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니스(Oneness)’는 ‘홀니스(wholeness)’다
‘원니스’, ‘코나투스’를 찾아가 ‘홀니스’를 만나다
봄날 어느 저녁에 삶은 계란, 계란말이, 계란 프라이, 계란찜이 만나 저녁요리상에 올라와 저마다 자기 신세 한탄을 시작했다. 맨 먼저 “삶은 계란”이라고 설파하는 삶은 계란이 입을 열었다. 삶은 계란과 다른 삶은 계란과의 만남은 마치 당구공처럼 부딪치는 찰나의 스침일 뿐이다. 스쳐 지나갔지만 스며들지 못하는 만남이고 관계다. 스쳐 지나갔지만 스며들지 못한 삶은 계란, ‘삶의 계란’이 되지 못했다고 서글퍼한다. 이어서 계란말이 신세 한탄을 시작했다. 동물성과 식물성 뒤섞여 불판에 말려들었지만 산산조각 이산가족된 계란말이, 서로를 말아먹고 말이 통하지 않아 서글프다고 글썽거린다. 계란 프라이가 뒤를 이어 말을 전한다. 기름에 튀겨져 흰자위로 어깨동무는 했지만 노른자가 말하는 심장은 통하지 않은 계란 프라이, 튀지 못하고 튀겨져 삶만 구겨졌다고 한탄에 한탄을 거듭한다. 마지막으로 계란찜에 식탁에 등장하면서 인생교훈을 촌철살인의 언어로 갈파하다. 뒤엉켜 한 그릇에 녹아들었지만 정작 나는 없어진 계란찜, 내 것으로 찜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고 하소연을 거듭한다.
계란의 정체성은 삶은 계란이 되면 다른 삶은 계란과 스쳐 지나가는 만남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별다른 영향을 받거나 주지 않고 자기 주관을 유지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계란찜이나 계란말이가 되면 존재 자체의 개성을 잃어버리고 다른 계란이나 음식재료와 뒤섞이면서 정체성이 변질된 제3의 자아로 탈바꿈된다. 한편 계란 프라이의 경우 강한 연대의식을 느끼면서 흰자위끼리 어깨동무를 하며 우정을 나누지만 존재의 핵심은 뒤섞이지 않고 자기 존재의 색깔을 유지하는 화이부동의 만남을 이어간다.
삶은 계란과 계란 프라이, 계란말이와 계란찜, 홀리스에 도달하지 못하다
요리상 위의 계란들은 현재 자신의 상태에 절망하고 있다. 이 절망의 핵심은 “진정한 나(Authentic Self)”를 어떻게 유지하거나 실현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다. 삶은 계란과 계란 프라이는 고정된 실체로서의 ‘나’를 유지하려 한다. 삶은 계란은 당구공처럼 타자와 부딪칠 뿐 스며들지 못하는 고립된 ‘개인(individual)’이며, 계란 프라이는 어깨동무(연대)는 하지만 심장(핵심)은 통하지 않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상태로 외로움을 느낄 수 있다. 이에 반해 계란말이와 계란찜은 타자와 뒤섞이며 정체성이 변질된 상태다. 계란말이는 이산가족이 되어 말이 통하지 않고, 계란찜은 뒤엉켜 녹아들었으나 정작 ‘나’라는 존재는 사라져 버린 상실감을 토로한다. 이 우화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타인과 관계 맺으면서도 고립되지 않고, 통합되면서도 나를 잃지 않는 방법은 없는가? 네 가지 계란 요리의 상태는 완벽한 통합 상태인 홀니스(wholeness)에 도달하지 못한 불완전한 단계들로 해석할 수 있다. 이들이 홀니스에 이르기 위해서는 별도의 다른 노력이 필요하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나란 무엇인가》에서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존재인 ‘개인(Individual)’에 반기를 들며, 관계에 따라 나뉘는 ‘분인(dividual)’을 제시한다. 우리는 부모님 앞에서의 나, 직장 동료 앞에서의 나, 연인 앞에서의 나가 각각 다르다. 이 중 어느 하나가 ‘진짜 나’이고 나머지는 연기가 아니다. 분인은 ‘불변하는 진정한 자아’를 상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아 사상과 궤를 같이하며, “자아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그때그때 생성되는 마디”라고 정의할 수 있다. 삶은 계란과 계란 프라이가 느끼는 한계는 히라노 게이이치로의 분인(dividual) 개념으로 설명된다. 인간은 나눌 수 없는 단 하나의 정체성(individual)이 아니라, 관계 맺는 상대에 따라 분화되는 여러 개의 자아(dividual)의 집합체다. 삶은 계란은 단단한 껍질과 속으로 자신을 가둔 고정된 ‘개인(individual)’이다. 그는 분인적 유연성을 발휘하여 타자에게 스며들지 못한다. 계란 프라이 역시 노른자라는 핵심을 고수하며 타자와의 완전한 융합을 두려워한다. 이 고정된 상태는 《코나투스(Conatus)》를 저해한다. 코나투스는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 기쁨을 증가시키려는 욕망/애씀’이다. 삶은 계란은 타자와 교류하며 더 큰 기쁨을 얻으려는 코나투스가 고립에 의해 억압당한 상태이며, 계란 프라이는 타자와의 깊은 정서적 유대(심장의 통함)를 통한 코나투스의 확장에 실패한 상태다.
