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통감 資治通鑑
2025. 10. 9(목)
북송 시대의 사마광(1019~1086)이 1084년에 전국시대부터 송나라 건국 직전, 당나라까지 1,300여 년간의 역사적 사실과 평론을 담아 흥망성쇠를 기록하였다. 통지通志라 지은 책 이름을 북송 신종이 자치통감으로 고쳤다. 자치통감은 정치, 군사, 민족 관계를 위주로 하고 경제, 문화,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를 담고 있다. 후손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한 목적으로 저술하여 중국 역대 황제들의 필독서였고 민간에도 널리 퍼졌다. 청나라 사학자인 왕명성은 “지금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되는 책이니 학자들은 반드시 읽어야 한다”라고 했다. 자치통감은 사마천의 사기에 필적할 만하다는 평가다.
<하은주가 춘추전국시대에 찐하게 위진남북조에서 수당송원명청했다더라>는 중국왕조를 암기하는 나만의 방식이다. 이중 <전국시대에 찐하게 위진남북조에서 수당>까지 역사를 담고 있다.
전국시대에 관한 역사는 다음과 같다.
소진이 합종책으로 진나라를 나눠 가지고, 장의의 말재주(연횡책)도 전국시대를 좌지우지했다. 전국시대 책사들이 펼친 외교 이야기로 암기 수준 벗어나 ‘진초제한위조연’의 위치를 알아야 내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역사지도가 필요한 까닭이다.
모수자천 - 낭중지추를 보여 주는 사례다. 3년간 식객으로 머무르던 모수가 스스로 나서서 진나라의 침략에 조나라가 맞서기 위해서는 가까이 있는 위나라는 인척 관계이므로 지원을 받을 수 있으니 멀리 남쪽에 있는 강국인 초나라의 지원을 이끌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진나라를 두려워하는 초왕을 대담한 말과 하늘을 찌를 듯한 호기로 설득한다.
한신, 소하, 장량을 한초삼걸이라 한다.
홍문에서의 회동 – 함곡관을 먼저 점령하고 진을 멸한 유방과 장량이 유방의 10만보다 많은 40만 군을 거느린 항우와 범증의 위협을 극복하는 과정을 기술한다.
주군을 찾아 항우에게서 유방에게 간 한신의 어릴 적 이야기와 유방이 동쪽으로 정벌을 나서게 한 계책을 기술하고 한신이 판단한 유방과 항우의 용병술을 비교한다. 민심을 얻는지 아닌지가 천하 제패의 관건이다.
초패왕 항우가 오강에서 스스로 목을 벤다. 자신의 최후를 알아채고, 강동으로 피하지 않고 자결하여 친구 여마동에게 상금을 받을 기회를 준 항우의 최후를 볼 수 있다. “듣기로 내 머리를 벤 사람에게 한왕이 상금 천 냥을 주고 일만 호의 봉후를 하사한다고 했다더군. 나를 그대에게 넘겨주면 조금 도움이 되겠구나”(p. 80)라는 말을 마친 항우는 자결해 죽었다.
한나라의 역사가 이어진다.
장석지의 일화 – 관리를 추천할 때 말보다는 인품이 중요하며, 미관말직에서 급격히 높여 중용함을 경계한다. 왕이 탄 말을 놀라게 한 사람, 왕릉의 기물을 훔친 자에 대한 처벌을 왕의 예측과 기대와는 달리 법에 따라 공정하게 처리하는 장석지.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윗사람에게 필요한 덕목이다.
곽거병은 18~24세까지 흉노와 싸워 연전연승했다. 19년간 한무제의 은덕을 기억하며 회유되지 않고 흉노에게 고초를 겪다가 귀환한 소무와 반대의 길을 걸었던 이릉의 이야기를 듣는다.
충성을 다한 관리들(정강, 두교, 소장) 오늘은 친구지만 내일은 자사와 태수로 만나 법대로 처리하는 관리. 세금을 유용해 아버지의 옷을 마련한 아들을 훈계, 자수하게 하고 이를 안 오출은 아버지에게 가서 배우라고 돌려보낸다.
서역의 작은 나라들이 흉노와의 관계를 끊고 한나라와 친교를 맺게 한 사자 반초의 이야기.
한 장제 때 외척에게 작위 내리기를 거부한 마태후의 이야기는 “나는 한 나라의 어머니로서 응당 천하의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하오. 그래서 나는 근검절약을 숭상해 한 번도 비단옷을 입어본 적이 없고 맛있는 음식으로 가득한 성찬을 먹어 본 적이 없소, 게다가 귀중한 장신구를 몸에 지니지도 않는다오”(p. 136) 김건희는 이런 역사를 몰랐고 돈에 눈이 돌아있었다.
서진西晉의 멸망은 무능한 군주와 사리사욕에 어두운 관리들 탓이다. 모용외와 고구려 간 국경 분쟁을 다룬다(p.156~164).
