 종류의 효율성을 훼손하고 있다는 점이다. … 스크린을 통해 보여지는 글을 보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문서를 재빨리 해독할 수 있겠지만 (오히려 예전보다 더 빨리 읽는다) 문서가 함축한 바에 대한 깊고 사적인 이해를 기대할 수는 없다. 대신 우리는 또 다른 관련 정보의 조각으로 그리고 또 그 다음, 또 그 다음 조각을 향해 서둘러 달려든다. 이 ‘연관 콘텐츠’에 대한 노상 채굴은 의미 해석을 위한 느린 발굴을 대체하고 있다.
P.244

구글은 신도 악마도 아니며, 구글플렉스에 검은 그림자가 있다면 이는 그 장엄함에 따른 망상일 뿐이다. 이 회사의 창업자들이 불안한 이유는 그들이 창조주 보다 한발 더 나아가 사고할 수 있는 놀랍도록 멋진 기계를 창조하려는 소년같은 열망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이 같은 열망을 가지도록 한 그들의 인간 사고에 대한 이해 수준이 형편없기 때문이다.
P.259

소크라테스는 글쓰기의 영향에 대해 잘못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현명하게도, 기억이라는 자산을 당연시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기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기억 환기를 위한 재료[문자 - 형우]’를 제공함으로써 사고에 망각을 심어놓는 도구에 대한 예언은 웹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관심을 끌고 있다. 이 예언은 그저 시기상조였을 뿐 틀린 것은 아님이 입증되었다.
P.284

목수가 망치를 집어들 때 그의 뇌에 있어서 이 망치는 손의 일부다. 군인이 얼굴에 쌍안경을 들어올릴 때 그의 뇌는 새로운 눈을 통해 보며 즉각적으로 새로운 시각의 영역에 적응한다. 펜치를 사용하는 원숭이에 대한 실험은 말랑말랑한 영장류릐 뇌가 도구를 자신들의 감각 지도와 익숙하게 결합함으로써 어떻게 인공적인 것을 자연적으로 느껴지게 하는지를 보여 준다. 인간의 뇌에서 이 같은 능력은 우리와 가장 가까운 영장류들을 통해 나타나는 것보다 훨씬 더 발달해 있다.
P.300 ~ 301

기술의 힘을 지니기 위해 우리가 지불한 대가는 소외다. 이 비용은 지적 기술에 있어서는 특히 클 수 있다. 사고의 도구들은 확장되고 그 대가로 우리의 자연스러운 능력들 중 가장 사적이고 인간적인 것들, 즉 이성, 인식, 기억, 감정 등은 마비된다. 기계식 시계는 이 기기가 가져온 모든 이점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시간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앗아갔다. 루이스 멈퍼드가 현대적인 시계가 어떻게 “수학적으로 측정 가능한 사건들로 이루어진 독립적인 세상에 대해 믿음을 형성할 수 있도록 도왔는지”에 대해 묘사했을 때 그는 또한 그 결과, 시계가 “사람들의 일에서 시간을 고립시켰음”을 강조했다.

와이젠바움은 멈퍼드의 관점에 기초하여 주장하기를, 시간을 지키는 데 사용되는 기기에서 비롯된 이 세상에 대한 이해는 “예전과 비교했을 때 결핍된 수준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는 그 이해란 것이 오래된 진실의 기반이 되고 이를 구성하고 있는 직접적인 경험을 거부하는 데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한다. 언제 먹고, 일하고, 다고, 일어날지를 정하는
데 있어 우리는 우리의 감각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시계에 복종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더 과학적이 되었지만 더 기계적이 되기도 했다.

지도와 같이 단순하면서 장점만 지닌 듯 보이는 도구 역시 마비 효과를 지니고 있다. 우리 조상들의 길 찾기 능력은 지도 제작자의 기술로 인해 엄청나게 확장되었다. 처음으로 사람들은 전에 본 적이 없는 땅과 바다를 확신을 가지고 가로지를 수 있었는데, 이러한 발견은 탐험, 무역, 전쟁의 역사적 팽창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지형을 이해하고 머릿속에 주변에 대한 상세한 지도를 만들어내던 타고난 능력은 약해졌다.



기술이 확장시킨 능력들을 어떤 방식으로 ‘자가 절단’하는 수준에 이를 정도로 마비시키는지 설명함에 있어 맥루한은 지도나 시계 또는 동력 직기의 발명 이전에 존재했던 사회를 낭만적으로 그리려 하지는 않았다. 그는 소외는 기술 이용에 따른 피할 수 없는 부산물로 이해했다. 우리가 외부 세계를 더 광범위하게 통제하기 위해 도구를 사용할 때마다 세상과의 관계는 바뀌게 된다.