반면, 계란말이와 계란찜은 통합을 시도했으나 외려 절망에 빠졌다. 이는 원니스(Oneness)에 대한 잘못된 접근이자 불교의 제법무아(諸法無我) 사상을 슬프게 해석한 결과다. 제법무아(諸法無我)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원리에 따르면, 나라는 존재는 독립적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인연(조건)의 결합체일 뿐이다. 자동차의 부품을 다 해체하면 자동차라는 실체가 남지 않듯, 우리 몸과 마음의 요소를 분석하면 그 어디에도 영원불변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무아(無我)는 내가 없다는 허무주의가 아니라, “고정된 나에 집착하지 말라”는 역동적 관계의 선언이다.
육현주 대표가 말하는 원니스는 “경계가 허물어지며 일체가 되는 통합”이지만, 이것은 결코 나의 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 계란찜은 타자와 물리적으로 뒤엉켜 녹아들었지만(통합), 정작 ‘나’라는 고유한 존재감이 사라졌다고 하소연한다. 이것은 진정한 합일이 아닌 ‘자아의 상실’이다. 계란말이 역시 서로를 말아먹는(잠식하는) 불통의 통합일 뿐이다. 제법무아는 “고정된 참다운 자아의 실체는 없다”는 사상이다. 계란찜은 제법무아의 상태(변하지 않는 나는 없다)를 Culinary(요리적)으로 구현했지만, 이것이 지혜나 해탈이 아닌 ‘내 것으로 찜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는 허무주의적 상실감으로 다가온다. 자아가 사라진 상태에서는 코나투스(존재 유지 욕망) 역시 발휘될 기반을 잃어버린다. 코나투스는 ‘나'라는 주체가 타자와 상호작용하며 확장되는 것인데, 주체가 사라져 버린 계란찜은 더 이상 기쁨을 느낄 수도, 증가시킬 수도 없는 상태다.
타자는 나를 ‘말아먹는’ 존재가 아니라 나를 ‘완성시키는’ 존재다
그렇다면 원니스가 코나투스를 만나 홀니스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신세 한탄을 거듭하는 계란들이 홀니스(합일로서의 완전함)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참나라니, 나참!」이라는 시에서 “나 아닌 존재와 연결되어야만 내가 되는 영롱함”이라는 시를 쓴 김선우 시인의 이슬방울이 보여주는 지혜가 필요하다. 김선우 시인의 이슬방울은 투명하고 연약하지만, 타자와 만날 때 당구공처럼 튕겨 나가지 않는다(삶은 계란 거부). 또한 타자와 섞여 자신의 투명함을 잃어버리지도 않는다(계란찜/계란말이 거부). 이슬방울은 서로에게 스며들되, 서로를 온전히 비춰주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진정한 완성을 보여준다. 이것이 육현주 대표가 말하는 “분열된 내가 진짜 나와 만나는 원니스”의 순간이다. 타자와 섞이기 전에 고립된 ‘개인(individual)’이 아닌, 먼저 내적 통합을 이룬 주체로서 내 안의 분열을 통합하고 강건한 코나투스를 가진 ‘진짜 나’로 서야 한다. 이렇게 강건한 코나투스를 가진 주체들이 만날 때, 이들은 자신의 색깔을 잃을까 두려워 경계를 쌓지 않는다(계란 프라이 거부). 이슬방울처럼 서로에게 투명하게 스며드다.