북위 – 북제의 문선제의 시작은 창대했으나 술과 충동적인 일 처리로 끝이 나빴다. 큰 가마솥, 긴 톱, 큰 작두, 돌로 된 디딜방아 같은 형틀을 발명했다.
북위의 호태후는 호명제에 대한 섭정을 연장하려 명제의 충신들을 죽이고, 3세밖에 안 되는 원쇠를 즉위시켰다. 이주영이 ‘하음지변’으로 전복시켰다. 북제의 곡률광 對 조정이란 소인배의 이야기로 곡률광은 인척으로 패전한 일이 없는 전공을 세웠으나 겸손하고 이치에 맞게 행동해 존경받았다. 조정은 이기적이고 비열하며 욕심이 끝이 없는 소인배였다.
당나라의 역사를 엿본다.
당 고조 이연이 아우라 불렀고 중요하게 생각했으나, 이밀은 제 생각보다 대우가 좋지 않아 불만을 품고 반란을 시도했으나 충직한 이연의 부하에게 웅이산 계곡에서 패한다.
이연은 20 여명의 어린 황자를 낳았다. 이세민은 비빈들과 영합하지 않았고, 돌궐의 침입에 맞서 동맹을 맺어 돌궐 대군의 침입을 막아냈다. 당 고조에게 이건성, 이세민, 이원길이라는 세 아들 중에서 9년의 재위 기간을 끝내고 이세민을 황제로 등극시켰다. 이세민은 위징과 정사를 돌본다.
이세민의 아내 장손황후는 비빈을 존중하고 검소하게 살았다. 당 태종은 국사를 아내와 의논하려 했으나 아내는 나랏일에 참여를 거절했다. 어질고 현명했던 일 처리를 열거한다.
정관 10년(AD. 636년)에 별세하고 당 태종의 세 아들 중 첫째는 반란, 둘째는 부적합 판정, 셋째 이치 증에서 진왕이었던 이치를 태자로 삼는다. 고구려와의 싸움에 관한 기술은 없다.
무측천(재위 기간 15년)은 이현에게 황위를 넘기니 당 중종이 된다. 무측천 사후 묘비에는 한 글자도 적지 않았다. 그녀 일생의 공과와 시비 모두를 후세의 판단에 맡긴 것이다.
감로지변 – 당 문종 시기 환관과 조정 대신, 황실과의 권력 다툼이 빚은 사건으로 환관의 위치를 황실의 가노로 볼 것인가? 아니냐는 의문과 함께 환관의 폐해를 가늠하게 하는 사건이다. 사악한 환관이 정의의 대신을 친 것이 아니라, 사악한 대신의 음모가 정의의 환관에 의해 좌절된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당 무종 때(AD 844년) 회족(위구르)의 반란, 양변의 반란, 등 여러 반란이 일어나 이를 평정하려 한다. 소의와 태원이란 두 지역의 반란을 토벌한다. 민심을 얻어 반란군을 토벌하는 방책이 최고임을 기술한다. 당 의종 때는 남조군의 침입을 막아내느라 정신이 없다. (남조군은 윈난, 구이저우, 쓰촨, 티베트, 베트남, 미얀마의 일부를 포함하는 범주다)
당 희종 때(AD 880년) 황소가 난을 일으켜 수도 장안에 진입한다. 회남절도사 고변은 도술에 깊이 빠져 화남지역의 정무가 혼란에 빠진다.
고인후의 지략 –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아군 진영에서 찾아낸 밀정에게 은혜를 베풀고 풀어주면, 밀정은 돌아가 반란군 진영에서 이탈자를 양산케 하고, 이들의 도움으로 반란을 평정하는 방식을 여러 지역에서 사용한다.
백성을 약탈하지 말라는 지시가 전쟁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역사가 가르친다. 국공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대륙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역사에서 배운 바가 있기 때문이다. 모택동은 엄청난 독서가였다.
당 소종의 폐위(AD 900)는 아둔한 황제는 폐위하고 현명한 황제를 옹립하는 전통의 하나였다. 맹자의 사상은 중국과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살아있기에 2025년 새로운 정부가 탄생한 거다.
반복하는 ‘이야기’라는 표현은 역사적 사실이다. 중국 1,300년 역사를 다룬 『자치통감』에서
사람을 알아볼 줄 알아야 리더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한 가지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나설 때와 물러날 때를 알아야 한다.
패자가 주는 가르침도 훌륭하다.
힘으로 얻은 권력과 위임받은 권력은 다르다.
민심을 얻는 일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
겸손, 베풂의 결과는 자신에게 돌아온다.
역사서는 지도를 펼치고 읽어야 시공간을 이해하기 쉽다.
P.S. 당 태종의 치세를 다룬 『정관정요』를 이어 읽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