맥루한이 하고자 했던 말은 새로운 기술, 더 보편적으로 말해서 진보에 대해 솔직히 평가하자면 우리는 얻은 것뿐 아니라 잃은 것에 대해 민감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기술의 영광이 우리의 핵심 자아를 마비시킬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내부적인 감시의 눈이 멀도록 손을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
P.304 ~ 307

우리는 친절하고 유용한 소프트웨어를 원한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고의 많은 부분을 소프트웨어에 양도한다면 그 방식은 미묘할지라도 뇌의 능력을 상당 수준 감소시킬 가능성이 크다. 중노동자가 자신의 삽을 굴착기와 맞바꿀 때 비록 효율성은 증가하겠지만 그의 팔 근육은 약해진다. 사고의 업무를 자동화할 때도 유사한 현상이 발생한다.
P.313

인쇄된 문서에 비해 디지털 문서 찾기가 얼마나 용이한지를 고려할 때 인터넷을 통한 저널 검색은 학술적인 연구의 폭을 의미있게 확장시킴으로써 더 다양한 인용을 낳으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하지만 에반스의 발견은 이와 완전히 달랐다. 더 많은 저널들이 온라인 발행으로 옮겨 가면서 학자들이 인용한 논문의 양은 사실 예전보다 더 감소했다. 오래된 인쇄본 저널들이 디지털화되어 웹에 올려지고 있지만, 학자들은 최근 논문들을 더 자주 인용하고 있었다. 에반스의 묘사에 따르면 가능한 정보의 확장은 과학과 학문의 편협한 힘을 낳았다.

에반스는 2008년 《사이언스》 지에 실은 논문에서 이 통념과 정반대 결과에 대해 설명하면서 검색엔진과 같은 자동화된 정보 여과 도구는 대중성 증폭기로 작용해 어떤 정보가 중요하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다는 점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강요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게다가 하이퍼링크를 따라가는 것이 용이해짐에 따라 온라인 연구자들은 인쇄물로 연구했던 이들이 저널이나 책 페이지들을 넘기며 습관적으로 훑어 보던 관련성이 적은 논문들은 상당수 그냥 지나치게 된다. 에반스는 학자들이 더 빨리 우세한 의견을 찾을 수 있게 될수록 그들은 더 적은 수의 논문에서 더 많은 인용을 하며 이를 따를 가능성이 커진다고 적었다.
P.314

호손이 슬리피 할로우의 호젓하고 푸르른 곳에 앉아 사색에 빠져 있을 때 그의 머릿속에는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그리고 북적이고 시끄러운 기차 안에 있던 도시 거주자들의 마음 속에 일어나고 있던 일들과는 어떻게 달랐을까? 지난 20년 동안 이루어진 일련의 심리학 연구는 조용한 시골에서 자연과 가까이 하며 일정 시간을 보낸 후 사람들은 더 높은 집중력과 강력한 기억력, 그리고 보편적으로 향상된 인식을 보인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들의 뇌는 고요한 동시에 더욱 예민해진다. 집중력 회복이론(Attention Restoration Theory)에 따르면 그 이유는 사람들이 외부적인 자극의 폭격을 받고 있지 않을 때 뇌가 실제로 휴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끊임없이 이어지는 아래에서 위로의[“아래”는 내 통제에 있지 않은 외부 자극을 말한다 - 형우] 산만함을 처리하면서 작업 기억을 혹사시키지 않아도 된다. 그에 따른 결과로 이루어지는 사색은 그들이 사고를 통제하는 능력을 강화시킨다.
P.316

[“사고가 깊어지는 단계” 챕터의 40번 각주. “우리는 이제 잃어버린 구술 세상으로도, 시계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로 돌아갈 수도 없다”에 달린 각주다. - 형우] 어떤 이들은 짧고 비형식적이며, 구어적인 경향이 있는 인터넷에서의 소통은 우리에게 구두 문화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여러 가지 이유로 불가능해 보인다. 가장 큰 이유는 소통이 구두 문화에서처럼 직접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기계적인 중개인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디지털 메시지는 육체에서 분리된 채 알 수 없는 곳에서부터 나온다. 윌터 옹은 “구두의 세계는 글로 적힌 단어들이 그러한 것처럼 단순히 언어적인 맥락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발화된 단어는 언제나 육체가 관여하는 총체적이고 실존적인 상황에 대한 수정리다. 단순한 발성을 넘어서는 신체적인 행동은 우발적이거나 또는 부자연스럽지 않고, 심지어 불가피하다”고 적었다. Ong, Orality and Literacy, 67-68.
P.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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