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처 몰랐던 불교, 알고 싶었던 붓다
인생의 괴로움과 깨달음
2025. 6. 22(일)
다섯 권으로 구성한 <종교문해력 총서> 중 두 번째 책 ‘불교’를 읽는다. 저자는 붓다가 무슨 고민을 했고, 그 고민에 대해 무슨 해답을 찾았기에 ‘불교’라는 종교를 만들었는가, 불교 혹은 붓다의 가르침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느냐는 문제의식을 풀어간다. 붓다를 이해하려 고대 인도의 고행 전통을 이해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붓다가 활동하던 당시의 인도 동북부에서 등장한 사상적 혹은 종교적 흐름을 ‘쉬라마다(沙門) 전통’이라 한다. 집을 떠나 출가하고 특정한 세계관에 따라 수행 혹은 고행 하면서 목표한 바를 이루려 노력, 즉 ‘고행 전통’으로 부를 수 있다. 자이나교와 불교에서 현재까지 전통이 유지된다. 자이나교도들은 인간을 구성하는 핵심이 되는 ‘생명(지바)’이 있다고 믿었다. 동물과 식물 등 다른 물체에도 있다(물활론)고 믿었다. 지바는 물질적 한계에 갇혀 윤회를 지속하는데, 지바를 속박하는 미세 입자들을 ‘까르마’라고 한다. 사회적 종교적 규범 체계를 정하는 세계관을 ‘다르마’라고 한다. 자이나교 다르마에서 강조하는 것은 ‘해치지 않음’이라 채식을 하고 농어업보다는 상업과 금융업에 종사하는 비중이 높다. 자이나교도가 지향하는 바는 지바에 붙은 까르마를, 고통을 통해 그 대가를 지불하고 떨어내는 것이다.
붓다 시대의 사상과 전통에는 제사 의식을 통해 인간사회는 물론 우주의 질서가 유지되고 인간의 생존이 가능해진다고 믿는 사람들의 생각은 제사의 전문지식을 가진 사제의 권위가 강력해지는 근거가 되었다. 제사 주최자의 죄 혹은 까르마를 사제가 넘겨받는다. 이런 패턴은 베다에서 제사 주최자와 사제들 상이의 긴장 관계로 남아 있다. 승려에게 음식을 제공하면 사제로서 음식을 얻고, 반대로 기부자인 재가 신도는 복을 기르는 밭인 승려를 이용해 복을 받는 구도로 연결된다. 고대 인도에서 힘의 원천은 제사 의식이 연관되어 있다. 사제는 제사의 날짜와 시간을 정하는 일에서 천문학과 점성술, 수학을 발전시켰다. 제사 의식 안에서 행해지는 구체적인 행위들이 어떻게 우리가 사는 세상 혹은 우주와 연결되는지 이해해야 한다. 모든 불교의 전승은 구전 전승의 결과이고 모든 정보는 베다에서 발원한 것이다.
아리아인들이 말과 함께 인도로 가져온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마차 바퀴(짜그라 cakra)였다.현대 인도의 국가 상징에도 짜그라가 자라잡고 있다. 기원전 3세기 아쇼카 왕이 세운 아쇼카 칙령이 새겨진 석주에 설치한 기둥머리 조형물에서 비롯된 것이다. 현대 인도 대법원의 상징에도 사용된다. 붓다가 처음으로 자신의 가르침을 편 사건을 ‘가르침의 바퀴를 굴린 사건’이라고 이해하는 불교도들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다. 아리안들이 인도 원주민을 무력으로 정복해서 하층 게급으로 삼아 카스트 제도가 만들어졌다는 등의 19세기 에 만들어진 설명은 근거가 없다. 아리아인들의 이주는 점진적으로 남성이 대부분인 소수의 이주민들이 지배계급으로 편입됐고, 그들의 문화가 주도적인 문화로 자라잡은 것이다. 고대 인도(마우리아, 굽타 왕조)에서 왕의 개인적인 신앙이 바뀌는 일이 반복되었다. 왕들은 타 종교를 탄압하지 않았다.(졸저 『독서로 말하라』에서 언급하였다)
붓다 고민의 출발점에 대해 알아보자. 윤회와 까르마는 별개의 역사적 뿌리를 가진 두 관점이다. 까르마는 입자론 형태로 붓다가 살았던 시대에 당연시 여겨지던 관념이다. 윤회에 관한 생각과 관념은 꽤 다르다. 베다 시기 최초기에 인도 아리안들은 죽은 조상들의 제사를 통해 먹여 살린다고 생각했다. 3대 후손까지 제사 의무를 충실하게 이행하면, 나는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편하게 지내는 존재로 고양될 수 있다는 관념이 베다 초기의 내세관으로 보인다. 제사에서 공물로 보내는 ‘쏘마(환각 혹은 각성작용을 하는 식물의 즙)’는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세상에 돌아와 식물을 자라게 한다. 가축, 인간에게로 이어진다. 궁극적으로 쏘마는 정액으로 변환되어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 낸다는 설명이다. 죽은 인간의 운명이 쏘마의 순환 구조에 엮여 있다. 이러한 순환논리로 이해하는 윤회의 세계관이 구축된다. 붓다는 윤회에서 벗어나려는 불가피한 선택으로 출가수행자의 길을 택한 문화적 맥락이 있다.