김선우 시인은 ‘이슬방울’을 통해 무아(無我)와 분인(分人)이 어떻게 ‘참나’에 도달하는지를 시적으로 증명한다. 이슬방울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 서늘한 밤공기, 풀잎의 경사, 적당한 습도라는 인연이 모여 잠시 맺힌 순간적 존재다. 이슬방울 속에는 온 우주(햇살, 바람, 나무)가 비치고 있다. 여기서 ‘참나’는 나 홀로 고고하게 존재하는 본질이 아니다. 주변의 모든 것과 연결되어 그들을 온전히 비추고 있는 ‘투명한 관계의 상태’ 그 자체를 의미한다. 이슬방울이 깨지는 순간 그 안의 우주도 흩어지듯, 관계를 벗어난 참나는 존재할 수 없다. 이슬방울처럼 서로에게 스며들 때, 고정된 자아에 대한 집착(individual)이 사라지는 진정한 제법무아를 경험한다. 하지만 이것은 자아 상실(계란찜)이 아니라, ‘나’가 ‘너’와 ‘자연’ 그리고 ‘큰 존재’로 확장되는 코나투스의 폭발적 증가다. 이 순간이 바로 육현주 대표가 말하는 통합 또는 합일로서의 원니스, 즉 홀니스(Wholeness)의 순간이다. 네 가지 계란 요리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관계와 정체성의 한계에 부딪혀 한탄했다. 이들은 타자와 부딪치거나(삶은 계란), 타자와 섞여 나를 잃거나(계란찜), 표면적인 연대에 멈췄을 뿐이다(계란 프라이). 이들이 구원받는 길은 이슬방울처럼 타자에게 투명하게 스며들되, 서로의 코나투스(존재 애씀)를 온전히 비춰주고 확장시키는 진정한 원니스를 실현하는 것이다.
고정된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진정한 제법무아), 경계를 허물어 나-타인-자연이 일체가 되는 순간, 타자는 나를 ‘말아먹는’ 존재가 아니라 나를 ‘완성시키는’ 존재가 거듭난다. 이때 3감(감동, 감탄, 감사)이 압도적으로 다가오는 홀니스(Wholeness)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신세 한탄을 하던 계란들이 서로를 이슬방울로 바라보는 순간, 요리상 위의 저녁 자리는 절망의 공간이 아닌, 서로의 존재가 통합되며 깊은 울림을 만들어내는 홀니스의 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될 것이다. 제법무아에 따르면 고정된 ‘나’라는 알맹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만나는 타자와의 관계만큼 존재한다. 이슬방울이 다른 관계의 그물망에 투명하게 교차할 때 비로소 ‘참나’가 반짝인다. 결국 제법무아와 분인, 이슬방울이 공통으로 말하는 바는 “나라는 존재는 명사(고정된 것)가 아니라 동사(변화하고 관계 맺는 것)”라는 사실이다. ‘참다운 나’란 내면 깊숙이 숨겨진 보물을 찾는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나를 둘러싼 타자와 세계와의 관계를 얼마나 풍성하고 투명하게 맺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상태다. 내가 만나는 사람, 내가 머무는 장소, 내가 읽는 책들이 곧 ‘나’를 구성하는 분인들이며, 이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질 때 우리는 비로소 제법무아의 지혜 속에서 이슬방울 같은 ‘참나’를 경험하게 된다.
‘원니스’는 ‘코나투스’가 폭등하는 순간 다가오는 ‘홀니스’로서의 참다운 자기다움이다.
“‘Oneness’는 하나를 뜻하는 ‘One’에 상태를 나타내는 접미사 '-ness'가 결합된 단어로, 중세 영어 ‘onnesse’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단어 그대로 ‘전체성’, ‘하나 됨’, ‘하나임’의 의미를 넘어 "분열된 ‘자아’가 ‘자기 Self’로 통합되는 과정”(5쪽)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원니스는 정체된 ‘명사’로서의 정체성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동사’로서의 부단한 생성을 반복하며 나다움의 온전한 모습으로 부단히 변신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정체성은 정체되어 존재하는 명사가 아니다. 정체성은 주어진 상황이나 환경에서 어떤 상호작용을 통해 자극을 받는지에 따라 나의 관점과 해석이 달라지면서 부단히 변신을 거듭하는 역동적인 동사다. 마음속에서 수시로 변덕스럽게 움직이는 마음 도깨비도 외부에서 입력되는 감정적 자극에 따라 부정적인 자아로 밑바닥을 기어 다니다가도 밝고 명랑한 기운을 만나면 긍정적인 에너지 모드로 급변한다. 분열된 자아(ego)는 방탕 생활을 할 수도 있고 기나긴 방랑을 거듭하다 대책 없이 방황하다 진짜 나(self)와 만나 통합되는 순간, 내가 하면 신나는 방향을 잡을 수도 있다.
원니스는 “분열된 내가 진짜 나와 만나는 순간, 나-타인-자연 그리고 어떤 큰 존재와의 경계가 허물어지며 일체가 될 때 3감(감동, 감탄, 감사)이 압도적으로 다가오면서 통합 또는 합일로서의 원니스, 즉 홀니스(Wholeness)의 순간”(6-7쪽)이다. 자아가 자기로부터 분열되어 있을 때 인간은 무력감을 느끼지만, 원니스(Oneness)라는 역동적인 과정을 통해 자기(Self)와 통합될 때 이 존재의 힘(역능)은 극대화된다. 이때 느끼는 압도적인 ‘3감(감동, 감탄, 감사)’은 물론 감격하고 감명받으며 내 안의 코나투스(Conatus)가 억압에서 벗어나 가장 온전하게 발현되는 홀니스(Wholeness)의 상태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분열된 자아가 참다운 자기와 만나는 순간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코나투스와 만나는 접근이라고 해석해 볼 수 있다. 코나투스는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 확장하려는 본질적인 힘’을 뜻하다. 코나투스는 심각한 가뭄으로 굳어진 땅 속, 메마른 돌틈이나 콘크리트 틈새, 그리고 뙤약볕이 내리쬐며 달궈진 아스팔트의 열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씨앗을 틔워 성장하려는 강렬한 생존 본능이다. 어떤 열악한 환경에도 척박한 환경을 뚫고 자기 존재를 드러내려는 본원적인 힘이다. 코나투스는 또한 거센 비바람에도 꺼지지 않고 자기 존재를 유지하려는 촛불의 안간힘이다. 외부 억압이나 방해에도 존재의 살아가려는 욕망을 굽히지 않고 자기 몸을 끈질기게 태워 빛과 열을 내는 촛불처럼 스스로를 지키며 끈질기게 버티는 생존본능이다. 코나투스는 스스로를 지키는 끈질긴 생명력의 원천이다.
여기서 말하는 홀니스는 단순히 섞이는 것이 아니라, 분열된 자아가 진정한 자기를 만나고 타자 및 세계와 경계 없이 합일되는 감동과 감사의 순간이다. 결국 원니스는 멈춰있는 상태가 아니라, 코나투스라는 자기다움을 드러내려는 생명의 동력을 통해 끊임없이 ‘진정한 나(Self)’로 나아가는 역동적인 여정인 셈이다. 자아가 자기로부터 분열되어 있을 때 인간은 무력감을 느끼지만, 원니스(Oneness)라는 역동적인 과정을 통해 자기(Self)와 통합될 때 이 존재의 힘(역능)은 극대화된다. 이때 느끼는 압도적인 ‘3감(감동, 감탄, 감사)’은 물론 감격하고 감명받으며 내 안의 코나투스가 억압에서 벗어나 가장 온전하게 발현되는 홀니스(Wholeness)의 상태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원니스는 멈춰있는 상태가 아니라, 코나투스라는 생명의 동력을 통해 끊임없이 ‘진정한 나(Self)’로 나아가는 역동적인 여정인 셈이다.