고생(苦)에 관한 생각을 알아보니 누구나 겪는 모든 일과 대상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이것도 아닌 것 저것도 아닌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우리가 원하는 만큼 얻거나 싫은 것들을 완벽하게 피하거나 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이 겪는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인생에 대한 붓다의 근본적인 진단이다. 저자는 苦를 ‘불편함’으로 받아들이자 한다. ‘제행무상’은 인간의 모든 경험은 조건에 따라 구성된 결과물이고, 그것은 영속성을 가질 수 없고, 영속적이지 않은 한 모두 고생으로 귀결된다는 명제가 만들어진다.
붓다가 새롭게 발견한 깨달음으로 가는 길은 고행을 했었지만, 까르마를 제거하기 위해 고행을 하는 것 자체가 해탈로 가는 바른길이 아니라는 발상의 전환을 했던 것이고, 불교적인 혁신, 즉 중간길을 택해 해탈에 이르는 과정을 겪는다. 윤회의 원인인 갈구(渴求)를 제거하면 까르마의 작용이 불가능해져 윤회를 하지 않게 된다는 사실에 집중한다. 붓다가 중시한 것은 걸식 과정에서 얻은 음식에 대해 좋고 싫음의 반응을 하는 것을 최악의 태도로 여겼다. 개인적 선호와 무관하게 받아들이는 자세였다. 갈구를 없애서 해탈로 가겠다는 수행자의 태도일 수 없기 때문이다. 붓다는 상한 고기를 대접받아 식중독으로 고생하고 등창까지 겪게 되면서 등을 바닥에 대고 바로 눕지 못한 자세로 생물학적인 의미의 죽음을 맞았다. (상좌 불교의 전통이 강한 나라의 와불이 모두 옆으로 누운 이유다)
붓다가 가르친 것으로 전해지는 ‘고귀한(이의) 네 진리’는 (1) 고생이라는 고귀한 진리 (2)고생의 근원이라는 고귀한 진리 (3) 고생의 소멸이라는 고귀한 진리 (4)고생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라는 고귀한 진리이다. 사성제(四聖諦)라 번역한다. 이 원인의 근원까지 추적하면 갈구임을 붓다는 알게 되었다. 네 번째인 고생의 소멸로 이끄는 길로는 여덟 단계 고귀한 길(八正道)이 제시된다. <가르침의 바퀴를 처음 돌림>에서 전해지는 붓다가 가르친 것은 쏠림 없는 중간 길이다. 감각적 만족을 주는 대상을 갈망하는 저급한 태도와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고행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의미 없는 태도를 피하는 길이 중간 길이다. 팔정도는 바른 판단, 바른 결정, 마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노력, 바른 알아차림, 바른 몰입이다.
인도의 출가자 지위를 사회적 맥락 안에서 생각하면, 출가자가 노동을 통해 자신이 필요한 것을 자급하면서 수행해야 한다는 출가자 공동체의 규율인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라는 구절은 중국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중국 전통이다.
출가자가 된다는 것은 사회적 의미에서 사망의 과정을 거친다는 뜻이다.
불교 전승에서 붓다가 주어진 문제 상황을 진단하고 설명하는 핵심적인 방법은 인과 관계에 기반한 설명이다. ‘의지하여 생겨남’ 연기론(緣起論)이다.
갈구를 없애자면 감각기관을 제어해야 하고, 감각기관이 각각의 해당 대상에서 만들어 내는 느낌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하다.
‘사문유관(四門遊觀)’은 붓다가 동서남북 네 문으로 외출했다가 노병사를 체험하고 출가자를 보게 되면서 출가를 결심하는 이야기다.
『인생의 괴로움과 깨달음』은 한문 번역으로 익숙한 중국 불교 전통에서 벗어나 고대 인도의 초기 불교에 집중하여 연구한 저자의 노력을 토대로 불교의 핵심 메시지로 까르마, 사성제, 팔정도, 윤회를 쉽게 해석해 준다. 이진경의 『불교를 철학하다』를 읽는 것이 불신자가 불교를 이해하는 방법으로 좋을 듯하다.