모든 존재는 그 자체로 온전한 전체인 동시에, 더 큰 전체의 부분이다
통합 철학자 켄 윌버(Ken Wilber)의 말이다. 모든 존재는 부분과 전체의 역동적 상호작용을 통해 부단히 자기 변신을 거듭하며 가장 나다운 자기다움을 향해 부단히 성장하고 장성한다. 우주라는 완전한 전체(홀니스, 원니스) 속에서, 각 개체는 자신을 유지하고 확장하려는 고유한 힘(코나투스)을 발휘한다. 흥미로운 점은, 개체가 단순히 전체의 부속품이 아니라 전체의 질서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축소판(프랙털)이라는 사실이다. 결국 부분과 전체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개성을 잃고 완전히 똑같은 하나로 뭉개져 있지도 않은 오묘한 상태(不一不二를 이룬다.
‘불일불이不一不二)’는 한자 그대로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라는 뜻으로, 주로 동양 철학에서 우주의 실상을 설명할 때 쓰는 말이다. 이 개념은 앞서 다룬 프랙털의 구조적 딜레마와 코나투스의 동력적 딜레마를 완벽하게 해결해 준다. 가장 이해하기 쉬운 비유로 바다와 파도를 떠올려 볼 수 있다. 파도(개체)는 바다(전체)에서 떨어져 나와 혼자 존재할 수 없다. 파도의 본질은 그저 바닷물일 뿐이다. 앞서 프랙털(내 안에 전체의 구조가 있음)과 코나투스(나의 에너지가 우주 전체의 조화와 연결됨)에서 보았듯, 부분과 전체는 뚝 떨어져 분리된 별개의 존재, 즉 ‘둘’이 아니다. 즉 홀니스와 원니스는 둘이 아니다(不二). 하나도 아니다(불일, 不一). 그렇다고 해서 파도와 바다가 완전히 똑같은 하나도 아니다. 바다에는 수백만 개의 각기 다른 파도가 끊임없이 친다. 어떤 파도는 높고 세차며, 어떤 파도는 잔잔하다. 각 개체는 자신만의 고유한 형태(프랙털의 한 조각)와 생명력(코나투스)을 가지고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개성이 다 뭉개진 밋밋한 덩어리가 아니니 완전히 ‘하나’라고 부를 수도 없다.
부분 속에 담긴 전체를 지칭하는 개념이 있다. 바로 프랙털(Fractal)이다. 우리가 사는 우주나 자연은 단순히 여러 부품이 조립된 기계가 아니라, 쪼갤 수 없는 하나의 완전한 바탕, 즉 홀니스(전체성)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전체 속에서 부분인 개체들은 어떻게 존재하고 있을까. 프랙털은 잣나무 가지, 눈송이, 해안선처럼 ‘작은 구조가 전체 구조와 비슷한 형태로 끝없이 되풀이되는 성질(자기 유사성)’을 말한다. 예를 들어 고사리잎의 아주 작은 잎갈래 하나를 떼어내서 확대해 보면, 놀랍게도 큰 고사리잎 전체의 모양과 완벽하게 닮아 있다. 즉, 프랙털의 관점에서 부분은 전체에서 떨어져 나온 단순한 ‘파편’이 아니라, 전체의 질서와 정보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축소판’이다. 이 원리를 홀니스에 적용하면, 우주 안의 개체(인간, 동물, 별 등)는 유한하고 작아 보이지만 그 내면의 구조는 거대한 우주 전체의 패턴을 품고 있다. 부분 안에 이미 전체가 들어있는 오묘한 섭리를 발견한다.
이 거대한 퍼즐을 단계별로 맞춰가기 위해, 나를 향한 에너지가 우주로 확장되다 만나는 코나투스와 원니스의 마주침은 신비한 만남이다. 스피노자가 말한 코나투스는 모든 개체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 생명력을 확장하려는 본질적인 힘, 즉 자기 보존 욕구를 넘어 가장 나다운 자기다움으로 살아가려는 강렬한 욕망을 뜻한다. 얼핏 들으면 “나만 잘 살면 돼!”라는 이기적인 생존 경쟁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이 힘은 자연스럽게 원니스(하나 됨)의 감각으로 이어진다. 앞서 프랙털에서 보았듯, 개체는 결코 전체와 분리되어 홀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맑은 공기를 마시려면 지구의 숲이 건강해야 하고, 내가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려면 내가 속한 사회 공동체가 안정적이어야 한다. 즉, 개체가 자신의 생명력(코나투스)을 온전히 꽃 피우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나와 타인, 인간과 자연이 깊이 연결된 하나의 공동체라는 사실(원니스)을 깨닫고 조화를 이룰 수밖에 없다. 철저히 나를 위하는 방향이 결국 전체를 위하는 방향으로 확장되는 논리다. 우리가 숨을 쉬기 위해 나무의 광합성에 의존하는 것처럼 말이죠. 혹시 우리 일상이나 자연 생태계에서 이처럼 '개체의 생존이나 이익(코나투스)'을 추구하는 행동이 결국 '전체의 조화(원니스)'와 연결된다.
우주(전체)와 나(부분)는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은 완전한 하나(홀니스, 원니스)이지만, 동시에 우주는 각 개체가 고유한 힘(코나투스)을 발휘하며 다채로운 형태(프랙털)로 존재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이것이 바로 불일불이의 신비다. 바다와 파도의 비유처럼, 우리가 일상 속에서 “분명히 하나로 연결되어 있지만(불이), 각자의 고유한 개성이 살아 숨 쉬는(불일)” 관계를 경험하는 곳이 바로 우리의 일상이다.
코칭은 상대의 잠재성을 일깨워 경이로운 기적을 일으키는 다정한 상상력이다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은 다른 말로 코나투스가 폭등하는 순간이다. 코나투스대로 살아가면서 전율하는 행복감이 내 몸을 파고들 때, 그 순간은 우주와 나와 내가 머물고 있는 공동체가 혼연일체가 되어 공중부양되는 느낌이다. 이런 원니스의 충일감을 한 권의 책으로 담아낸 육현주 코치의 《원니스》라는 책은 나 자신이 존재 자체로 이미 완전하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저도 육현주 코치를 십수 년간 가까이서 지켜보면 깨달은 산증인으로서 이 책을 강력하게 권하는 추천사도 아래와 같이 썼다.
“코칭은 내가 진정한 나와 연결될 수 있도록 돕는 발견의 과정이다. 또한 스스로를 직시하고 치유하도록 돕는 선물이다. 나, 너, 우리, 우주는 독립된 ‘하나’처럼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뿌리로 단단히 연결된 거대한 한 그루 나무다. 개별적 파도로 넘실대며 떠돌아도, 근원으로 파고 들어가면 결국 동일한 바다에 닿는다. 그것이 하나됨Oneness, 즉 원니스다. 이 책은 오랜 경험과 깊은 탐구를 바탕으로 독자 스스로 자기 자신과 둘러싼 세계를 탐구하도록 안내한다. 원하는 길을 찾도록 내면의 나침반 역할을 함은 물론, 따뜻하게 위로하며 곁을 지키는 단단한 동반자 역할을 해낸다. 살아있음의 전율을 온몸으로 느끼며, 삶을 감동과 감탄과 감사로 물들이고 싶은 이들에게 일생의 지침서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원니스’는 ‘원’하는 삶은 ‘니’ ‘스스로’ 찾아가는 역동적인 여정에서 만나는 신비하고 경이로운 선물이다. 그 선물을 이미 내면에 갖고 있으면서도 그걸 일깨우지 못하고 마음 도깨비가 드리우는 어두운 그림자에 가려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완전(complete, total)하고 완벽(perfect, flawless)하지 않지만 자기다움을 잃지 않고 코나투스의 힘으로 원니스를 찾아 온전한(intact, sound) 전체(wholeness)로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은 어둠 속에서 빛나는 북두칠성처럼 우리가 걸어가는 밤길의 다정하고 영원한 동반자가 되어줄 것이다. “다정함은 약함이 아닙니다. 상대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는 힘을 ‘다정함’이라고 하는 겁니다...... 다정함이란 상상력을 말하는 겁니다”(222쪽). 나쓰카와 소스케의 《신의 카르테 0’》 중에서 나오는 말이다. 코칭은 상대의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성을 마음껏 발휘해서 원니스로 살아가며 코나투스를 만나 홀니스가 되는 경이로운 기적을 일으키는 다정한 상상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